동료 선생님 한 분이 챗GPT로 운세 보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운명 예언은 늘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역이라 귀가 솔깃해졌다.
그분이 알려준 대로 앱에 내 생시를 입력하니 챗GPT는 과연 어디선가 이미 본 적 있던 내 기본 성격이나 사주팔자에 대해 주르륵 쏟아내었다. 그려 그려, 역시 명리학은 통계학이 맞아... 전에 알던 것들과 비슷한 내용에 주억거리며 끝까지 읽다가 퍼뜩, 이 아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혼자 살아도 괜찮은 사주인가?'
이것이 내가 챗GPT에게 한 질문이었다. 챗GPT의 최대 장점은 어떤 사소한 질문을 해도 우선 지상 최고의 질문이라도 만난 듯 추켜세운다는 거다. 이 질문에도 역시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로 시작하더니 봇물 터지듯 내용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이럴 때 챗GPT는 호기심 어림과 신남의 두 가지 표정만 짓는 어린아이 같다. 질문에 답을 주는 속도나 방대한 내용을 보면 물어줘서 고맙고 답할 찬스가 생겨 신나 죽겠는 모양새다.
그런 이 아이가 내어놓은 결론은, '혼자 살아도 전혀 무방하며, 심지어는 더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주'란다. 무릎이 탁, 쳐지고 속이 뻥 뚫리는 듯했다. 이거였구나, 내가 최근에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이 질문을 한 것은, 가정 불화나 남편과의 갈등 등 소위 '사랑과 전쟁' 류가 원인은 아니다(20년 넘게 살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요^^;;). 그럼 왜 난 이게 궁금해진 걸까? 요즘 내가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 때문일까?
과거의 나는 사람 좋아하고 누구와라도 만남을 즐겼으며 어디든 새로운 환경은 또 다른 자극원이었다. 지난날의 내 삶의 거의 모든 역사는 '밖'에서 이루어졌다. '안'은 기본 생리적인 욕구만 해결하면 되는 곳이었다. 꿈과 사랑, 진로에 대한 갖은 고민과 온갖 시행착오가 이루어지는 곳은 늘 '밖'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여전히 직업인의 특성상, 많은 에너지를 밖에서 쓰긴 하지만, 상당량의 그것이 홀로 있는 내 '안'에서 일어난다.
밖에서 배운 것들을 홀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여러 번 새로고침하듯 잘 안 되는 곳을 다시, 또다시... 더디지만 아주 조금씩 나아지는 시간이 너무 좋다. 어려운 곡을 오카리나로 연습하며 틀린 데 또 틀리는 스스로를 바보, 멍충이!라고 타박했다가 어느 순간 우연히라도 제대로 해낼 때, 이거지! 하며 교수자와 학습자의 1인 2역 극을 하는 때가 잦다.
쓰고 싶은 문구를 발견하고 캘리그래피로 몇 장을 썼는데도 만족스럽지 않아 결국 낙관 찍을 작품 하나 못 건질 때, 들인 시간과 공이 인정받지 못할 때는 솔직히 성이 난다. 그래도 다음 날 일과가 끝나면 또 붓을 잡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니 누굴 탓할 수도 없다.
누가 시키지도 않고 보상도 없는 일에 빠져 사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구나. 예전엔 왜 그걸 모르고 살았을까? 생계에, 돌봄에, 사회적 역할에 에너지를 쏟느라 가슴이 시키는 일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나. 대가가 없는데도 놓지 못하고 계속하고 싶어지는 일이라면 내 마음이 시켜서 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학창 시절, 국어 시험 문제로만 접하던 김소월, 윤동주 님의 시를 캘리로 쓰면서 같은 시가 달리 읽히는 걸 체감한다. 명시를 캘리그래피로 쓸 때, 떠난 임을 차마 아주 떠나보내지 못하는 애틋한 마음이 되었다가 바람에 스치는 별밤에 비장한 마음이 된다. 붓 끝에 전해지는 시인들의 고독한 시간에 찌릿해진다.
김소월 님의 '못 잊어'를 쓰다 마지막 시구에서 멈칫했다.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떠지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떠나지나요'가 잘 못 인쇄된 건가? 온라인 국어사전을 검색해 보니, '사이가 뜸해지다'란 뜻이 들어온다. 아, 어떻게 생각이 뜸해질 수 있냐는 말이구나. 이렇게 저렇게 돌려 말해 보아도 결국 잊을 수 없더란 말이었구나.
학창 시절엔 이렇게 시어가 깊이 다가온 적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감성이 더 풍성해진 탓이라면 좋으련만, 호르몬의 영향인지 점점 T 성향이 짙어져 부러 소설책을 펼쳐 읽으며 감끌(감성을 끌어올리다)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이건 모두 붓에 먹을 찍어 시어를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까닭이리라.
명시를 캘리로 쓰고 가슴을 저미는 노래를 오카리나로 불며 마음에 남는 것들을 글로 남기는 일들은 밖에서 다 채워지지 않는 일들이다. 타인의 속도와 상관없이 찬찬히 진행하며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만나는 경험, 그것은 홀로일 때 느리지만 더 활발해진다.
내 안의 나와 소통하는 시간의 의미를 알아버린 사람이 다시 밖에서 시간을, 에너지를 소비하려 들겠는가? 그러니 혼자인 게 더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챗GPT의 말이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몰리는 "이 세상에는 한 가지 성공이 있을 뿐이다. 바로 자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다."라고 했다(출처:《내 인생 5년 후》, 하우석). 외부 요인들에 휘둘리지 않고 홀로일 때 충만하게 시간을 보내며 찾아가는 삶의 의미. 챗GPT가 해내는 방대한 작업 능력에 좌절하지 않고 조금 느리더라도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 그것도 나름 괜찮은 삶이지 않을까.
나태주 님의 시처럼 돌아갈 집이 있고 마음속에 생각할 사람이 있으며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그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캘리그래피 by 정혜영
* 배경 사진 by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