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일에 아이에게 복덕과 행운이 함께 하길 염원하며
엄마의 108배
시. 정혜영
얼마나 많은
간절함이
머물다 갔을까
한 번에 감사
두 번에 믿음
세 번에 바람
그렇게 되뇐 숨들이 모여
108개의 사랑이 된다
낮게
더 낮게
몸은 흘러내리고
끝내 마음은
갈데없이 솟아오른다
흩어지는 마음들을
주섬주섬 모아
붙이고, 꿰매고, 덧대어
마침내 이어 붙인
108가지 마음 조각보
전 스스로를 비교적 단단한 내면의 소유자라고 생각해 왔어요. 몸을 한껏 낮추고 이마를 바닥에 대어 보고서야 스스로를 과신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얼마나 많은 머리와 손바닥이, 간절함과 애절함들이 머물다 갔을까, 생각하면 가장 단단한 곳부터 서서히 뭉그러져 이내 말캉해져 버렸죠.
108배를 다녀왔어요. 수능 시험이 목전까지 다가오자 불안해하는 아이를 위해 어미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처음엔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해볼까... 도 생각했어요. 제가 아기였을 때 친정 엄마가 데리고 다니시던 성당에서 유아세례까지 받아 세례명까지 있는, 엄밀히 말하면 가톨릭 신자인데요. 냉담자로 지내온지 너무 오래라 통성 기도라도 해야 할 판에 기도법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어요. 불교를 믿는 것도 아닌데 108배를 해야겠다는 결심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겨난 걸까요.
108배는커녕 삼 배도 해 본 적이 없으면서 '수험생을 위한 기도 사찰'하면 떠오르는 곳이 팔공산밖에 없는 거예요. 제가 '팔공산'을 입에 올리자 놀란 남편이 부산해졌죠. 조금이라도 힘이 덜 드는 가까운 곳으로 찾아야 할 또 다른 절박함 앞에 근교 사찰 서칭 속도가 빨라졌겠죠. 그렇게 남편이 찾은 곳이 강화 '보문사'였어요. 예전에 1박 2일 학교 워크숍으로 갔던 석모도에 있다는 절. 그때도 일정에 보문사 탐방이 있었는데 자체 넘겨버렸다지요. 부러 그곳을 찾을 일이 생길 줄 그땐 까맣게 모르고.
그런데 한 번 새롭지만 거부할 수 없는 정보가 입력되자 자꾸 연상이 되는 거예요. 108배는 어떻게 하는 거지?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내 체력이 감당되는 정도일까? 절도 기도도 문외한이라 궁금증과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어요. 생각이 길어지면 정답은 한 가지예요. 생각을 멈추고 그냥, 직접 해 보는 것.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로 고민해 봐야 소모전이죠.
토요일에 남편과 보문사에 가기로 결정한 후, 그 이전에 먼저 108배 체험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지난 목요일, 집에서 멀지 않은 파주 약천사에 먼저 다녀왔어요. 작년에 아들 입시를 무사히 마친 지인이 추천해 준 곳이라 믿음이 갔거든요. 절 입구에 들어서면 한눈에 보이는 거대한 황금빛 불상, 남북통일 약사여래불을 보며 약천사가 유명한 이유가 단번에 이해되었죠.
지장보전에 들어가 절방석을 꺼내 앉아 입실 전 미리 살펴본 '108배 절하는 법' 영상을 떠올렸어요. 절하다 숫자가 헷갈릴 수 있으니 10회씩 나눠 체크하며 절을 해나갔어요. 그렇게 했는데도 나중엔 일곱 번째인지 여덟 번째인지 헷갈리곤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108번을 세어 가며 절을 하는 걸까요?
그렇게 어리바리 시작한 108배는 헷갈리면 한 번 더하다 보니 얼추 120~130배는 한 것 같아요. 머리 나쁘면 수족이 고생할 수밖에 없는 거죠, 뭐. 아무튼 중요한 지점은, 108배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니 부족하다 싶으면 더했겠지요. 해보기 전엔 막연했던 것들이 막상 해보면 또렷해지곤 해요. 108배, 해볼 만 한대?
그렇게 한 번 연습 삼아 해 보자던 108배는 다음 날, 서울 성북구에 있는 길상사로 이어졌고, 남편과 약속했던 토요일 강화 보문사까지 연속 3일에 걸쳐하게 되었어요. 생애 처음 하는 108배를 삼 일 하는 동안, 막연했던 불안감이 옅어진 건 우연이 아니겠지요.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아빠까지 108배를 하고 온 걸 안 딸아이가 고맙다며 왠지 잘 될 것 같대요. 너무 감사한 말이죠. 뭘 더 바라겠어요. 불안에 떨던 딸에게 어떤 초월적인 기운이라도 한 자락 끌어당겨 힘을 보태주길 바라는 마음. 그런 바람 하나잖아요.
캘리를 쓰는 엄마라 뭐라도 딸에게 도움이 되는 글귀를 써주려고 찾다 보니, "저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쳐라"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어요. 곽의영 시인의 '하나뿐인 예쁜 딸아'라는 시의 한 문장이었어요. 시를 읽어 보니, 어쩜 자식 가진 부모 마음은 이리 똑같을 수가 있을까요. 다음은 '하나뿐인 예쁜 딸아'의 전문이에요.
나는 너의 이름조차 아끼는 아빠
너의 이름 아래엔
행운의 날개가 펄럭인다
웃어서 저절로 얻어진
공주 천사라는 별명처럼
암 너는 천사로 세상에 온 내 딸
빗물 촉촉이 내려
토사 속에서
연둣빛 싹이 트는 봄처럼 너는 곱다
예쁜 나이, 예쁜 딸아
늘 그렇게 곱게 한 송이 꽃으로
시간을 꽁꽁 묶어 매고 살아라
너는 나에게 지상 최고의 기쁨
저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쳐라
함박꽃 같은 내 딸아
전 이 시 중 딸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문장들을 붓으로 써서 아이의 방에 붙여 주었어요. 잠시 바람 쐬러 나갔다 돌아온 딸이 보더니 정말 함박꽃처럼 활짝 웃으며 좋아해요. 그게 그렇게 저릿하더라고요. 어딘가에서 본 것 같다는 아이 말에 웃음이 나왔죠. 작년 수능 필적 문구였다는 걸 알았다면 잠시 눈빛이 흔들렸겠지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뜻이죠. 1년을 홀로 잘 버텨온 내 아이, 이제 다른 불안이나 근심, 걱정은 접어두고 수능 당일 최선을 다하는 일만 남았어요.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겨야죠.
수험생 자녀를 둔 다른 부모님들도 고생 많으셨어요. 우리, 너무 걱정하지 말기로 해요. 다 잘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