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먹어도 돼?
남편이 묻습니다. 식탁 위에 오목한 사기그릇에 들어 있는 군고구마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나 봅니다. 남편은 아내가 아이들과의 매일 아침 식사로 오븐에 고구마를 굽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븐에 구운 고구마는 삶은 계란, 수란 다음으로 아내가 애용하는 아침 식사 메뉴입니다. 아내는 시리얼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인공적인 것을 먹이고 싶은 엄마의 마음도 있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지지고 볶아 진수성찬을 대접할 만한 장한 엄마도 못됩니다.
먹고 싶으면 먹지,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라고 대답하려다 아내는 뜨끔, 해 집니다. 요 며칠 전, 고구마가 3~4개 남아 있길래, 내일 아침에 먹으면 되겠다, 고 생각했다가 아침에 일어나 그릇에 껍질 잔해만 남아 있던 것을 보고 남편을 엄청 타박했던 기억이 떠올라서입니다.
저녁밥 먹고 뭘 또 그렇게 먹느냐, 그러니까 또 뱃살이 찌는 거 아니냐, 운동도 안 하면서 먹기만 하면 몸이 어떻게 되겠냐, 고 아내의 허락 없이 먹은 고구마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남편이 다시는 그 서러움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은 맛있는 먹거리만 제공되면 세상 친절한 사람입니다. 달리 말하면 먹거리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매우 예민해지고 신경질적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혼 전에 아내가 처음으로 남편과 밥을 먹은 날, 아직 눈 맞추고 밥 먹기에는 살짝 부끄러울 무렵, 하필 아내를 삼겹살 식당으로 데려간 남편이 삼겹살 4인분을 주문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겨우 아내가 말려서 그럼 3인분으로 시작하자, 고 했던 남편의 식성을 말이죠. 두 사람이 먹는데 3인분부터 시작하는 이유를 알 수 없던 아내는, 남편이 먹는 모습을 보고는 이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대식가인 남편은 먹어본 짬밥 덕분에 딱 보면 레시피가 줄줄이 나오는 건지, 혹은 아내가 해 주는 코딱지만 한 음식이 성에 덜 찼던지, 요리하기를 즐겨해서 아내는 남편이 있는 주말에는 요리를 잊은 지 오래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요리에서 불만이 있다면 한 가지, 음식의 '양'입니다. 그러나 먹다가 배가 터지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아쉬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남편의 요리 부심에 아내는 이제 태클 걸 명분을 찾기 힘들어집니다. 남편이 해주는 것을 먹으면서 뭐라고 하는 것은 요리하는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입 닫고 조용히 먹어주는 게, 불만이면 네가 하라(결혼 초기 주로 요리를 담당하던 아내가 입에 달고 살던 멘트였다죠)는 부메랑을 미연에 차단하는 길입니다.
결혼 초, 별의별 사소한 일로도 금방 '도로남'이 될 것처럼 전쟁을 치르던 아내와 남편은, 심지어 중국요리를 시켜 먹으면서도 혹독한 내전을 치렀던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짜장면 '곱빼기'를 시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아내가 그게 얼마나 차이 날까 싶어 '보통'으로 시켰다가 남편과 대판 설전을 벌였더랬습니다. 평소에 짜장면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가 짜장면 곱빼기를 시켜 먹어봤을 리가 없었으므로, 그 양의 차이를 가늠할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탕수육도 시키는데 짜장면을 굳이 곱빼기씩이나 시켜 돈을 낭비해야 하냐는 아내의 논리는, 500원 차이밖에 안 나는데 그걸 굳이 '보통'으로 시켜야만 했냐는 남편의 논리를 압도하긴 어려웠지만, 신혼의 '깡'이 살아 있던 아내는 어떻게든 판정패를 모면해 보고자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것입니다.
"고구마 먹고 싶으면 먹어. 내일 아침에 또 구우면 되지."
아내가 상냥하게 얘기할 때는 몸을 사려야 할 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남편입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했으니, 정말? 하고 묻습니다. 짜장면을 곱빼기로 안 시켰다고 성깔 사나운 아내와 정면으로 맞짱 뜨던 그 패기는 어디 가고 남편은 오늘 고구마 몇 개에도 눈치를 보는 것인지, 어쩐지 아내 마음에 서늘한 바람이 슝- 지나갑니다.
"고생하는 우리 서방님 먹고 싶다는데 고구마가 대수겠어. 매일 쪄 놓을 테니 먹고 싶으면 맘대로 먹어."
아내는 인심 쓴 김에 크게 씁니다. 남편의 큰 입이 헤- 벌어지는 걸 보면서 아내는 군고구마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기르는 강아지나 고양이가 없는 덕에 가정에서 서열이 3위권 밖으로 밀려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알고 사는 중년의 남편이 오늘은 조금 마음이 쓰입니다.
운동도 안 하고 먹기만 해서 뱃살이 붙어가는 D라인 남편이 못마땅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내일부터는 고구마를 조금 더 넉넉히 쪄야겠다고 아내는 마음먹습니다. 고구마가 아니라면 어떤 더 무서운(?) 대체물이 등장할지 알 수 없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