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물로 보는 남편

칼로 물 베는 중년의 부부싸움

by 정혜영


2교시 수업 끝나기 10분 전. 아내는 몰랐습니다. 아내의 핸드폰에 전화가 5통이나 와 있는 줄. 문자와 카톡에 몇 개씩이나 메시지가 와 있는 줄. 아내는 원래 하나의 일에 집중하면 다른 데에 신경을 잘 못 쓰는 사람입니다. 어찌어찌 좋게 봐준다면 몰입형 인간이랄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냥 역량 부족형 인간입니다.


아내가 진동모드 상태인 자신의 핸드폰에 남편의 이름이 발광 중인 것을 뒤늦게 발견합니다. 아내는 조용히 사이드 버튼을 눌러 핸드폰을 잠재웁니다. 수업 중에는 전화 사절입니다. 금방 또 전화가 발광합니다. 남편의 이름이 뜬 채로. 남편도 한 번 전화해서 안 받으면 수업 중일 줄 알고 메시지를 남기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울릴 때도 받지 않자, 언뜻 뜨는 메시지가 보입니다.

너무 급해서 그래.

아내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얼른 전화를 겁니다.

"아, 정말! 내가 얼마나 급했으면 수업 중인 줄 알면서도 전화를 그렇게 했겠냐고!"

수화기 너머로 물밀듯 몰려오는 남편의 목소리엔 짜증이 잔뜩 배어 있습니다.

"나, 수업 중이었어."

아내의 뒷덜미에도 불길이 확 당겨오는 듯 하지만 학생들 앞이라 더 뭐랄 수도 없습니다. 목소리를 잔뜩 깔고 천천히 말합니다. '나 지금 몹시 참고 있다 '는 신호를 충분히 담아.

출처: 네이버 이미지

오늘은 남편의 재택 근무일이었습니다. 남편은 이미 자신의 월요 재택근무를 자축하며 주말에 회를 주문해 회 파티까지 여신 분입니다. 월요일 출근의 부담 1도 없이 일요일 밤늦게까지 여유롭게 영화 감상하는 남편을 아내 내심 부러워한 터입니다.

그래도 재택근무이니 사내 통신망에 접속하여 업무를 보게 되어 있던 모양입니다. 지난밤늦게서야 잠든 남편은 아침에 늦잠을 잤겠지요. 회사로부터 통신망 접속이 안되어 있다고 연락이 와서야 부랴부랴 접속하려다 보니 공인 인증키가 필요했던가 봅니다. 아내가 공인인증 카드를 갖고 있으니 아침에 그렇게 전화와 메시지로 난리법석이었던 것입니다.

급하다니 우선 인증 카드 번호를 불러주기는 했지만, 아내 속은 부글부글 끓습니다. 남편이 자신의 회사 일 급한 거만 생각하고 아내의 일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아 몹시 불쾌해집니다. 이후 수업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오늘은 집에 가서 한바탕 할 것 같은 짙은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한 시간쯤 뒤, 남편의 이름이 또 아내의 핸드폰에 부르르 뜹니다. 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얼른 받습니다.

"또 무슨 일 있어? 아직 수업 안 끝났어."

아내의 목소리는 시베리아 북풍보다 냉랭합니다. 남편이 아니라고, 전화를 끊습니다. 점심시간에 아내의 핸드폰에 남편의 메시지가 와 있습니다. 메시지는 남편이 결혼 전 연애할 때 아내를 부르던 애칭으로 시작됩니다.

00, 아침부터 짜증내서 미안해.
회사에서는 연락 오지, 공인인증서는 안돼지.
다른 방법도 찾아봤는데, 너무 애타서
나도 모르게 좀 미쳤었나 봐.
미안해.
기분 풀고,
쉬는 시간에 전화 한 번 줘.


그 와중에 메시지 속 '안돼지'라는 오탈자가 눈에 거슬리는 아내입니다. 남편은 결혼 전에도 맞춤법이 잔뜩 틀린 연애편지를 썼고 아내는 그것들을 고치며 읽느라 로맨틱한 감흥이 끊기곤 했었습니다. 아내의 부글부글 끓던 속이 조금은 가라앉습니다. 그래도 약해지지 않고 퇴근 후에 단단히 짚고 넘어가리라, 아내는 마음먹습니다.

오후 들어서니, 남편은 쓸데없이 자꾸 전화를 걸어옵니다. 아내는 저녁에 해야 할 말들을 생각하며 마음의 온도를 차갑게 유지합니다. 아내가 자꾸 넘어가 주니 저 사람이 아내를 물로 보고 그러는구나, 싶어서 오늘은 냉정하게 따져야겠다고 더 굳게 다짐합니다.


퇴근 후, 현관문을 들어서니, 남편은 부엌에서 한창 저녁 식사를 준비 중입니다. 가스레인지 위 냄비 속에는 오전 아내의 속처럼 뭔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짐짓 모르는 척, 슬쩍 곁눈질로 보니 군침이 절로 도는 '갈치조림'입니다. 더 젊었을 때는 냉장고 속 위치를 자세히 일러주어도 물건을 못 찾던 남편인데, 이제는 안 알려줘도 냉장고 속 갈치를 잘 찾아냅니다.


이런 것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아내는 한창 요리 중인 남편 앞에 냉정한 얼굴로 섭니다. 종일 단단히 벼르던 말들을 이제부터 또. 박. 또. 박. 말하려고 합니다. 아내는 미간을 찌푸리며 잔뜩 힘을 준 자신의 눈을 남편의 눈에 맞춥니다. 막 말을 하려는데, 남편이 와락 아내를 끌어당겨 안습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밀쳐내고 다시 태세를 정비해 말하려고 하는데, 또 남편의 와락. 0.1톤에 가까운 남편에게 남편 몸 사이즈의 절반 밖에 안 되는 아내의 몸부림은 우스운 앙탈이 되고 맙니다.


아, 진짜, 아내는 오늘도 또 남편의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갈치조림이나 맛있게 꼭. 꼭. 씹어 먹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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