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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Jan 15. 2024

할머니가 목욕탕에서 넘어지셨다.

신년 인사를 위해 친정에 모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런데 장모님 처음 보는 옷이네요" 남편이 말했다.


평소 입으시던 자주색 혹은 붉은 옷이 아닌 옥 빛깔에 반짝이는 큐빅이 박힌 화사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어쩐 일로 엄마가 이런 옷을 입었는지 몰라도 꽤 잘 어울리는 옷을 잘 골랐다고 생각했다.


"엄마, 어서 와요. 내가 지난번에 목욕탕에서 사 준 옷 입고 오셨네. 바지는 따뜻해?" 엄마가 외할머니에게 말했다.


"아주 따뜻하고 좋아" 외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내일 아침에 목욕하러 가면 바지 하나 더 사드릴게요" 바지를 마음에 들어 하는 외할머니에게 엄마가 말했다.


목욕탕을 좋아하는 우리 딸들은 이야기가 떨어지자마자 당장 목욕을 가자고 보채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막내 외삼촌 차를 타고 3대가 처음으로 함께 목욕탕에 갔다.


"이거 버킷 리스트 아니야?" 목욕탕에 데려다주며 막내 외삼촌이 말했다.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목욕은 어려서 엄마와 자주 갔었지만 외할머니와는 가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내 딸들을 데리고 3대가 목욕탕을 가는 일은 바라기만 했던 일인데 얼레벌레 버킷 리스트에서 지워졌다.


목욕탕은 지하 1층에 위치해 있어 한 계단만 내려가면 될 테지만 엄마는 굳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양쪽 무릎을 수술하신 외할머니에 대한 배려였다. 더불어 본인의 오른쪽 무릎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 어머나 손님이 많네요." 목욕탕에 있는 직원이 반기며 인사했다.

"네~3대가 왔어요." 엄마는 들뜬 목소리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의 락커룸에 옷을 벗어두고 탕 안으로 들어갔다. 대중탕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샤워를 먼저 해야 한다. 탕 속으로 어서 들어가려고 들뜬 아이들부터 씻기기 위해 샤워기 앞에 아이들을 세웠다. 머리에 샴푸를 짜주고 한 명씩 머리를 매만져 주다 엄마는 잘 씻고 있는지 보았다.


그런데 엄마는 본인의 몸을 씻고 있지 않았다. 할머니를 앉히고 내가 아이들을 씻겨 주는 것처럼 엄마가 엄마의 머리를 감기고 있었다. 우두커니 거울을 보고 앉아 딸이 해주는 샴푸질에 온몸을 맡기고 있는 할머니는 말 잘 듣는 아이 같았다.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부모님은 아직 젊었고 아직도 내가 기대어 편하게 쉴 수 있는 존재라 육아를 하면서 지칠 때가 되면 매번 어리광을 부려왔다. 하지만 할머니의 머리를 감겨주는 엄마의 모습은 타임머신을 타고 바라본 미래의 내 모습 같았다. 앉아 있는 할머니를 씻겨주려 서 있는 엄마의 저 자리가 곧 나의 자리일 것이다.


샤워를 마친 후 나란히 탕에 앉았다. 명절은 아니지만 가족이 모인다니 엄마는 식혜를 만드셨다. 뜨끈한 온탕 속에서 엄마가 만든 식혜는 영화관의 팝콘처럼 환상의 콤비였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탕 속에서 물 마사지도 즐겼겠다 이제 때가 밀고 싶어졌다.


할머니는 좀 더 탕에 있고 싶다 하셔서 엄마와 단둘이 때를 밀었다. 할머니를 계속 바라보며 엄마는 내 등 뒤로 와 있는 힘껏 등을 밀어주었다. 6살 때 엄마가 밀어줄 때는 아프고 따가워서 우는 소리만 했었는데 이제는 좀 더 시원하게 밀어줘도 된다고 하는 나이가 되었다. 아직도 탕에 계신 할머니를 한 번 보고 엄마 등을 밀고 있을 때였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본 곳에 할머니가 넘어져 있었다. 맙소사.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등을 미는 사이 할머니가 넘어져 버렸다. 할머니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며 되려 큰 소리로 주변을 물리셨다. 팔로 짚으며 다친 손목만 만지고 계셨다. 외려 할머니는 양쪽에 해 놓은 인공관절들이 다칠까 봐 겁먹으셨다며 거뜬히 일어나 제자리로 가셨다. 철렁 내려앉은 가슴에 삼촌이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어른을 모시는 건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야"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막내 외삼촌은 가끔 나에게 전화해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른을 모시는 건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은 게 아니라 더 많은 신경이 쓰이는 일이라고. 보일러를 틀 줄 몰라서 혹은 티브이 채널을 돌릴 줄 몰라 퇴근 후 누워있다가도 찾아봬야 한다. 아이는 넘어져서 다치면 금세 회복이 되지만 나이가 들면 회복이 힘들기에 많이 주의를 기울여한다는 말들이 떠올랐다.


엄마는 서둘러 할머니를 먼저 씻기고 나가셨다. 나도 아이들을 챙겨 씻기고 나가보니 할머니는 곱게 머리를 말리고 새로운 옷을 입고 계셨다. 바지를 목욕탕에서 샀다더니 지난번에 할머니를 모시고 와서 이곳에서 산 것이었다. 할머니가 입으실 수 있는 옷을 고르는 엄마 옆에 다가가 어떤 옷들이 있는지 보았다. '어? 이것은...?' 엄마가 이번에 입고 계셨던 옥색 옷이 여기에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엄마와 같은 디자인에 핫핑크 옷을 목욕탕 아줌마도 입고 있었다.


엄마는 걸려 있는 옷들 중 특대 사이즈를 골라 할머니에게 입히며 지난번에 샀던 바지 하나를 하나 더 달라고 했다. 버건디 색 니트에 진주가 달린 니트는 할머니에게 꽤 잘 어울렸다. 취업을 하고 외투를 한 번 사드린 것 외에 할머니에게 옷을 선물한 적이 없던 나는 지갑에서 현금을 꺼냈다. 엄마가 할머니에게 하듯 나도 할머니에게 따뜻하고 예쁜 옷을 선물하고 싶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크게 다치지 않으셔서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셨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푹 익은 보쌈을 해놓으니 순식간에 한 접시의 고기가 사라졌다. 집에 돌아가셔서도 드실 수 있도록 삶아 놓은 고기를 엄마가 챙겼다. 도토리묵을 먹고 싶다고 한 할머니를 위해 미리 만들어 놓은 탱탱한 묵과 식혜까지 바리바리 싸서 삼촌 차에 실었다.


음식 맛이 좋았던 할머니의 솜씨는 이제 그 손맛이 엄마에게 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큰 딸을 보러 올 때면 이것저것 먹고 싶은 음식 종류를 부르신다. 오랜만에 엄마가 보고 싶어 찾아가며 먹고 싶은 것을 늘어놓는 나처럼.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이 효도인 것 같다. 부모가 그들의 부모에게 하는 말투와 행동을 보고 자식들은 보고 배운 대로 할 테다. 효부상에 후보에 오를 만큼 시아버지를 정성으로 모셨던 엄마였다. 언제나 고운 말과 사랑으로 부모님을 돌보는 엄마가 해 왔던 모습들이 곧 나의 모습으로 자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엄마를 보았던 대로 나는 자랄 테니까. 엄마가 할머니를 씻겨주던 모습,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는 모습을 모두 담아본다. 난생처음 아이를 키우며 서툴지만 받아 온 사랑으로 지금까지 딸들을 키웠듯 나이가 들어 거꾸로 아이 다루듯 부모를 모시는 순간에 오늘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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