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단연, 김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김밥은 엄마가 해주신 오이 김밥이다. 여름을 담은 오이가 들어간 김밥은 아삭하면서도 시원한 오이향이 입안에 퍼져 퍽퍽한 밥과 함께 한 입에 오물 거리며 먹기가 좋다. 단맛과 짠맛을 좌우하는 단무지와 담백한 계란까지 여러 번의 젓가락질 보다 한 손으로 입안에 골인시킬 수 있는 김밥이 좋은 건 샐 수 없이 많은 이유가 있다.
지난 주말 김밥용 김을 사는 시누에게 물었다.
"누가 소풍 가요?"
"애들 간식으로 싸주려고"
시누는 아이들 간식으로 밥을 빼고 계란 지단과 오이로 가득 채운 김밥을 쌀 거라고 했다. 시장 리스트에 김밥은 없었지만 마트를 가자마자 단무지, 맛살, 우엉이 들어있는 김밥용 세트를 카트에 담았다. 다음날 아침 느지막이 일어났지만 김밥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재료들을 손질했다. 손질이래 봐야 비닐에 포장되어 있는 것을 해체하고 물기를 털어주면 되는 일들이었다.
유일하게 요리를 해야 하는 것은 계란을 부치고 햄을 기름에 볶는 간단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에서 밥을 맛소금과 참기름에 버무려 김에 넣고 싸주면 될 테지만 이 날은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계절 특가로 한 개당 500원을 주고 산 오이는 특별한 재료다. 예전에도 엄마가 해준 김밥이 생각날 때마다 오이를 사서 넣었다. 물론 별도의 준비 없이 길게 썰어 김밥에 식구로 포함시킨다. 귀차니즘이 심한 나에게 먹고 싶은 욕망이 승기를 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맛은 재현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 엄마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엄마, 오이 넣고 하는 김밥 어떻게 해야 해?"
"오이를 소금에 절이고 물에 씻은 다음 꾹 짜서 넣으면 돼"
아! 소금을 넣어 물을 안 뺐구나! 엄마에게 들은 대로 대충 썰은 오이에 소금을 뿌렸다. 나머지 재료를 준비하는 동안 소금에 절여진 오이는 천천히 숨이 죽어갔다. 하지만 워낙 듬성듬성 크게 썰어놔서 그런지 매직 아이가 아니고선 숨이 죽었는지 확인이 불가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 물에 오이를 씻고 김밥을 쌌다. 여러 번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김밥을 싸는 일은 어렵지는 않았다.
밥을 골고루 김 끝까지 편다. 재료를 넣고 빈틈없이 잘 말아준다. 자두의 노래를 떠올리며 잘~말아주면 기분상 더 맛있는 김밥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엄마는 탑처럼 줄줄이 쌓인 김밥이 완성되면 큰 칼로 일정하게 썰었지만 나는 마음이 급했다. 어서 먹고 싶어 안달이난 사람처럼 김밥 한 줄을 싸자마자 칼을 들었다. 어차피 꽁지는 아이들이 먹지 않을 테니 못생겼지만 제일 맛있는 부분을 만드는 사람의 특권으로 먼저 맛보았다.
아! 그 맛이야!
어릴 적 유치원 소풍 갈 때 작은 거실에서 신문지를 넓게 깔고 김밥을 싸주던 엄마가 생각나는 그 맛이었다. 오이 김밥은 바쁜 엄마를 대신해 투박한 손으로 소풍 가는 딸의 머리를 만져주던 아빠의 모습까지 떠오르게 했다. 사람마다 특정 음악이나 음식이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데 나에게 오이김밥은 7살 소풍의 기억을 소환하게 했다.
음식 투정을 잘하는 아이들도 김밥을 꽤 잘 먹었다. 치즈를 넣은 김밥을 보더니 목마른 아이처럼 더 달라며 치즈 오이 김밥을 찾는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김밥재료는 넉넉했고 한 끼에 모든 재료를 소진하기에는 우리 식구의 뱃골이 크지 않았다.
주말이 지나고 냉장고 속 고이 보관해 둔 재료를 꺼낸 건 아이들이 모두 등교하고 난 아침이었다.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 냉장고 속 단무지와 우엉이 생각났다.
김밥 한 줄 만들어 먹을까?
밥을 양껏 그릇에 담고 양념을 했다. 한 방에 끝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재료들을 아낌없이 넣었다. 김 한 장에 밥을 얇게 펴서 담아야 하지만 겨울 이불처럼 두툼하게 자리 잡은 밥들로 인해 자리가 부족해 보였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프라이팬을 빙 둘러 도톰하게 만들어진 지단을 썰지도 않은 채로 밥 위에 얹었다. 목이 막힐까 봐 단무지 두 개 우엉 세 개를 넣고 남은 햄과 맛살까지 넣었다. 이불 한 장에 육 남매가 끼어 자듯 김 한 장에 빈틈이라곤 없었다.
야무지게 김밥을 말고 싶었지만 가득 넣은 재료들로 김밥은 한 바퀴를 제대로 돌지 못했다. 한 바퀴 반 정도는 말아줘야 단단하게 말리는데. 결국 김 한 장을 꺼내수선에 나섰다. 물을 묻혀 김밥에서 떨어지지 않게 만 후 빠르게 칼로 썰었다.
입안 가득 김밥이 점령했다.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건 좋지만 좀처럼 입안에 여유가 없으니 맛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이럴 거였으면 밥을 나누고 계란 지단을 잘라서 두 줄을 싸는 게 좋았을 걸. 재료의 비중을 늘려서 조화로운 맛을 느끼고 싶었는데 완전한 실패였다. 김밥이라기 보단 밥에 김을 얹어 먹은 느낌이랄까.
식구들에게 줄 때처럼 엄마의 김밥을 생각하면서 만들었다면 좀 더 나았을 텐데 후회가 밀려온다. 아이 입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을 때 그래도 먹을만했는데, 너무 크게 만들어진 김밥을 욱여넣으려 크게 벌린 내 입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요똥이지만 김밥이 먹고 싶었을 뿐인데 어차피 할 거라면 내입도 남의 입이라고 생각하고 좀 더 정성을 들일 걸 그랬다. 엄마가 나를 생각하며 싸주었던 소풍날 그 김밥처럼. 식구들이 모두 출근하고 없는 혼자만의 아침식사일지라도 내 입을 손님처럼 대접해 줘야겠다. 이러다 입술옆이 김밥처럼 터져버려도 우습지 않은 상황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