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흔살, 전업주부를 너머서

by 친절한금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매번 똑같은 하늘을 바라보지만 언제 바라보는 가에 따라 하늘빛은 다르다. 시선에 따라 다른 것은 비단 하늘뿐만이 아니다. 아이가 바라보는 '나', 남편이 바라보는 '나', 수강생들이 바라보는 '나'는 엄마, 여보, 선생님 등 분신술을 쓴 것처럼 그들의 시선을 따라 다양하게 불린다. 천준형의 그림책 <뭐라고 불러야 해?>에는 상태에 따라 수많은 이름을 가진 '명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싱싱하고 맛 좋은 '생태', 속이 노란색을 때는 '황태', 껍질이 검다고 '먹태', 흰색이면 '백태'.... 이쯤 되면 혼란스럽다.


정체성의 혼란을 주는 이름에 대해 명태는 어떤 생각을 가질까? 자기가 불리고 싶은 이름이 있을까? 아니, 전혀 없을 것이다. 이름은 사람들이 규정한 글자일 뿐, 말라서 북어가 되어도, 코에 뀌어 꾸덕꾸덕하게 말라 코다리가 되어도 명태는 명태일 뿐이다. 명태라는 이름조차도 거추장스럽다. 그저 바다 한가운데를 유유히 헤어 치던 물고기 중 하나 일 뿐이다. 자유로운 한 마리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 사람들의 손에 들어와 상차림이 되기 위해 붙여진 이름에 명태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며 바뀌는 이름을 유연하게 받아들일 뿐. 오히려 카멜레온처럼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는 명태가 매력적으로 보인다.


나는 이름으로 구속되기보다는 어떠한 사람이고 싶다. 우리나라에서는 꿈을 물어볼 때 직업, 즉 명사형으로 답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동사'형으로 꿈을 이야기해야 장기적인 꿈의 목표에 다가가기 쉽다는 김경일 교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쓰임이 있기에 엄마, 여보, 선생님 등으로 불릴 수는 있지만, 이름 안에 나의 쓸모를 한정 짓고 싶지 않다. 불리고 싶은 이름보다는 '친절한 나'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는 나'이고 싶다.


이름에 구속되지 않는 것. 유연한 사고를 할 줄 알아야 달성하지 못한 모습에 안달 나지 않을 것이다. 워킹맘을 바라보며 '나도 회사에서 과장으로 불려야 하는데', 000가 되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은 되지 못한 모습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만 불러올 것이다.


장자는 굽은 가죽나무를 보고 그 쓰임을 한정하지 않고, 사물 자체에서 쓸모를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오감남 풀이를 보면 사물에 쓸모를 고정하지 않고 무한한 쓰임새를 바라보자는 말에 대한 이해가 쉽게 다가온다.


"굽은 나무땔감으로 밖에 쓸 데가 없다고 하는 고정관념을 벗으면, 어느 나무든 쓰임새는 무한하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은 전업 주부일 테지만, 전업주부라는 이름 안에 나를 한정 짓고 싶지 않다.


당신은 과거에 꿈꿨던 직업으로 살고 있는가? 십 대에는 상상도 못 했던 마흔 살의 나는, 디지털 드로잉 강사 혹은 브런치 작가로 불리고 있다. 목표로 정하지 않았던 일들이지만, 오늘을 기록하는 매개체인 그림과 글에 최선을 다해 그리고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따라온 이름들이다.


매일이 불안하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시간이 줄어들고, 아이들은 각자 삶의 터전으로 나갈 텐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새로운 인생의 길을 개척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는 만큼 무엇을 하고 무엇이 돼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북어, 코다리, 먹태가 되는 '무엇'보다 다양한 잠재력은 지닌 명태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를 고민해 보는 게 어떨까.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10화고치를 바라보는 엄마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