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경희 Jun 15. 2021

거리가 필요해

2019년. 정년퇴직 후 남편이 중국에 한 달 일정으로 여행을 가 있었다.

일요일인 어느 날 아침, 나는 수성못을 향해 산책길에 올랐다. 그날은 대구에서 국제마라톤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운 좋게도 멋진 선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내가 참 행복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남편에 대해서도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 며칠 전에 남편의 거친 말투를 이슈로 해서 남편과 설전을 벌였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런 것들은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다. 이만하면 훌륭한 남편이고 고마운 남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중국에 간지 거의 2주가 되었었다. 남편은 중국 무한시의 무한대학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과 어느 정도 떨어져 지내니까 남편의 고마운 점이 생각이 났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았다.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했구나 하는 생각을. 아무리 사랑하고 좋은 사람과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것이다.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무엇인들 아름답기만 할까. 어떤 사람이 어느 거리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지를 생각해보고, 그 거리를 지키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 아닐까. 또는 가까운 사람의 어떤 행동을 보고, 개선의 여지가 보이더라도 못 본 척 눈을 감아주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

수성못에 가서 호수 위에 놓인 공연장 데크에서 스트레칭을 했다. 마음이 활짝 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구나. 좀 더 큰 자율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 그래서 남편의 이런저런 비판과 지적과 지시가 숨이 막혔구나 하는 생각.

남편은 중국에서 걷고, 나는 한국에서 걷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자신의 승용차가 없으므로, 남편은 웬만하면 거의 모든 곳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나도 남편의 식사를 챙기지 않아도 되므로 오랜만에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오랜 시간을 걷고 있었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 시간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오랜 결혼생활을 통해서 어쩌면 서로에게 소음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조밀하게 심어진 식물들이 서로에게 방해가 되듯이, 우리는 어쩌면 사랑하는 사이지만,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적당한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힘들어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서로를 미워했던 것 같다.

한국과 중국 사이의 거리 덕분에, 오랜만에 우리는 약간은 쓸쓸하지만, 상대방의 소음으로 방해받지 않으면서, 우리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작가의 이전글 소파 사건을 다시 생각해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