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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희미 Jul 22. 2022

탑 건:매버릭(2022) 리뷰: 지연의 낭만화


개봉 4주차까지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꿰차며 고공 행진을 이어 나간 올해 최고의 흥행작 <탑 건:매버릭>. 솔직히 이 영화 리뷰를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영국 시대물 리뷰 기획 포스팅도 아직 손을 못 댔고, 올해 나는 너무 바쁘다. 기록해야 하는 것들이 주야장천 쌓여 가는데 시간이 나면 그냥 쉬고 싶어서 브런치에 로그인하지 않은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게다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미 누군가 다 했을 것 같았다. 전 세계적으로 메가 히트를 쳤기에 지금도 국내외에서 온갖 비평과 리뷰가 실시간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개중 우연히 재미있는 리뷰 두 편을 봤다:



https://www.vulture.com/2022/05/theory-top-gun-maverick-is-mostly-a-death-dream.html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100499



보자마자 ‘와, 이거지!’ 하고 다시 정독한 후 나도 리뷰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차올랐다. 좋은 레퍼런스는 항상 영감의 원천이 된다. 두 리뷰는 거의 비슷한 가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특히 김병규 평론가의 리뷰를 꼭 읽어 보시길 추천드린다. 영화를 보고 나온 뒤 가려운 곳들을 날카로운 지성으로 박박 긁어 준다.



이 리뷰에 쓰인 모든 스틸컷의 출처는 영화의 트위터 공식계정(@TopGunMovie) 및 배급사 롯데엔터테인먼트 공식계정(@lotte_ent)임을 밝힌다. 리뷰에는 당연히 영화의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되어 있다.







36년만의 속편, 자욱한 향수와 은밀한 불안


이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1986년 토니 스콧이 감독한 <탑 건>의 아이코닉한 오프닝 시퀀스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관객을 오래된 세계관 속으로 성큼 끌어당긴다. 앳되고 철없는 청년이었던 주인공 매버릭은 이제 원숙한 중년이 되었지만 어째 거의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아직도 20대 무렵에 입던 가죽 점퍼를 입는다. 직장에 출퇴근할 때는 바이크를 쌩쌩 몰고 다닌다. 여전히 철이 없고 고집이 세서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며 자기 멋대로 행동한다. 공적만 놓고 보면 진작 제독으로 승진했어야 하지만, 현역 파일럿으로 남고 싶다는 일념 때문인지 진급조차 포기한 채 대령에 머물고 있다. 게다가 그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절친 구스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다.


영화 초반부에 관객들은 매버릭이 극초음속 스텔스 정찰기, 일명 ‘다크스타’의 테스트 파일럿으로서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매버릭은 목표치였던 마하 10을 달성하고도 만족하지 못해 조금 더 나아가려다 결국 큰 사고를 치고 만다. 다크스타가 힘차게 떠올랐다가 화려하게 폭발하기까지 일련의 과정 속에서 매버릭의 변함없는 특성들이 하나둘씩 드러나 관객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마치 매버릭이 이렇게 말을 거는 것만 같다: “나를 기억해? 나는 계속 네가 아는 그 모습 그대로였어.” <탑 건>의 젊은 파일럿을 기억하는 관객들은 마치 오랜 친구와 재회한 듯 반가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불안감도 동시에 찾아온다. 옛 친구가 옛 모습 그대로라는 건 그의 삶이 정체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당연히 그의 자아 또한 성숙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20대 청년 매버릭이 치기 어린 행동을 하고 사고를 치는 건 어려서 그렇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쉰이 넘은 매버릭이 같은 방식의 삶을 아직까지 되풀이한다면 그는 어딘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추억의 향수에 차츰 젖어들면서도 관객은 한 가지 중요한 의문을 갖게 된다: 남은 러닝타임 동안 그는 결국 어떤 변화를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끝내 변하지 않을 것인가?



변화에 대한 강박적 거부


매버릭은 변화를 쉽게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케인 제독이 다크스타 프로젝트를 직접 끝장내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매버릭은 “어쨌든 지금 온 건 아니잖아?” 라고 말한다. 그는 프로젝트 중지 명령을 무시한 채 마지막 한 번의 비행(one last ride)을 시도해 본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마하 10이라는 목표 도달에 성공한다. 이 성공 덕분에 매버릭은 프로젝트를 폐기하려던 케인 제독을 저지하고 변화를 지연시켰다.


하지만 변화는 시간의 흐름에 뒤따르는 필연이다. 다크스타 사건 이후 케인 제독은 매버릭에게 언젠가 무인 전투기가 보편화되어 파일럿들은 다가올 미래에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을 거라고, 끝은 불가피한(inevitable) 일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이에 매버릭은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라고 위풍당당하게 선언한다. 이것은 스러져 가는 아날로그와 시네마에 대한 감동적 헌사처럼 들리기도 하고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낸 한 남자의 근거 있는 뚝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필연에 저항하는 안쓰러운 발버둥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매버릭은 파일럿 시대의 종말이라는 변화를 거부하고 다시 한 번 기존의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과거를 연장한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끊임없이 회귀한다. 다시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과거를 지속해 보려 하는 것이다.


변화에 대한 거부는 다소 유아적인 욕망이다. 매버릭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등장한 아이스맨을 통해 관객은 매버릭이 얼마나 미성숙한지 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나이만 먹었을 뿐 여전히 <탑 건> 시절의 어린 자기 자신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듯한 매버릭과 달리, 승진해서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 된 아이스맨은 훨씬 어른스럽고 진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환자지만 차분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등장해 매버릭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해 준다. 20대 청년 시절에서 멈춘 삶, 정체된 삶을 살아온 매버릭은 가정을 이루지도 못했고 해군 내 권력자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방어하는 방법(처세술)도 모른다. 반면 아이스맨은 안정적인 가정을 만들었고, 해군 내 최고 권력자가 되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다진 뒤 매버릭이 해군에 남을 수 있도록 보호해 준다.


매버릭이 하염없이 과거를 연장하며 오늘만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아이스맨은 내일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끊임없이 대비해 온 사람이다. 매버릭이 자기 자신을 감당하느라 허덕일 때 아이스맨은 타인을 감싸면서 포용력을 발휘했다. 그러므로 아이스맨은 계급뿐만 아니라 정신적 성숙도 또한 매버릭보다 훨씬 앞서 있다. (그들이 탑 건 동기였을 때 수석을 차지한 사람이 아이스맨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매버릭이 천재 파일럿이라는 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지만, 해군에게는 과연 누가 객관적으로 더 나은 파일럿이었겠는가?) 매버릭이 준비가 되지 않은 다른 파일럿들과 루스터 대신 자신을 이번 미션에 보내 달라고 간청하자 아이스맨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젠 놓아줄 때야.” (It's time to let go.)


그가 화면 속에 작성한 이 짧은 문장을 보고 매버릭은 심장을 찔린 사람처럼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영화 속에서 매버릭이 감정적으로 상당히 취약해진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다. (극장 자막에선 잊어야 할 때라고 번역했는데 매버릭이 집착해 온 자신의 정체된 삶을 ‘흘러가도록 내버려둘, 놓아줄’ 때라는 번역이 더 적합할 것 같다.) 해군은 매버릭에게 후임들을 가르치는 교관이 되라고 하지만 매버릭은 교관이 되고 싶지 않다. 현역 해군 전투기 파일럿으로서 활약하는 일은 매버릭이라는 인간 그 자체(who i am)이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타인의 활약을 돕는 조력자가 되라는 그 명령, 그 변화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아이스맨은 왜 교관직을 맡게 될 거라고 미리 귀띔해 주지 않았냐는 매버릭의 푸념에 ‘미리 알려줬으면 네가 왔겠어?’라고 반문한다.


스스로를 돌보고 보호하는 법조차 모르는 미성숙한 매버릭은 당연히 타인의 보호자가 되는 법도 모른다. 타인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도 적합한 방식을 몰라서, 바꿔 말하면 남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어서, 루스터와 갈등을 겪고 상처받는다. 이것은 매버릭이 제자리걸음을 하며 자신의 정체된 삶에 계속 머물러 있었기에, 궁극적으로는 도저히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었기에 발생한 비극이다. 분위기를 못 읽거나 대화의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하는 등 눈치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매버릭의 고집과 자기 확신은 항상 타인을 압도한다. 매버릭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늘 외부가 아니라 내부다.


매버릭의 옛 연인 페니는 매버릭과 항상 끝이 비슷한 연애를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3년만에 노스아일랜드로 돌아온 매버릭에게 어차피 둘의 관계가 어떻게 끝날지 아니까 이번에는 아예 시작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짐작컨대 아마 매버릭은 여러 차례 그녀를 두고 훌쩍 비행하러 떠났을 것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우여곡절 끝에 페니의 마음을 되돌리고 ‘다시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게’라는 약속까지 했는데, 페니의 딸 아멜리아가 ‘이번에는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세요’라고 매섭게 경고까지 했는데, 미션의 팀 리더로 임명된 매버릭은 어쩔 수 없이 또 한 번 페니를 떠나야 한다. 페니와 매버릭의 관계는 늘 이런 식으로 끝났을 테고 두 사람의 역사(과거)는 어김없이 반복된다. 매버릭은 페니를 자신의 미션(으로 대표되는 파일럿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우선시하지 않는다. 즉 매버릭은 미래(페니와의 깊은 관계)를 위한 변화를 선택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매버릭이 비행을 단념하고 페니와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도 있겠지만, 그 언젠가도 오늘은 아니다.


물론 매버릭은 페니를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매버릭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포기할 수 없는 대상, 매버릭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은 결국 비행하는 전투기 파일럿이라는 자기 자신이다. 매버릭의 가장 큰 결함은 스스로의 자아 정체성에 매몰되어 타인과 안정적인 교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혼자다. 만약 정말로 페니와 이번에는 다른 결말을 맞이하길 원한다면, 루스터와 관계를 회복하길 원한다면, 매버릭은 변화해야만 한다. 구스를 잃은 뒤 생긴 트라우마뿐만 아니라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파일럿으로서의 정체성과 프라이드까지, 아이스맨의 말대로 정말 모든 것을 놓아주어야 한다. 매버릭 자신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매버릭은 차츰차츰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변화를 거부하고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매버릭에게 시간이라는 커다란 압박이 들이닥친다. 극중 미션 디데이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쉴새없이 흐르고, 영화의 러닝타임도 계속해서 흘러간다.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결말이 가까워지고 있다. 자신의 앞길을 막은 매버릭에게 의도적으로 냉랭하게 굴던 루스터는 훈련 도중 일어난 동료의 사고를 계기로 매버릭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매버릭은 진중하고 보수적인 루스터의 비행 스타일 때문에 그가 이번 미션에 투입되었을 때 살아 돌아오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한다. 하지만 루스터는 회심의 한 방을 날려 매버릭의 입을 다물게 한다:


“하늘 위에서는 생각하면 죽어. 생각하지 말고 비행해야 돼. 내 말을 믿어.”

“제 아버지는 당신을 믿었죠. 전 같은 실수 안 합니다.”


루스터는 매버릭의 가장 큰 트라우마를 자극하면서 동시에 그의 결함을 정면으로 꿰뚫는다. 매버릭은 구스를 잃기 전이나 후나 변함없이 위험천만한 비행을 지속하며 살았다. 그 결과 루스터가 언급한 대로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고, 죽을 때 울어 줄 사람도 없는 홀홀단신 신세다. 루스터는 이런 삶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매버릭을 신용하지 않으며 ‘미션에 성공하는 방법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꼭 당신처럼 비행할 필요는 없고 당신처럼 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루스터에게는 루스터만의 방식이 있다.


이것은 아주 예리하고 유효한 비판이다. 매버릭은 생각하지 말고 본능대로 행동하라고 충고하지만 세상에는 매버릭처럼 직관적인 천재 타입 파일럿만 있는 게 아니다. 루스터 같은 비행 스타일을 고수하는 파일럿도 충분히 훌륭한 파일럿이 될 수 있다. 루스터도 해군의 엘리트 비행 학교인 탑 건 졸업생이고 심지어 개중에서도 특히 우수해서 이 미션의 예비 후보로 선발된 12명 중 한 사람이다. 매버릭은 루스터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지만, 그 판단 기준은 철저히 매버릭 자신이다. 과연 매버릭이 한 번이라도 다른 기준을 고려한 적 있을까? 자신의 성공 법칙이 꼭 타인에게도 유효하리란 법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 본 적 있을까?


매버릭의 자기 확신은 루스터를 통해 비로소 흔들리기 시작한다. 만약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면 매버릭은 루스터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의 말이 맞다고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틀렸고 남이 맞을 수 있다는 가능성, 특히 루스터가 맞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만 매버릭은 자기가 바란 대로 루스터의 진정한 보호자/아버지 역할이 될 수 있다. 좋은 부모라면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는 대신 자식의 방식을 존중해 주지 않겠는가?) 그런데 말문이 막힌 매버릭이 아직 루스터에게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을 때 돌연 아이스맨의 부고 소식이 전달된다.


이 부고 소식은 매버릭에게 아주 치명적이다. 이제 매버릭은 자신을 뒤에서 든든하게 지켜 줄 조력자를 잃고 말았다. 루스터는 자신을 불신하고, 아이스맨은 죽었고, 상관 사이클론은 매버릭을 미션에서 제외시켰다. 매버릭은 마침내 모든 동력을 잃고 추락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끊임없이 요행과 임시변통으로 과거를 연장시키며 살아 왔는데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어졌다. 케인 제독이 말했던 피할 수 없는 바로 그 지점(미래)에 갑작스레 도달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이미 도달한, 돌이킬 수 없이 찾아온 미래를 배면 비행하듯 뒤집어 과거로 역전시킨다. 추락하는 매버릭이 다시 한 번 솟아오르도록, 매버릭이 자기 자신과 그를 지켜보는 우리 모두를 자랑스럽게 만들도록(make us proud) 기발한 회복 조작을 실시한 것이다. 오직 영화이기에 가능한 그 회복 조작의 이름은 환상이다.




끝나지 않는 연장전


<탑건: 매버릭>은 추락하는 자의 망상이다. 매버릭은 여전히 폭발한 전투기에서 추락하고 있다. 그는 초음속의 속도를 넘겨 한계를 초과하는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을 간직한 채로 소멸에 다다르고 있다. 전투기 파일럿들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제독의 말에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오늘은 아닙니다”라고 받아치는 매버릭의 대답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매버릭의 믿음과 신념이 파산하는 순간을 끝없이 유예하는 지연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의 대체적 망상 속에서 한편의 유려한 액션영화가 상영된다. 그것은 매버릭의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소요되는 기나긴 주마등의 시간이다.


김병규 평론가는 이 영화를 ‘추락하는 자의 망상’이라 정의했다. 김병규 평론가와 윌모어 평론가의 재미있는 가설(매버릭은 다크스타에서 계속 추락하는 중이고 어쩌면 모든 것은 그의 꿈일지도 모른다)을 차치하더라도 아이스맨의 죽음 이후 매버릭의 삶은 확실히 추락 경로에 들어섰다. 조종간이 고장나고 연료가 떨어지고 엔진까지 고장난 비행기가 과연 추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매버릭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위험천만한 속도로 내달리는 삶을 살아 왔고 이제 비행을 지속할 모든 묘책을 상실했다. 그러나 매버릭의 삶은 추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매버릭 자신이 추락을 원하지 않고, 매버릭을 지켜보는 관객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치고 계속해서 과거로 돌아가려는 매버릭의 모습은 팬데믹 시대를 지나온 관객들의 욕망과도 상응한다. 또 한편으로는 여러 사회경제적 이유로 근래 대중문화를 장악한 레트로 열풍과도 맞닿아 있으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미래의 불가시성 및 종말(죽음)에 대한 불안/공포 심리와도 부합한다.


매버릭은 궁지에 몰릴 때마다 습관적으로 “이제 난 끝이야”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사실 그의 경력이 정말로 끝난 적은 없다. 이제는 정말 솟아날 구멍이 없는 상황에서도 매버릭은 페니의 위로에 힘입어 또다시 비장의 ‘마지막 비행’을 시도하고 만다. 탑 건의 총책임자 사이클론은 아이스맨의 장례식이 끝나자 그간 계속 골칫거리였던 매버릭에게 평생 비행 금지령을 내리지만, 매버릭은 사이클론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멋대로 전투기를 몰아 2분 15초만에 시나리오대로 미션을 완수해 버린다. 다크스타의 마지막 비행이 매버릭에게 또다른 비행의 기회가 되었듯 탑 건에서의 이 마지막 비행 역시 또다른 비행의 기회가 된다. 매버릭은 두 번이나 (그것도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파일럿 생명이 끝장날 위기를 모면한다. 매버릭은 계속 전투기를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간다. 심지어 미션이 끝난 후 귀환하다가 세 번째 적기에게 발각되어 죽기 직전의 상황에 처했을 때도 더 높은 곳(탈출 고도)으로 ‘상승’한다.


이 영화는 과거의 끊임없는 연장전이다. 매버릭의 진정한 적, 가장 강력한 적은 미래다. 매버릭은 박물관에 처박힌 과거의 유산(F-14 톰캣)으로 이미 도래한 미래(5세대 전투기)를 극복한다. 추락하는 대신 상승해서 영광스러운 승리 즉 성공을 거머쥐며 그 성공을 통해 미래가 가져올 변화를 몇 번이고 지연시킨다. 과거를 지키기 위한 매버릭의 고군분투는 루스터와의 관계 회복이라는 휴먼드라마/위협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매버릭 개인의 영웅 서사/화려한 공중 비행 액션(스펙터클)을 통해 낭만화된다. 이 낭만화는 영화가 제작되기까지 걸린 기나긴 실질적 세월을 등에 업고 한층 공고해지며, 마지막 무비 스타로 남은 배우 톰 크루즈의 위상과 익히 알려진 개봉 과정의 우여곡절을 통해 일종의 숭고함까지 자아낸다.



다시 말하지만 매버릭은 분명 어딘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과거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콜사인 그대로 독불장군인 나머지 타인의 방식을 존중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내 방식이 더 낫다, 내가 옳다’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증명해 내고 타인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결국 매버릭은 스스로 변화하는 대신 주변을 변화시킨다. 타인이 자신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방식을 따르게 함으로써 모든 문제와 갈등을 해결한다. 사이클론은 매버릭을 팀 리더로 임명하고 루스터는 매버릭의 방식을 인정하며 페니는 매버릭에게 돌아온다. 매버릭의 천재성, 실력, 카리스마는 그의 결함을 효과적으로 은폐하고 필연을 극복할 수 있다는 영화의 환상에 이바지한다. 점차 매버릭에게 감화되어 가는 등장인물들처럼 관객 역시 갈수록 영화가 제공하는 환상에 몰입해 과거로의 회귀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다. 상업영화의 흥행 공식을 정석적으로 따르는 해피엔딩은 그 회귀에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매버릭이 멋지게 성공했으니 미래는 좀더 지연되어도 괜찮은 것이다. 미래가 가져올 진보적 가치들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최소한의 노력을 하긴 했지만) 현대적 기준의 다양성을 갖추지도 않았고, 폭력과 내셔널리즘에 대한 경계도 없다. 전작인 <탑 건>만큼 노골적이진 않으나 미국의 군국주의는 여전히 미화되고 있다. 미국 보수 언론들이 괜히 이 영화를 근래 보기 힘든 애국적인 작품이라 평가하며 열광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 건:매버릭>은 완벽에 가까울 만큼 잘 만든 상업영화다. 잘 만든 상품이란 많은 사람의 선택을 받는(잘 팔리는) 상품이고 많은 사람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브랜딩과 탄탄한 퀄리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영화는 두 조건 모두를 만족한다. 톰 크루즈라는 스타 파워. 대중의 니즈를 간파한 친숙하고도 고전적인 플롯. 아날로그 미학을 극대화시킨 미장센. 생동감 넘치는 공중 액션. 이 영화는 결코 현실성과 개연성 운운하며 관객을 배신하지 않는다. 관객이 매버릭의 생존을 원하면 매버릭은 생존한다. 대리 실현된 관객의 욕망은 낭만화된 과거와 맞물려 거대한 오락적 쾌감을 낳는다.


소비자는 잘 만든 상품을 소비했을 때 만족감을 느끼고 그 만족감은 스스로의 선택에 확신을 준다.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뿌듯해하며 극장을 빠져나오는 관객의 자기 확신은 매버릭의 자기 확신과 어딘지 닮은 구석이 있다. 콘텐츠를 즐기고 싶다는 목적에 부합하는 옳은 선택을 했으니, 그 이상의 비판적 사고는 어쩌면 의미 없는 잉여일지도 모른다. 매버릭이 반복적으로 말하듯 정말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걸지도. 하지만 환상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극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어김없이 현실이라는 필연이 온몸을 덮쳐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환상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즐거움이 크면 클수록 그 환상과 쾌감이 사라진 뒤 찾아오는 공허감과 의심도 증폭된다. 아마 동시대 많은 사람들이 탑승한 비행기의 항로는 매버릭과 같은 방향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기에 존재하고 사유를 통해 필연을 납득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생명체니까.






상술한 모든 삐딱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정말 재미있게 봤다…. 자존심 상할 정도로 재밌었고 영화를 보는 내내 푹 빠져들어 즐겼다. 특히 4DX SCREEN 으로 봤을 때는 실제 전투기에 타고 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쳐 짜릿했다. 스코어를 매기라면 8.5/10 정도를 주겠다. 1986년작 <탑 건>은 톰 크루즈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은 작품이다. 36년의 세월을 넘어, 팬데믹이라는 위기를 넘어, <탑 건: 매버릭>은 그의 역대 필모그래피 중 최초로 박스오피스 매출 10억 달러를 돌파하고 노련한 배우의 저력을 대중과 평단에 재각인시켰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환상보다 더 환상 같은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감지했듯 극중 배역인 매버릭과 배우 톰 크루즈는 서로가 서로의 분리불가능한 분신처럼 겹쳐진다. 끊임없이 과거를 연장시키는 파일럿과 끊임없이 영화의 환상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마지막 무비 스타. 그들은 정말 아름답고 거부할 수 없이 강력하며 무섭도록 매력적이다. 지켜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안 날 만큼,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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