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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희미 Sep 20. 2022

연극 앨리스 인 베드(2022) 리뷰

2022. 09. 16 명동예술극장


지난 달에 밥 약속이 있어서 명동에 갔다가 명동예술극장을 지나치는데, <앨리스 인 베드>라는 공연명을 보고 숨이 멎을 뻔했다. 세상에. 저걸 공연한다고? 정말로? 당장 휴대폰을 꺼내 인터파크티켓 앱을 클릭하고 예매창에 들어갔다. 나는 이 희곡에 개인적인 추억이 있다. 그리고 명동예술극장에도 약간 비극적인 추억들이 있다. 후자부터 이야기해 보겠다.


희한하게도 유독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을 볼 때 기억에 남는 사건사고가 생기곤 했다. 2014년에 <반신>을 봤을 때는 돌아오는 길에 명동역 근처에서 넘어져 무릎이 까졌고 2015년 <시련>을 봤을 때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내 바로 근처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끼리 시비가 붙어서 고성이 오갔다. 덕분에 깜짝 놀라 극장을 나오기도 전에 극의 여운이 다 깨졌다. 2020년 가을에는 <스카팽> 공연을 예매했었는데, 명동예술극장 화재로 이 공연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화재 이후로 <파우스트>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엔젤스 인 아메리카>같은 공연들이 올라왔지만 그 공연들도 보지 못했다. 작년 초까지는 석사논문을 완성하고 졸업하느라 바빴고 졸업 후에는 재택근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또 전 세계가 팬데믹의 극심한 몸살을 앓는 도중이었던데다 주변에 확진자도 여럿 있었다. 이래저래 극장을 찾기 좋은 시기는 아니었다. 지금 명동예술극장 연간일정을 확인해 보니 온라인 공연도 많이 했던데 좀더 부지런하게 찾아볼 걸 그랬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놓친 건 약간 피눈물이 난다. 아무튼, 이번에 <앨리스 인 베드>를 예매하고 오랜만에 명동예술극장에 갈 생각을 하며 들떠 있었다. 그런데 예매한 당일날, 명동에 도착해서 식사를 하던 도중 돌연 공연취소 문자가 날아왔다. 공연 시작 1시간 전이었다. 기계적 결함이 발생해서 공연을 취소해야 한다고 했다.


명동예술극장과 나 사이에 무슨 파장의 오류라도 생긴 것일까? 이번에도 공연을 보지 못하겠거니 조금 낙담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공연이 끝나기 전에 일정을 맞춰 재예매할 수 있었다. 지난 금요일 저녁 극장에 도착하자 괜히 감회가 남달랐다.





극장에 들어서서 나는 설렘과 기대로 들떠 있었다. 수전 손택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고 <앨리스 인 베드>는 내가 처음으로 샀던 희곡이자 내 서재에 꽂혀 있는 가장 오래된 책들 중 하나다. (손택이 처음으로 쓴 희곡이기도 하다)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뒤 오랜만에 이 책을 꺼내 침실에 가져왔다.



수전 손택 저, 배정희 역, 도서출판 이후



예전에 <크루엘라> 리뷰할 때 잠깐 언급했던 듯한데 어린 시절 나는 되바라진 어린아이였기에 디즈니나 해리포터 따위를 유치하다고 생각해서 보지 않았다. 대신 온갖 국내외 고전들과 미성년자의 정서에 별로 좋지 않은 지독한 문학작품들을 탐독했다. 얌전히 디즈니나 봤으면 좋았을 걸 어린애가 겉멋만 들어서 그렇게 가오를 잡았으니 결국 훗날 대학원까지 직행해 문학을 전공씩이나 한 것이다. 교육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상,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주변 어른들날 대견스럽게 생각했을 뿐 아무도 내 독서를 말리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초등학생이 『춘희』같은 걸 읽고 있으면 좀 말려 줄 법도 한데 말이다. 담임 선생님께 매춘부가 뭐냐고 물어봤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선생님은 얼마나 곤란하셨을까.) 


어린 시절 내가 정말 빠져 있던 책 중 하나가『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속편이었던 『거울 나라의 앨리스』도 좋아했다. 지금도 내 침대 한 귀퉁이에 원서 페이퍼북이 꽂혀 있고 서재 책장에는 런던에 갔을 때 사 온 각기 다른 판본 2권이 나란히 꽂혀 있으며, 두툼한 주석 달린 앨리스 번역본도 있다. 나는 앨프레드 테니슨의 약간 섬뜩하고 유려한 삽화에 마음을 빼앗겼었다. 또 책 속의 정신 나간 것 같은 언어유희들, 괴팍한 등장인물들도 좋아했다. 쓰고 보니까 진짜 떡잎부터 이상한 애였던 모양이다.


위 사진 속의 <앨리스 인 베드> 국내 번역본은 2007년에 초판발행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온라인 서점이 있었다. 당시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골라서 카트에 한가득 담아 놓으면 엄마가 결제해 주곤 했다. 나는 검색창에 별 생각 없이 ‘앨리스’라고 쳤다가 손택의 희곡을 발견했다.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이라는 번역된 제목이 눈에 띄었다. 이건 뭐지? 내가 모르는 앨리스 이야기가 또 있나? 표지에 <라스 메니나스> 속 공주의 형상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 표지 디자인이 뭘 의미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제목과 앨리스를 닮은 여자아이가 새겨진 표지를 보고 어린 시절의 난 홀린 듯이 이 책을 카트에 담았다. 얼마 뒤 이 책은 우리 집으로 배송되어 왔다.


이번 공연 프로그램북 연출의 말에서 이연주 연출은 이 희곡이 참 어렵다고 했다. 맞. 한편으론 날카롭고 명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정신 사납고 병적이며 제멋대로다. 영문학에 대한 배경지식이라곤 하나도 없는 10대 초반 어린애가 이해할 수 있는 희곡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나는 이 희곡을 너무나 좋아했고 여러 번 읽었는데, 3장에서 앨리스와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가 뇌리에 깊게 박혔기 때문이었다. “아빠, 나는 불행해요. 나 자살해도 되나요?” 이렇게 말하는 앨리스에게 큰 충격을 받았다. 앨리스는 뭐가 그렇게 힘든 걸까. 앨리스는 왜 그렇게 불행했을까. 서구권에 살지도 않고 미소지니의 개념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여자아이에게 이 의문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점에서, 손택은 예나 지금이나 내게 매우 소중하고 위대한 작가다.



리뷰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 출처: https://www.ntck.or.kr/ko/performance/info/257081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와 『여인의 초상』, 『데이지 밀러』를 쓴 소설가 헨리 제임스(William James)를 아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에게 불행한 여자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까. <앨리스 인 베드>의 주인공은 병상에 누워 일평생을 보냈던 그들의 동생 앨리스 제임스(William James)다. 앨리스 제임스 사후에 출판된 일기와 수전 손택의 희곡은 그녀의 이름을 불멸로 만들었다.


2020년 경이로운 수작 『진리의 발견』(figuring)을 펴낸 저술가 마리아 포포바(Maria Popova)가 앨리스 제임스에 관해 쓴 글을 발견해서 링크를 첨부해 둔다:


https://www.themarginalian.org/2017/08/07/diary-of-alice-james-death/


앨리스 제임스는 일기 작가Diarist 로 알려져 있다. 일기란 한 인간의 사유와 통찰이 가장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언어로 표현된 글이다. 나는 일기를 쓸 때 두서 없이 쓴다. 논문처럼 초록과 목차를 갖추지도 않고 브런치에 포스팅할 때처럼 기획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과 그날그날 있었던 일들, 모순적인 이야기들을 쓴다. 어디 가서 말하지 못할 감정들을 토로하기도 한다. 앨리스의 일기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일기의 언어는 일관되지 않은, 통합되지 않은, 정제되지 않은 충동의 언어이자 표출의 언어다.


손택의 희곡 주인공인 앨리스는 극적 상상력이 가미된 가상의 인물이다.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 앨리스 제임스가 진정한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목소리가 듣고 싶다면 앨리스 제임스의 다이어리 원서를 사서 읽길 추천한다. (2022년 기준 국내 번역본이 없다) 그러나 손택 또한 일기적 언어 즉 충동과 표출의 언어를 희곡의 핵심 요소로 차용한다. <앨리스 인 베드>를 보는 관객은 쉴새없이 쏟아지는 언어를 통해 앨리스의 삶과 절망과 상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번 공연 프로그램북에서 김슬기 드라마투르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극 <앨리스 인 베드>는 그런 앨리스가 자신의 상태를 자기 언어로 기록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아픈 몸과 정신을 진단하는 외부의 시선을 거부하는 것, 침대에 누워있는 존재를 해석하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저항하는 것, 그리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오롯이 스스로를 대면하고 모두를 그의 세계로 데려오는 것.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손택의 희곡을 다시 읽어냈고, 현실과 기억, 꿈, 상상, 나아가 과거와 미래를 제 뜻대로 불러오고, 새로 써 내려가는 침대 속 앨리스의 권능에 대해 이야기했다.” p.15





<앨리스 인 베드>의 앨리스 둘로 분열된 주체다. 현실 세계에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앨리스, 상상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앨리스. 앨리스는 어느 한쪽 세계에 온전히 속할 수 없다. 앨리스에게 삶이란 일관적이거나 연속적인 경험이 아니라 쉴새없이 교차하는 두 세계를 감당하고 조율하는 과정이다. 앨리스와 달리 어느 한쪽의 세계에 계속 머무를 수 있는 사람들, 한쪽 세계에 몰입하고 안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실 특권을 지닌 것이다. 물론 그 특권은 다른 특권들과 마찬가지로 특권을 가진 당사자에겐 거의 인지되지 않는다.


막이 오르면 관객은 보통 현실에서 분리되어 무대 속 세계에 빠져들기를(몰입하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이연주 연출은 시작부터 배우들이 무대에 일렬로 서서 이름을 대고 자신이 어떤 역할을 연기할 것인지 밝히도록 했다. 성수연 배우가 ‘가장 비중 있는’ 앨리스를 연기하긴 하지만, 이리 배우(앨리스의 아버지와 오빠를 연기한다)를 제외한 모든 배우가 다 한 번씩은 앨리스가 된다. 이처럼 앨리스를 고정되지 않은(일관되지 않은, 몰입가능한 연속성을 지니지 않은) 배역으로 설정하고 관객은 그저 앉아서 배우들의 ‘연기’를 본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우쳐 줌으로써 이연주 연출은 관객의 기대를 서둘러 배반한다. 앨리스와 마찬가지로 관객들 역시 무대와 현실 어느 한쪽 세계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도록, 분열된 주체로서 두 세계를 동시적으로 경험하도록 의도한 것이다. <앨리스 인 베드>에서 무대 속 세계와 현실 세계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고 겹쳐진다. 무대는 현실을 향해, 현실은 무대를 향해 열려 있다. 이번 공연은 시야의 문제로 2층을 개방하지 않았지만 극중에서 앨리스가 2층 관객을 향해 말을 거는 장면이 있는데 소위 제 4의 벽을 깨는 이런 장면도 마찬가지로 현실과 무대의 경계를 흐린다. 손택은 앨리스가 상상의 세계에서 진정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신만의 삶을 획득할 수 있도록(승리하도록) 희곡을 썼지만, 동시에 그 자유와 독립성은 상상의 세계 밖에서도 유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I think I have been preparing to write Alice in Bed all my life.
A play about women's problems and impulses, and ultimately a play about imagination.
The reality of spirit imprisoned. The triumph of imagination.
However, an imaginary victory is not nearly enough.”

“난 내가 평생 <앨리스 인 베드>를 쓰기 위해 준비해 왔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이 지닌 문제와 충동에 대한 연극, 그리고 궁극적으로 상상력에 대한 연극.
갇힌 영혼의 현실. 상상력의 승리.
그러나, 상상 속의 승리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앨리스는 대체 왜 그토록 불행했을까. 앨리스의 아버지 헨리 제임스 시니어는 자살하고 싶다는 앨리스에게 묻는다. 내가 너한테 그렇게 나쁜 아버지였냐고. 그는 앨리스를 다른 남자 형제들과 똑같이 교육시켰고, 앨리스에게 손찌검을 하거나 음습한 손길을 보낸 적도 없다. 그러나 앨리스와 아버지의 관계는 일반적인 부녀관계와는 상당히 다르다. 두 사람의 건조한 대화는 소통이라기보다 독백과 독백의 기계적 주고받음에 가깝다. 마치 부하직원이 직장상사에게 보고서를 올리고 승인을 기다리듯, 앨리스는 자신의 죽음이라는 중대사를 놓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싶어한다. 헨리 제임스 시니어는 그러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간접적으로 딸의 자살을 ‘허락’한다. 그에게 앨리스는 (문자 그대로)구제불능의 딸이었을 것이고, 앨리스에게 그는 고맙지만 끔찍한 아버지였을 것이다.


헨리 제임스 시니어가 진정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였다면 울고불고 애원을 해서라도 자살하고 싶다는 앨리스를 끝까지 말리지 않았을까. 정확하지 않은데 “네 어머니가 슬퍼할 거다”라는 대사가 있었던 듯하다. 내가 공연을 보면서 앨리스의 아버지를 향해 ‘그럼 당신은?’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희곡 번역본에는  “널 낳아 준 네 엄마는 네가 자살하면 안 된다고 할 거다” 이런 뉘앙스의 대사가 있다. 여기서는 앨리스가 직접 아버지에게 질문한다.  “그럼 아빠는요?” 헨리 제임스 시니어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네 아빠는 네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구나.”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수전 손택 저, 배정희 역, 도서출판 이후, p.42) 이 대목에서 모성은 사랑의 결정체로, 부성은 이성의 결정체로 표현되고 있다. 앨리스의 아버지는 심지어 앨리스의 어머니가 죽은 후에도 자식들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의 분출(애도) 대신 이성적인 태도를 기대한다.



앨리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막내오빠가 말했지.
“지난 두 주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두 주였어.” 하고 말이야. (마가렛과 에밀리를 바라보고 깔깔 웃기 시작한다.) 그래, 미친 거야, 그렇지 않아?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 줘야 할 거야. 아빠는 고상한 원칙을 가지고 계셨지. 아빠는 우리가, 글쎄, 다른 사람 같지 않길 기대하셨지.

ibid, p.86



이와는 대조적으로, 극중 앨리스의 오빠인 해리(헨리 제임스)는 병마에 시달리는 앨리스를 안타까워하고 걱정하며 애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프로그램북 해설에서 김선형 번역가·영문학자가 지적하듯 손택은 방관자적 입장에서 타인을 연민하는 시선 또한 비판했다. 그 연민이 설령 애정에 의거한 것일지라도, 정작 연민받는 당사자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지만 애정은(애정이라는 ‘감정’ 자체는) 질병이 야기하는 실질적 고통을 없애 주지 않는다. 그저 일방적 염원,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때가 많다.


<앨리스 인 베드>에서 앨리스의 병, 즉 마비와 히스테리는 단순한 신체적/정신적 현상을 넘어 사회문화적 기제로 확장된다. 김선형 번역가·영문학자는 이 연극이 "여성을 마비와 무기력으로 몰아넣는 서구 부르주아 문화의 근본적 부조리를 폭로한다"(프로그램북 p.13)고 말한다. 그 ‘폭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이번 공연에는 위키피디아에서 인용한 수많은 설명들, 희곡 원본에는 없던 친절한 주석들이 드문드문 등장한다. 손택은 이 희곡에 대한 짤막한 메모 겸 해설을 남겼는데(국내 번역본에 서문처럼 게재되어 있다) 그 글은 ‘만약 셰익스피어에게 그와 같은 재능을 가진 여동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유명한 아이디어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이번 공연만의 독특한 등장인물이었던 토끼는 아마 여기서 영감을 받아 창조된 듯하다. (손택의 희곡 원본에는 토끼가 없다) 토끼는 상상 속 세계의 광대다. 셰익스피어 연극에 나오는 광대들은 단순한 익살꾼이나 재간둥이가 아니라 사회 부조리를 꼬집고 풍자하며 관객을 ‘깨우치게’ 하는 일종의 고발자, 비평가다. 이연주 연출은 토끼탈을 쓴 광대의 입을 빌어 ‘서구 부르주아 문화’와 여성 억압의 상징 빅토리아 시대(앨리스가 살았던 시대)를 비판하고 관객이 앨리스의 절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돌이켜 보면 손택의 희곡을 처음 펼쳤을 때 난 마가렛 풀러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에밀리 디킨슨의 시 한 편 읽어 보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영문학을 전공하고 <앨리스 인 베드>를 무대 위에서 만나자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 5장 티 파티는 내가 희곡을 읽으며 막연히 상상했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듯 재현되었고, 국내 관객들을 위해 추가된 등장인물들의 친절한 자기소개도 재치 있었다. 6장 전체는 앨리스의 긴 독백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배우에게 어마무시한 에너지와 기량을 요구하는데 성수연 배우의 연기가 정말 인상 깊었다. 병적이고 바스라질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굴의 의지와 확신을 가진 모순적 주체를, 중언부언 같으면서도 사유와 통찰로 가득 찬 버거운 독백을 담담하고 매끄럽게 소화했다.


어쩌면 이 연극에서 가장 흥미로울지도 모르는 7장은 계급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끌어들인다. 이제까지 성姓의 관점에서 ‘서구 부르주아 문화’를 비판하는 주체였던 앨리스는 계급의 관점에서 비판당하는 주체로 뒤바뀐다. 앨리스의 병실에 몰래 숨어든 도둑(젊은 남자)은 물질적 상실에 초연한 앨리스의 태도를 경멸한다. 앨리스는 그가 자신에게 가치 있는 물건들을 가져가 주길 바라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가져가 주길 바라지만 이 소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목숨(자기 자신의 목숨까지 포함해서)을 빼앗는 일은, 인간에게는 너무나 버겁고 참혹하고 두려운 일이다. 앨리스가 남자를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여겼다면 애초에 그가 자신을 죽여 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앨리스의 눈에 그는 아무나 물어 죽이는 짐승과도 같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젊은 남자:  난 동물이 아니에요. 알죠? 나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말이에요.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수전 손택 저, 배정희 역, 도서출판 이후, pp.132-133



앨리스는 젊은 남자를 떠나보내면서 ‘당신은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자는 아마 앨리스의 병실을 떠난 이후로도 계속 도둑질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앨리스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런 거리의 삶만이 그가 상상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최선의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앨리스처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천재성을 타고나지도 않았고 교육받지도 못했으니까.







커튼콜이 끝난 뒤 찍은 무대 사진. 살면서 <앨리스 인 베드>를 무대에서 볼 기회가 과연 또 생길까 싶다. 멋진 공연으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 준 제작진 및 국립극단에 소소한 감사와 박수를 보낸다.


3장에서 자신은 불행하다고 말하던 앨리스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불행한 결말은 이야기하지 말자고 한다. 이것은 특정한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건네는 제안이라기보다 스스로를 향한 다짐에 더 가깝게 들린다. 실존인물 앨리스 제임스는 자살하지 않았고 유방암 투병 끝에 사망한 그날까지 삶을 지속해 나갔다. 연극 속의 앨리스 역시 잠들고 깨어나길 반복하면서, 분열된 두 세계를 지속적으로 넘나들면서 계속 살아갔을 것이다. 손택은 <앨리스 인 베드>를 궁극적으로 상상력에 대한 연극이라 했지만 막이 내리고 내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된 것은 생명력이었다. 상상이 삶을 이어지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삶이 상상을 이어지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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