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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Oct 31. 2023

DAY 14. 푸른 <소도둑>

Written by. DKS

창을 통해 서울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 눈에 걸리는 게 너무 많아서 꽤, 성가시게 만든다. 오로지 푸른 하늘만 보고 싶은데, 내 의도와 관련 없이 눈앞에 장애물이 너무 많아서 서울이란 도시가 왜곡되어 보이기도 한다. 서울, 세상의 온갖 것들이 모여서 산다. 투견들의 결투장 같은 도시, 그 속에 나도 산다. 그들 무리에 섞여 서로 물고 뜯고 상처를 입히고 피 흘리며 산다. 그러한 일들은 삶의 욕망을 점점 키울 뿐이고, 그를 따라 움직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더 많은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갈 뿐이다. 결국 다른 이들의 고통이나 아픔은 모른 체 눈 감아 버리고, 사나운 아귀처럼 취할 수 있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취하고, 거기에 보조를 맞춰 나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을 위장하고, 위선자처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자, 맞다!! 가라앉아 있는 가슴을 헤집어 보면, 그중에 어느 곳엔 가는 순수한 마음, 착한 마음, 뜨겁게 불타던 마음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리 찾아도 그런 마음의 흔적을 전혀 찾질 못하겠다. 심장이 뛰질 않는다. 그러나 꼭 찾아야 한다. 그런 마음들을, 잊어버린 마음들을, 하늘을 하늘답게 보고, 사람을 사람답게 볼 수 있는 그런 마음들을 꼭!! 찾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이 땅을 밟고 편하게 숨 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무렵 집 나갔던 아버지가 다리가 부러진 채 깁스하고 들어오셨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가셨다 오셨으니까 대략 6년 만에 오셨다. 어린 자식들 내팽개치고 돌보지 않다가 자신이 아프니까 들어오신 거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기가 막혀서 아무 말씀 못 하시고 멍하니 푸른 하늘만 쳐다보셨다. 나는 아버지가 오셨으니 좋기도 했지만, 나름 싫기도 했다. 왜냐하면, 어린 자식들을 돌보지 않고 그냥 버려두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작은어머니를 만나서 딴살림을 차리고 나가셨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를 반갑게 맞아들일 순 없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아버지를 외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치료할 수 있게 사랑방을 내주셨다. 우리 집은 기역 자 모양의 한옥집이다. 지붕은 빨간 기와로 덮고 있었고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제법 넓은 마루가 있었고 안방과 사랑방 사이에는 부엌이 있었고 부엌 위엔 다락으로 만들어진 집이었다. 마루를 내려서면 디딤돌이 있었고 봉당 밑에 마당이 있었다. 마당엔 수동펌프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물지게로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을 때도 우리는 마당에서 펌프질만 하면 물이 콸콸 나왔다. 외할머니는 딸만 두 분 두셨는데, 그중에 막내딸이 우리 어머니였다. 외할머니는 물려받은 땅이 제법 많으셨다. 그러나 살면서 한 뙈기, 두 뙈기, 땅을 팔아서 생활하다 보니 남은 땅이 거의 없었다. 겨우 깔고 앉은 집터와 텃밭 그리고 집 앞 논 두어 뙈기 정도였다. 다리가 부러져 깁스한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인지, 사랑방에 누워 거의 매일 술만 받아 오라고 나를 불렀다. 술은 맨날 외상으로 샀는데 그 심부름은 내가 도맡아서 했다. 술값이나 주면서 받아 오라고 하면 군말 안 하고 가겠는데, 매일 외상으로 받아 오라고 하니 술 받으러 갈 때마다 무슨 말로 외상을 달라고 해야 할지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외할머니는 외할머니대로 외상술 먹는 남편과 사위가 미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술 받으러 갈 때마다 아버진 받아 오라고 소리치시고 어머닌 안 된다고 난리 치시니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는지 난감하기만 했다. 마지못해 주전자를 들고 집을 나서면서 가겟집 아주머니에게 이번엔 또 뭐라고 하면서 외상술을 달라고 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창피하기만 했다. 그렇게 술을 받아다 드리면, 불콰하게 취하신 아버지는 쓸데없는 잔소리만 해댔다. 형설지공 즉, 반딧불 아래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한 옛사람들의 이야길 하시면서 넌 왜! 공부를 안 하냐고 달달 볶았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부는 찬바람을 장남인, 내가 다 맞고 사는 거 같아서 힘들었다. 술이 보약인지 몰라도, 아버지의 부러진 다리뼈는 잘 붙어 가고 있었다.



우리 집엔 소 한 마리를 키웠다. 듣지 못하시는 어머니가 봄에는 나물 해다 팔고, 틈나는 대로 동네에서 일당을 받고 김매러 다니시고, 주로 숯 섬을 치며 돈을 벌었다. 몇 년 동안 쉴 틈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푼푼이 돈을 모았다. 정말로 아끼고 아껴서 소원하셨던 암송아지를 한 마리 사셨다. 그래서 집에서 쓰던 광을 외양간으로 개조하고 구유를 놓았다. 어머니는 무척 좋아하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암송아지가 커서 새끼를 낳으면 팔고 또 새끼를 낳으면 팔고, 그래서 우리 아들 대학 갈 때 학비로 쓰겠다고 소를 볼 때마다 귀가 닳도록 내게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게 어렵고 힘들었지만, 희망을 품고 살았다. 봄부터 가을까진 소에게 열심히 꼴을 베다 먹이고, 겨울엔 여물(소죽)을 쒀서 먹이고, 정성껏 돌봐서 그런지 송아지는 어느새 단단하게 자라 튼실해졌다. 여름엔 친구들과 같이 꼴을 베러 강가로 나가서 꼴을 베서 한 무더기씩 쌓아 놓고 꼴 따먹기 내기를 했다. 내기는, 낫을 허공에 빙그르르 던져서 낫의 기역 자 모양 끄트머리가 땅에 꽂히면 그 사람이 베어놓은 꼴을 다 가져가는 내기였다. 우리들은 소쿠리를 얹은 지게를 지게 작대기에 받쳐놓고 내기를 했지만, 나는 내기에 소질이 없었는지 거의 매일 지는 편이었다. 그래도 친구들과 같이 놀이하면서 꼴 베고 그랬던 일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집 앞엔 마지막으로 남은 논이 두어 뙈기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잘 마른 벼를, 마당에 천막을 깔고 발로 밟아서 돌리는 벼 타작 기를 옆에 놓고 벼 타작을 했다. 벼 타작이 끝나면 볏짚만 남는다. 그 남은 볏짚을 단으로 꽁꽁 묶어서 빗물에 젖지 않게 광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겨울에 새끼줄을 꽈서 숯 섬을 치거나, 소먹이로 여물을 쒀서 주었다. 어머니가 짚을 작두에 먹이시면 나는 힘주어 작두를 밟고, 그렇게 잘게 썬 짚을 쌀겨와 같이 잘 버무려 삼태기에 담아 가마솥에 넣고 끓여서 소에게 먹이로 주었다. 정성껏 여물과 풀을 베어 먹인 지 두 해가 지났다. 송아지는 완전하게 성장해서 성숙한 암소가 되었다. 그 무렵에 아버지가 집에 오셨다. 아버지로 인하여 나름 소소한 행복은 사라지고 나날이 외상술에 대한 걱정만 앞서고 있을 때였다. 어느 때인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소가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고 아파서 버둥대고 있었다. 이를 보신 아버지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르지만, 산 낙지를 가지고 와서 소 입을 강제로 벌리고, 그 낙지를 손으로 꽉 움켜쥐고 소 목구멍까지 산 채로 밀어 넣었다. 그게 무슨 처방인지 몰라도 거짓말처럼 아픈 소가 벌떡 일어났다.



어느 날 이른 아침 강가로 소를 끌고 가 코뚜레 줄을 길게 늘여놓은 다음 말뚝을 박아놓고 학교에 갔다. 그리곤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 무렵에 소를 데리러 강가로 나갔다. 그런데, 말뚝 박아놓은 곳에서 소가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히, 이른 아침 바지에 이슬을 적셔 가며, 좋은 풀이 많은 곳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다가 나름 좋은 곳에 말뚝을 박아 놓았건만, 소가 없어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하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 같았다. 그래도 ‘소가 가면 어딜 가겠어’ 하는 생각을 하고 느긋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강가를 두리번거려도 소의 흔적이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누가 훔쳐 갔나, ‘에이! 요즘 소를 훔쳐 가는 사람이 어딨어.’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주변을 샅샅이 찾아도 소는 없었다.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머릿속을 다 헤집었다. 소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밤늦도록 찾았다. 슬그머니 찾아온 땅거미가 아무도 모르게 어둠을 데려왔다. 어느새 시간은 늦은 밤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어두운 강가에 혼자 있기엔 너무 무서웠다. 소도 못 찾고 무서움은 밀려오고 하는 수없이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난리가 났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소릴 지르며 서로 붙어서 싸우고 있었다. 어머닌 듣지 못하셨지만,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서 절대로 아버지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아버진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고 집 벽에다 쾅쾅 처박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싸움을 말리려고 뛰어들었다. 어머닌 악을 쓰면서 아버지에게 돈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영문을 몰라서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들어 봤더니, 아버지는 이미 다리뼈가 다붙어서 완쾌하셨는데, 아닌 척하고 속이고 있다가 아무도 몰래 강가에 매어둔 소를 끌고 가서 소 장수에게 팔고 왔던 것이었다. 이를 몰랐던 어머니와 나는 엉엉 울 수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소 판 돈을 꼭꼭 숨겨 놓고 절대로 내놓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갔다. 어머니는 핏기를 잃은 채 눈물만 흘리셨다. 그때 어린 나는 절대로 아버질 용서 못 한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분개한 어머니는 매일매일 맞아가면서 아버지와 맞붙어서 싸우셨다. 아버진 소 판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죽어도 말씀 안 하시고, 자기 좋아하는 술만 며칠 더 실컷 퍼마시다가 부러진 뼈가 완전하게 붙어 걸을 수 있다고 판단될 때까지 숨죽이고 계시다가, 식구들 모두 잠든 오밤중에 소리 없는 바람처럼, 은밀한 도둑놈처럼, 소 판 돈을 가지고 사라졌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소 판 돈을 비닐봉지에 싸서 담장 옆에 포도나무 밑에 묻어 두었다가 사라지는 날 땅속에서 파내서 가져갔다고 한다. 이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본인의 욕망을 위해서 처자식 가슴에 대못을 박고 튀어 버렸다. 허무하지만, 나의 어린 날의 희망은, 꿈은, 푸른 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소 잘 키우고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간다는 꿈, 그동안 열심히 했던 노력, 모두 모두 허무하게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여름엔 꼴을 베고 겨울엔 나무를 해다 때면서, 지게질하는 것에는 이골이 났다. 당시 우리 동네는 강촌이라서 내가 군대 가기 전까지 나무를 해다 땠다. 그래서 동네 남자들은 지게질을 잘했다. 내가 전역하고 집에 돌아오니 도로가 넓어지면서 옛집은 사라지고 옛집 자리에 흙을 메꾸고 도로와 같은 높이로 집터를 돋운 다음 그 위에 새집이 지어져 있었다. 새집은 연탄보일러를 설치한 양옥집이었다. 그때 서야 나는 겨우 지게질에서 은퇴할 수 있었다. 전역 후 직장을 구해서 서울로 출퇴근했다. 그리고 같은 직장에서 만난 현재의 아내와 결혼했다.



엊그제는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산소를 이장했다.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약 십일 년이 지난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때는 남의 산에다 두 분의 산소를 만들었는데, 산 주인이 산을 판다고 이장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이장을 했다. 동생과 같이 어머니 아버지 산소를 개장하고 그 뼈를 담은 영구차를 따라 화장터로 갔다. 구월 중순, 화장을 끝내고 뼛가루를 담은 항아리를 내 차에 싣고 추모 공원으로 모셔 왔다. 그리곤 잔디장(잔디를 파서 뼛가루를 묻는 장례)으로 두 분을 모셨다. 결국 이곳, 추모 공원 잔디 속에 묻혀서 서로 뼛가루를 섞으며 흙으로 돌아갈 것을, 살아오신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그렇게 원망하고 치고받고 살아오셨는지,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많이 후회하시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용서하시고 땅속에서 다정하게 손잡고 계실 것이라 믿는다. 푸른 <소도둑>은, 나의 푸른 꿈을 짓밟은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원망의 소리이다. 이제는 그런 원망도 미움도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가슴에 담고 있는 모두를 용서하고, 오로지 자식들과 아내에게 언제나 푸른 하늘처럼 희망을 담은 그런 아빠와 남편이 되고 싶을 뿐이다. 이것은 나의 작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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