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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표탐구자 Dec 04. 2021

청중에게 선수치기 2

약속해줘~

몇 년 전, 은사님께서 불러주신 덕분에 대학 강의실에서 특강을 할 기회가 생겼었다. 


기존 수업 커리큘럼 내에 포함된 특강이었다. 대상은 물론 수강생들이자 후배들. 은사님께서는 나의 경험담을 후배들에게 '재밌게 얘기해주면 된다'라 하셨다. 하지만 '재밌는 강의'는 고수들의 강의다. 좋은 기회였지만 부담도 강했다.


청중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청중 분석은 꼭 필요했다. 


은사님께 강의계획서를 보내드리기 전, 수업내용이나 수강하는 학생들의 구성(융합 전공과목으로 여러 학과의 학생들이 포함되었었기에) 등에 대해 확인하는 절차 등을 거쳤다. 그리고 해당 수업, 해당 학과의 교육 목표 등을 확인할 수 있는 학과 홈페이지를 살펴봤다. 


청중 분석을 하며 이 후배들이 강의를 듣는 목표가 내가 당시 하고 있던 일과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 거라 판단했다. 당연했다. '유사한 공부를 하고 사회에 진출한 한 선배 사례를 구경하는 정도'일 것이리라. 나는 부담을 좀 덜기로 마음먹었다. 




모교 후배들과 같이 발표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청중과의 특강이나 프레젠테이션은 발표 콘텐츠의 톤을 부드럽게 해도 된다. 그리고 청중에게 '선배'로서 약간의 압박(?)도 가능하다. 나는 익숙한 청중과의 기싸움을 벌이기로 했다. 


은사님의 간단한 특강 소개가 끝나고, 나의 시간이 시작됐다. 청중 여러분과 같은 위치에서 수업을 들었던 '선배였다'를 포함한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쳤다. 그리고 선수를 쳤다. 


본격적인 특강에 앞서 저랑 약속을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용한 슬라이드


저 밤새서 준비해왔거든요, 휴대폰은 꼭! 꺼주시고요~
사용한 슬라이드


질문은 강의가 다 끝나고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용한 슬라이드


그런데 그 질문은 최소 5명 이상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용한 슬라이드


약속 지켜주실 거죠?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선수 치기의 기획의도는 이랬다. 


0. 새끼손가락 약속


특강에서 기본적인 요구를 하는 강사에게 반기를 들 학생은 없다. (거기다 내 후배들이었으니까) 다만 요구나 요청보다는 '약속'이라는 순화된 표현과 이미지를 활용했다. 발표자와 청중이 굳이 선후배 관계가 아니더라도 강제로 청중이 된 이들(누군가의 지시로 끌려오거나 일종의 의무교육 수강 등)이 대다수가 아닌 이상 이런 요청을 미리 말해두면 청중은 따른다. 강사나 발표자의 말을 들으려고 그 자리에 왔으니까. 


1. 휴대폰 X


교수님도 아닌 선배의 특강에 후배 청중이 긴장하고 듣지 않을 수도 있었다. 청중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 것만큼 발표자나 강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없다. 휴대폰을 보지 않는 것은 기본이지만 다시 상기시키려 했다. '나, 이 특강 밤새서 준비했다'는 기대감과 일종의 측은지심(?)을 자극하며.


2. 질문은 맨 마지막에


프레젠테이션이나 강의 중 청중이 느닷없이 질문을 해오는 경우가 있다. 예리한 질문이던, 전혀 엉뚱한 질문이던 흐름이 뚝 끊긴다. 그 상황이 빨리 정리되지 않으면 어수선함은 물론이고 준비한 콘텐츠를 다 발표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발표자와의 토론 형태의 상황이 아니라면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해놓아도 못 참겠다 식(?) 질문이 들어오면 '미리 약속하지 않았냐?'로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3. 최소 5명 이상


밤새워 준비한(실제 그랬다) 강의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자 집중해서 들어달라는 호소이기도했다. 들어야 질문을 할 수 있으니까. 발표자의 위치에 선 이는 질문을 두려워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발표 콘텐츠에 대해서만큼은 장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밤새워 준비했는데 어떤 질문이 두려웠을 것이냐)


선수 치기의 결과는 이랬다. 


밤새워 준비한 보람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40여 명의 학생들이 1시간 반에 달하는 시간 동안 매우 집중해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수업 중에 질문하는 학생은 없었고, 강의 후 받은 질문은 10여 개에 달했다. 




하지만 나의 실수도 있었다.


나는 내가 학창 시절 수업을 듣던 강의실이 리모델링되었을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 했다. 강의실에 들어선 순간 생경한 모습에 순간 당황했었다. 발표 공포는 의외의 것으로 자극되기도 한다. 이미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는 것이 아닌 상황에 처했을 때도.


강의자료를 USB에서 PC에 옮기는 그 단순한 작업도 PC 본체의 USB 포트를 찾지 못해 조금 버벅거렸다. 이때도 당황했다. 강의자료를 미리 준비하고 해당 학과 조교분에게 세팅을 부탁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앞선 글들에서 자주 썼듯 발표 장소에 대한 사전답사는 직접이던 간접이던 꼭 필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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