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개통 50주년이 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우리나라 산업과 경제, 문화 발전의 근간이 된 도로의 50년 역사가 대서특필되었다. 물론 어떤 일에나 따라다니는 이전투구 기사도 들끓었다. 추풍령휴게소 어디쯤 세운 준공 50주년 기념비에 누구의 이름은 새겼고 어떤 이의 이름은 빠졌다, 라는. 그 설왕설래가 따분하여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엉뚱한 길 하나를 찾아내었다. 고속도로의 전신이라고나 할까, 어린 시절의 자동차 길로 접어들었다.
아득히 먼 고향에도 신작로라 불리는 찻길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쓴 첫 글의 제목이기도 했다. 잊었다고 여겼 던 글쓰기의 열망이 돋아났을 때 그 사실을 한 지인에게 토로했다. 그이는 “다 늙어서 글은 써서 뭐 할거여? 골치만 아프제.”라고 되받았다.
그렇기는 하였다. 글쓰기와 무관하게 살아온 날들이 얼마인데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짓인가? 여러 번 생각해도 가당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내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나를 자극했다. 결국 쓸데없이 골치 아픈 짓 하지 말라던 이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흘겨보며 애정 어린 일갈을 날렸다. “미쳤구먼.”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2학기가 한참 진행되었던 무렵 같다. 나는 글쓰기 숙제를 해결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주어진 제목은 신작로(新作路)였는데 운문이나 산문을 써야 했다. 원고지에 제목과 학년 반, 이름을 적는 것까지는 기억났지만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여름밤 풍뎅이가 자반뒤집기 하듯 방바닥에 누워 엎치락뒤치락하였다.
그러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30대 후반쯤의 담임선생님 모습이 떠올랐다. 보통의 키에 얼굴은 동그스름했다. 뒤로 빗어 넘겨 한 갈래로 묶은 고수머리를 보면 성격이 강할 것 같았는데 실상은 푸근한 성격이었다. 머리카락이 선천적으로 곱슬하면 고집이 세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다. 기품 있는 자세에 말소리는 조용조용했고 연하게 화장한 얼굴은 세련미 그 자체였다. 산골에서는 보기 드문 인품이었다. 이름 또한 유순한 느낌이 드는 ‘김안순’이었다. 이런 선생님의 당부를 거스르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어 글감을 놓고 다시 고심하며 버스가 지나다니던 길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우리 고장의 편도 1차선 찻길은 싸리재와 곰티재를 넘어 전주로 오가는 길이었다. 읍내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비행기재를 통해 남원이나 전주로 갈 수도 있었다. 그 길은 첩첩산중을 벗어나는 출입구였다. 멀리 산길을 넘어가는 빨간색 시외버스가 바라보이면 막연하게나마 다른 세계로 떠날 수 있음에 설렜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그 길을 통해 고개를 넘어 본 적이 없었다.
숙제는 아버지가 밖에서 돌아온 후 해결되었다. “신작로는 도시에 사는 언니의 선물을 싣고 오고(…) 내 꿈은 신작로를 따라 달린다.”라는 내용의 산문을 썼다. 거의 아버지가 불러 준 대로 쓴 것 같다. 해결했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지만 찜찜한 것도 사실이었다. 문학의 허구성 같은 것을 알 턱이 없던 어린 마음에는 글에 거짓말이 섞여 있다는 것이 못내 켕겼다. 내게는 도시에 사는 언니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선물을 주고받을 만큼 돈독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꿈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던 것 같다.
그 찜찜한 켕김을 뒤집는 반전이 일어났다. 선생님은 내 글이 스스로 완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을 텐데, 어느 곳인가 격려할 만한 부분이 있었던 것일까? 담임선생님의 칭찬을 들었다. 친구들 앞에서 낭독으로 발표를 했고 반 대표로 뽑혀 상도 받았다. 문예가 뭔지도 모르면서 문예반에 속하게 되었다. 차츰 글쓰기가 취미와 특기로 부상하였다. 영원히 잊지 못할 두 명의 문예반 선생님도 만났다. 그리고 내 마음에는 신작로로 달리고 싶은 꿈이 새싹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중등학교 때는 지도 교사를 만날 수도 없었고 글을 쓸 기회도 별로 없었다. 글쓰기에 대한 의지는 있었지만 표현하거나 지속하지 못하였다. 심적인 여력이나 환경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잊고 살았다.
어느 날 초등학교 동창회에 갔다. 30여 년 중등학교 음악 교사로 지냈다 했더니 동창 중의 어떤 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렸을 적 나를 회상하였던지 “교사를 했어도 국어 교사를 했어야지.”라며 의아해했다. 초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했으니 국어 교사여야 한다는 발상이 뒷머리를 긁적이게 하였지만, 그 말은 잊고 있었던 아킬레스건 같은 것을 툭 건드리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서 명경지수의 심정으로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한눈팔듯 살아온 세상에는 고속도로가 신경세포처럼 산지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더구나 가상의 공간까지 온통 광통신 연결망으로 휘황한데 내 기억 속의 신작로는 아직도 비 온 날 지렁이 지나간 자국같이 초라했다. 길바닥은 울퉁불퉁했고 좁은 길에는 흙먼지가 날렸다. 산을 깎거나 비탈진 곳에는 연례행사로 산사태가 났다. 진흙 길은 파여서 웅덩이가 생겼는데 그리로 지나가는 차는 흙탕물을 튀기거나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글쓰기 제목으로 신작로는 그렇게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쩌자고 오랜 세월 잠든 씨앗처럼 내 머릿속에 머물다 다시 깨어났을까? 이제현의 《역옹패설(櫟翁稗說)》 서문에서 한 가닥 깨달음을 들었다. “임오년 여름에 비가 줄곧 달포를 내려 문을 닫고 들어앉았는데,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답답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벼루를 들고나가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 벼룻물로 하여,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조각들을 이어 붙인 다음, 생각나는 대로 그 편지 뒷면에 적고서 끝에다 역옹패설(櫟翁稗說)이라고 썼다.”라는 대목이 섬광처럼 띄었다.
그 순간 의지가 생겼다. 대가에 범접할 문장을 이뤄 낼 수는 없겠지만 내 인생에 떨어진 희로애락의 빗물로 먹을 갈아 보리라, 품고 있던 나름의 정한을 생각나는 대로 풀어내 보리라는.
초등학교 동창이 말했던 국어 교사는 못 되었지만, 번듯한 고속도로를 맘껏 주행할 수도 없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오솔길이나마 내 길을 걸어 보고 싶어 졌다. 아버지가 이끌어 준 ‘신작로’가 아니라 늦게나마 스스로 갈고닦을 수 있는 ‘내 영혼의 신작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