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게임에 빠진 날
펜화에 가까운 그림으로 잡학사전 같은 동화를 만들기로 유명한 동화 작가 리처드 스캐리는 300종 이상의 동화책을 펼쳐낸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다. 대학 졸업 후 군에 입대했던 그는 큰 표지판을 그리는 일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의 연합 본부에서 편집장으로 일한 바 있다. 제대 후에는 보그지를 포함한 잡지사에서 뉴욕을 홍보하는 일을 하다 리틀 골든 북스에서 경력을 쌓으면서 본격적으로 동화 작가로 발돋움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Busy Busy Town은 바쁘게 돌아가는 마을에 의인화한 동물의 일상을 그려 넣은 작품으로 그들이 하는 일을 서술하거나 장소나 사물에 대한 명칭 등을 세세하게 알려주는 백과사전과 동화책을 합친 듯한 활력 넘치는 책이다. 고양이, 개, 돼지, 토끼, 사자, 하마, 여우 등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을 등장시켜 그들에게 인간의 정직성을 투영하고 아이들이 언제나 완벽할 필요는 없다는 철학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독특한 화풍과 컨셉을 그대로 적용해 2009년에 발매한 아동용 보드게임이 비지 타운이다. 거대한 게임판에 꽉 채워 그려진 스캐리의 마을 그림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찾는 게임이다. 찾는 개수만큼 보드의 칸을 이동할 수 있고 게임은 두 팀으로 나눠 진행된다. 출발지에는 소풍 섬으로 향하는 고양이, 하마, 지렁이로 이루어진 동물 선수단이 있고 목적지인 소풍 섬에는 돗자리 위의 음식을 하나씩 먹어 치우는 돼지가 자리한다. 동물 선수단은 돌아가며 룰렛을 돌려 1에서 4까지의 나온 수만큼 전진해 돼지가 음식을 먹어치우기 전에 소풍 섬에 도착하는 게 목적이다. 룰렛에서 돋보기가 나왔다면 골드 버그 카드를 뒤집은 뒤 거기에 나온 사물을 보드 위에서 찾으면 된다. 선수단 모두가 협동하여 모래시계가 멈추기 전까지 최대한 많이 찾아야 하고, 찾은 개수만큼 전진할 수 있다. 룰렛에서 Pig’s eat이 나온다면 소풍 섬의 돼지가 6개의 음식 중 하나를 먹어 치운다.
독특한 판형으로 단숨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매력적인 비지 타운은 보드게임 경험이 전혀 없는 초보자들에게도 흥미를 유발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인생 첫 보드게임으로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루는 아이가 다니고 있는 어린이집에서 ‘일일 부모 교사’라는 이벤트로 학부모 지원자를 모집했는데 먼 산을 바라보며 회피해보았지만, 암묵적인 구원의 손짓을 외면할 수 없어 참여한 적이 있다. 수락을 주저한 까닭은 미취학 아동을 가르쳐본 적 없는 내가 다섯 살의 귀여운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는데 수락한 이상 잘 준비하자는 마음도 컸다. 아이들의 이목을 확실히 끌어보잔 야심으로 집어 든 게 비지 타운이었고 그 정도로는 성에 안 차 머리에 쓰는 분홍색 돼지 모자까지 따로 주문했다.
수업 당일 색을 맞춘다며 분홍색 블라우스까지 꺼내 입고 머리에 돼지 모자를 쓴 내가 등장하자 진짜 돼지가 등장한 것 같았는지 열다섯 명의 아이들은 말없이 눈만 휘둥그레 해졌고 영어로 게임 규칙을 설명하자 꿀꿀거리는 소리로 들렸는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일일 교사가 망해가는 걸 직감해 즉흥적으로 한국말로 바꿔 수업을 진행했더니 그제야 알아들은 아이들은 서로 룰렛을 돌리겠다며 돼지 앞으로 무질서하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끝장나는구나 싶은 그때 규칙을 이해한 아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서로 도우며 숨은 그림을 찾는 데 안간힘을 썼고, 친구 중에 누구라도 하나를 찾아낼 때마다 칭찬을 빼먹는 법이 없었다. 뒤처지는 친구를 합류시키는 일도 자연스러웠고 ‘Pig’s eat’이 나오는 불리한 순간에도 누군가를 탓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의 협동은 행운을 불러와 돼지가 음식을 먹어치우기 전에 모든 동물을 소풍 섬에 도착하게 했다.
정직하게 규칙을 찾고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서로 조화를 이뤄내는 게 하마터면 놓칠 뻔한 만 5세 아이들의 능력이었다. 불가능할 거로 생각했던 미취학 아동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성공시킨 만족감도 든든했지만, 그 안에서 아이들의 귀한 몸짓과 태도, 따뜻한 본성을 목격할 수 있었던 건 내게도 더없는 행운이었다. 돼지라서 정말 행복한 날이었다. 꿀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