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빈틈 Dec 30. 2023

2023 마지막은 노브라!

그 후련함에 대하여


아이들이 잠든 조용한 밤, 샤워하고 나왔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려던 찰나 속옷에 다가가는 손이 순간 멈칫했다.

'오늘은 노브라다!




남편이 차를 갖고 출근하면서 별다른 약속 없이 오롯이 집에서 보내야 했다.

남동향이라 겨울 오전시간 부엌까지 들어오는 햇살을 맞이했다.

아이들 등교준비로 부산한 아침시간을 보내서 인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집이었다.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인데 2023년 마지막을 앞둔 금요일이라 그런지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요사이 남편과 이사를 해야겠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나누었다.

워킹맘 딱지를 떼면서 더 이상 같은 아파트에 계신 친정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거기다 손바닥만 하던 두 남매가 초등생으로 장성하여 각자의 방을 가질 때가 왔다.

수납할 공간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필요에 의해서만 구입한 물건 갈 곳을 잃고 집 안을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당시 그 물건이 정말 필요했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 판단이었다.)

이러한 상황만 봐도 평수를 조금 넓혀 이사를 갈 이유가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 조금 거슬리는 소리가 한 번씩 들려왔다.

'핑계야, 핑계!'

목구멍에 걸린 생선 가시같은 이 소리를 2024년이 되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집구석 여기 저기 박혀 먼지 이불을 덮고 있는 것들을 들어내야 했다.

대놓고 돌아다니는 것들은 어디로든 자리를 잡아줘야 했다.

그래, 이사를 갈 때 가더라도 그놈의 "정리"를 딱 한 번만 해보고 가자는 생각으로 두 소매를 거둬 붙였다.


여기저기서 얻은 학용품은 연필과 지우개를 제외하곤 아이들 학원에 드림했다.

작아진 옷, 구멍난 옷 물론 세탁으로 줄어버린 옷도 모두 헌 옷 수거함으로 쑤셔 넣었다.

더 이상 읽지 않는 책들은 중고 판매로 아이들 간식비 정도 벌었다.

망가진 장난감들은 가차없이 플라스틱 분리수거함으로 들어갔다.

학교 과제나 미술학원 만들기로 갖고 온 것들은 사진으로 남기고 모두 종량제 봉투로 다이빙했다.

바닥이 조금씩 보이고 집안 공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구배치를 조금 바꿔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피아노와 컴퓨터는 가족 모두가 쓸 수 있도록 거실로 뺐다.

부엌 식탁을 거실 공용 테이블로 뺀 대신 그 자리를 아이들이 책읽고 그림그리는 공간으로 꾸며주었다.

바닥이 보이니 앉아서 만들기 시작했다. 공간이 생기니 읽기 시작했다.


공간이 정리되니 이 집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 대신 내년을 위한 새로운 다짐이 생겼다.

다가오는 겨울방학에 아이들과 거실에 모여앉아 오전시간을 알차게 보내야지.

컴퓨터가 거실에 있으니 남매들 한글타자 연습을 시켜봐야겠다.

보드게임을 사두면 아이들이 저 공간에서 저녁시간을 더 재미있게 보낼 수도 있겠다.




이사를 하려면 집을 파는 것부터 이사갈 집을 알아보고 짐을 꾸리는 것까지 잡다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게 된다. 캐캐묵은 짐들이 사라지고 제자리를 찾아가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 올 일들은 온데간데 없고 공간에도, 마음에도 후련함이 찾아왔다.


이제 내 몸도 후련함을 느낄 때가 되었다. 아이들도 새해까지는 학교를 가지 않으니 등교준비로 아침시간을 단축하느라 속옷을 꼭 챙겨 입고 잘 필요도 없겠다.


그래, 오늘 밤은 노브라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매거진의 이전글 생일용 버킷리스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