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을 통해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그의 저서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 (La) Chambre claire>에서 사진 예술에 대해 극찬했다. 그는 미학적인 개념을 동원해 사진 예술을 극찬함과 동시에 영화 예술에 대해서는 강한 반감을 암묵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영화에 관해 쓴 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 감독에 관한 것이다. 그는 1972년 안토니오니 감독의 <중국, China>이라는 다큐멘터리에 감명을 받아 <친애하는 안토니오니에게>라는 유명한 글을 남겼다. 그만큼 영화에 대해 예술적 반감을 가진 그 조차 매료시킨 만큼 영화를 논하는 데 있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에 대한 사유는 필수 불가결하다 할 수 있다.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 Story and Discourse: Narrative Structure in Fiction and Film>라는 저서로 담화론에 관해 저명한 시모어 채트먼(Seymour Chatman)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 중 <모험, L'Avventura>, <밤, La Notte>, <일식, L'Eclisse>, <붉은 사막, Il Deserto Rosso>을 안토니오니 영화의 4부작으로 명명했다. 이 네 개의 영화는 안토니오니 감독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고, 나는 그중에서도 영화 <일식>을 중심으로 내러티브 구조와 그 스토리 표현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는 다음과 같다. 한 인물(리카르도)과 결별한 여주인공(빅토리아)이 새로운 남자(피에로)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다. 안토니오니 감독의 <일식>은 주인공 빅토리아가 연인 리카르도와 헤어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전까지의 스토리에 대한 내러티브적인 설명 하나 없이 그들의 헤어짐의 마지막 단계에서 스토리는 진행된다. 어떠한 전후 사정에 대한 일말의 정보가 그들의 대화 속에서든, 다른 형태의 무엇으로든 관객들에게 제공되지 않으며 불친절하게 시작되었기에 관객들은 다소 어리둥절한 상태로 영화 속 스토리에 진입하게 된다. 특히 이 영화에는 전체적인 서사와 상관없는 일상적이고 단편적이며 휘발성이 강한 작은 사건들이 등장한다. 또한 일반적인 대화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후 진행되는 서사구조에서 역시 인물 간의 대화는 상당히 파편적이고 침묵이 가미된 형태로 나타난다. 먼저 리카르도와 헤어진 주인공이 주식 거래소로 와 어머니와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빅토리아는 어머니와 대화를 원하지만 어머니는 주식거래소 안에서는 주식에 관해서만, 밖을 나와서는 과일을 사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딸과 대화를 하지만 그 둘 사이의 대화는 지극히 단절적이고 침묵이 가미되어있다. 감정과 내용을 공유하는 것을 일반적인 대화라 가정한다면 이 둘 사이의 의사소통은 대화라 칭할 수 없는 형태를 띠고 있다.
스토리 정보의 심도와는 반대로 스토리 정보의 범위는 상당히 비제한적이라 할 수 있다. 카메라는 철저히 주인공 남녀를 따라다니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라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거의 모든 부분을 관객들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영화의 전체 서사와 관련된 작은 사건들에서 스토리 정보의 범위가 순간적으로 제한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피에로가 빅토리아를 만나러 밤에 그녀의 집 앞까지 차를 타고 간 장면을 보자. 여기서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하는데 취객이 피에로의 차를 타고 도주를 한다. 그 뒤 피에로의 차와 이를 탈취해 도주했던 취객은 호숫가에서 발견되고 피에로의 차와 그 남자의 시체가 함께 견인된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차를 타고 도주했던 남자가 호숫가에 빠진 것을 알 수는 있지만 그전까지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등 스토리 정보의 범위에 대해서 상당히 제한적으로 내용을 습득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스토리 정보의 범위가 상당히 비제한적인 경우까지 늘어나는 장면 또한 볼 수 있다. 주식거래소에서 주가 폭락으로 하루 만에 5천만 리라를 잃은 중년 남성이 있다. 이 남성은 조용히 주식거래소를 나와 거리로 향한다. 카메라는 빅토리아가 이 남성을 따라다니는 것을 보여주며 그 남성의 행방을 추적한다. 카메라는 그가 약국에서 약을 사고 카페에서 약을 먹고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것까지 보여준다. 이처럼 이 남성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비제한적인 범위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공통점이 존재한다. 두 남녀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전체적인 영화 서사에 일말의 영향도 없는 일상적이고 무관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전혀 무관한 사건에 대해서 스토리 정보의 범위는 일관됨을 보여주지 않는다. 자동차 도난 사건에 대해서는 지극히 제한적인 범위로 보여주는데 반해 5천만 리라를 잃은 남성의 행방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비제한적인 범위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전체적인 중심 서사에 관련된 사항들에 있어서는 엔딩 시퀀스를 제외하고 모두 스토리 정보의 범위가 비제한적으로 일관적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엔딩 시퀀스는 영화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이고 획기적이며 충격과 전율을 선사했다. 7분 20초의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거리 풍경으로 구성된 44개의 샷을 보여준다. 두 주인공의 내러티브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고 스토리는 이미 이전에 끝이 났다. 스토리는 끝이 났지만 영화는 7분 20초의 시간 동안 거리의 풍경을 보여주며 무엇인가를 시사한다. 엔딩 시퀀스 이전의 시퀀스를 살펴보면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주인공 피에로와 빅토리아는 헤어지기 직전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가자는 대화를 한다. 8시에 같은 장소에서 오늘 밤에도 만나자는 말을 끝으로 이들은 헤어진다. 바로 이 부분에서 두 주인공의 내러티브적인 서사는 끝이 난다. 그 뒤 이어지는 것이 바로 엔딩 시퀀스이다. 두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고 거리 풍경을 보여주는 44개의 샷으로 구성된 7분 20초의 엔딩 시퀀스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앞서 종결되었던 두 주인공의 내러티브 상의 이야기를 상당히 간접적으로 진행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엔딩 시퀀스에서 보여줬던 공간들은 로마의 신 개발구역, 다시 말해 두 주인공들이 함께했던 공간들이다. 이미 영화에도 등장했던 이 공간들을 텅 빈 공간으로 감독은 제시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그 둘 모두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끝으로 헤어졌지만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주인공의 부재를 감독은 이와 같이 표현한 것이다. 중간에 금발의 여자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역시 관객의 심리를 감독이 어떻게 파악하는지를 보여준다. 관객들은 주인공들이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속에 다시 등장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빅토리아와 비슷한 금발의 여성의 뒷모습을 제시하고 그것이 빅토리아가 아님을 확인시켜주며 감독은 철저히 관객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엔딩 시퀀스를 통해, 내러티브 적으로는 결국 두 주인공이 만남의 장소에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스토리 정보의 범위 측면에서 보았을 때 두 주인공이 다른 장소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객들에게 비제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상당히 제한적인 표현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영화의 엔딩 시퀀스를 통해 감독이 시사하고자 했던 바를 좀 더 깊게 살펴보자. 줄곧 중심 서사와 관련된 스토리 정보의 범위를 비제한적으로 표현하다 엔딩 시퀀스만큼은 제한적이면서도 충격적인 방식을 통해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안토니오니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얘기하고자 했던 바는 ‘감정의 일식 상태’라 할 수 있다. 두 주인공은 서로 만나 사랑하지만 결국 감정이 메말라 더 이상 서로를 찾지 않는다. 일종의 ‘감정의 사막화’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감정의 사막화와 일식 상태를, 도시 풍경과 주인공들의 부재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상당히 묵시론적인 표현방법을 통해 전후 이탈리아의 경제 부흥과 그와 함께 도래한 감정의 일식 상태, 즉 감정의 사막화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영화사에 전례 없을 엔딩 시퀀스를 통해 안토니오니 감독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훨씬 더 충격적이고 전율 있게, 보다 종말론적인 느낌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이 엔딩 시퀀스를 통해 감독은 일종의 미적 선택을 하였고 이것이 미적 정당화가 충분히 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다른 여타의 어떠한 표현방법 보다 훨씬 더 부재와 감정의 사막화를 강렬하게 표현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영화 <일식>에서는 내러티브 구조에 대해 <일식> 이전의 영화들과의 구조상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전까지의 영화는 내러티브 구조 상에서 필요한 부분과 필요치 않은 부분에 대해 명확한 경계선이 존재하고 긴밀한 짜임새를 통해 효율적인 서사를 보여준다. 전체적인 내러티브 서사와 관련 있고 주요한 장면들의 효율적인 짜임을 통해 영화를 구성하는 것이다. 반대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일식>은 오히려 전체적인 내러티브 서사와 상관없는 사건들이 영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면 주식 폭락으로 5천 리라를 잃은 남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주인공 피에로의 차를 훔쳐 타고 달아났다가 익사한 상태로 발견된 남성에 대한 이야기, 시끌벅적한 주식거래소에서 잠시 동안의 묵념 행위 등 남녀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전체적인 서사구조와 전혀 상관없는 시퀀스들이 영화 중간중간에 존재한다. 또한 영화 속 대화 조차 이전까지 추구하던 효율성을 여실히 잘 반영하고 있지 않다. 주인공 사이의 대화는 물론 주인공과 주변 조연들과의 대화에서도 껍데기뿐인 대화만이 존재한다. 단적인 예로 빅토리아와 어머니의 대화 역시 그렇다. 영화의 스토리 진행이라는 측면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관객의 내러티브에 대한 몰입을 저해할 수도 있는 이러한 대화들을 감독은 일부러 연출했다.
위와 같은 영화의 구성에 대해서 우리는 어디서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안토니오니 감독이 프랑스의 영화 비평가 세르쥬 다네(Serge Daney)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안토니오니 감독은 인터뷰에서 “시퀀스 각각이 서로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영화의 리듬은 삶의 템포가 아닌 가짜 템포입니다.”라고 말한다. 즉 영화적 구성을 위해 전체적인 내러티브 서사와 관련 없는 것들을 쳐내고 마찬가지로 이와 관련 없는 대화를 모두 제거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을 한다는 것은 실제 삶의 템포가 아닌 만들어진 템포라는 것이다. 그는 이와 반대로 실제 삶의 템포를 녹여냄으로써 일상과 우리의 삶이 주는 리듬을 존중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의 리듬과 삶의 템포를 존중함으로써 그는 그 어떤 영화보다 더 현실과 삶을 잘 녹여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엔딩 시퀀스와도 연결된다. 엔딩 시퀀스 역시 내러티브 서사를 진행하는 데 있어 효율적이고 짜임새 있는 구성이라 할 수 없다. 두 주인공의 부재를, 감정의 사막화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그는 전통적인 서사의 진행방식대로 각각 다른 곳에 존재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이와 같은 스토리와 의미를 연출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7분 20초에 걸친 44개의 도시의 거리 풍경 샷을 통해 이를 연출했다. 텅 비고 공허한 부재의 모습을 효율적인 짜임새를 통해 구성한 것이 아니라 단지 도시의 거리 풍경을 통해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7분 20초라는 비교적 긴 시간의 구성을 통해 연출했다. 우리가 무엇인가의 부재를 느낄 수 있는 삶의 템포와 일상의 리듬을 영화 시간 상으로 충분히 구현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일식>은 이처럼 내러티브와 스토리 구성에 있어서 큰 의의를 갖는다. 굵직한 특징을 언급하자면 첫 번째로 그는 삶의 템포와 일상의 리듬을 존중했고 이를 영화에 전적으로 반영시켜 연출했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내러티브 서사와 관련 없는 사건들의 연출, 그리고 대화 속에서도 내러티브 서사와 관계없는 무의미한 대화와 긴 침묵 등 효율성 있고 짜임새 있는 연출보다는 실제 삶의 모습을 영화 속에 녹여내고자 했다. 그 절정은 엔딩 시퀀스로 발현되었고 여기서 부재에 관한 감정의 사막화에 대해 일상의 리듬과 삶의 템포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두 번째로 스토리 정보의 범위에 관한 것이다. 영화의 스토리 정보는 비제한적으로 흘러가다 다시 제한적으로 끝이 난다. 관객은 스토리 정보에 대해 원활한 공급을 받다 엔딩 시퀀스에 들어서서 철저하게 소외당한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나자는 말과 함께 헤어진 두 주인공으로부터 관객은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그랬듯이 무참히 소외를 당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더 이상 화면 속에서 찾아볼 수 없고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조차 관객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이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7분 20초에 다다르는 44개의 도시 거리 풍경 샷을 통해 넌지시 알 수 있다는 것뿐이다. 이처럼 동반자적인 입장에서 스토리 정보에 대해 공급받던 관객은 엔딩 시퀀스에서 철저하게 스토리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이것은 감정의 사막화, 공허함, 부재의 느낌에 대해 더욱더 강렬하고 깊은 인상을 주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처럼 <일식>은 내러티브와 스토리 구조에 있어서 영화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엔딩 시퀀스와 더불어 영화에 대한 우리의 사유를 한층 더 확장시켜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