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브앤테이크
제가 리뷰 해드릴까요?
여름휴가에 아이와 둘만의 서울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서울의 잘 모르는 수많은 호텔들을 검색하며 선택을 하려니, 결국 찾아보는 것은 호텔 내부 사진과 후기 글이 정성스러운 숙소 리뷰 포스팅들이었다. 이런저런 후기 글들을 찾아보며 어떤 호텔을 골라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가 갑자기 퍼뜩 생각이 났다. 거절 미션 창작 요정은 이렇게 갑자기 온다.
창작
검색창에 호텔 이름을 치면 여러 사람들의 수많은 후기글이 이렇게 나오는데, 내가 이것을 읽는 사람이 아닌, 쓰는 사람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버 신사임당 님은 '유튜브를 무수히 보다가 내가 이거보다는 잘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순간부터가, 새로이 그 주제의 유튜브를 시작할 능력이 되는 시점이다'라고 했었다. 마치 그런 느낌이 문득 바람처럼 머릿속에 들어왔고, 또 그렇게 나는 거절당하기 위해서 내 세상이 아닌 곳을 내 발로 나가볼 궁리를 하게 되었다.
질문: 제가 호텔 리뷰 글을 제공하고, 저는 호텔 특전 (객실 업그레이드, 식사 쿠폰 등)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답변: 거절당함.
저항
하지만 내 안의 귀찮음 자아와 부끄러움 자아가 난리를 쳤다. 사실 나는 물건을 사도 후기 글 하나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귀찮으니깐. 그런 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호텔 리뷰 글을 작성하고 그것으로 특전을 얻으려고 하는가? 파워인플루언서야 그 치열한 세상 속에서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여 얻은 자리이니 협상을 해볼 자격이 되겠다만 어찌 나 같은 게으른 한 톨 밥알의 리뷰 글을 누가 검증하고 믿을 수 있겠는가. 생각만 해도 심하게 부끄러워 귀가 빨개졌다.
넘어서기
그런데 혹시 아는가. 이 어이없는 협상 제안을 했는데 정말 답변이 온다면 그야말로 지아 장님의 오륜기 도넛 사건처럼 나의 엄청난 에피소드가 되지 않을까? 내가 제일 잘하는 나만의 상상 회로가 떼굴떼굴 마구 굴러가면서 이미 유명 작가가 된 나만의 설렘이 핑크빛으로 물들며 내 안의 부끄러운 자아를 다행히 이끌고 걸어갔다.
직접 전화를 하려니 너무 떨리고 말도 잘 안 나올 것 같아 두려웠다. 난이도를 낮춰서 그냥 메일로 거절을 당해보기로 했다. 내가 이미 예약해 놓은 호텔 두 군데의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서 메일 주소를 찾아보았다. 어떻게 협상을 제안할지 생각하고 메일을 쓰는 행위는 번거롭고 말 그대로 맨 땅에 헤딩이다. 제품을 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영업하는 분들도 이런 막연한 마음이었을까? 마케팅이나 영업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어떻게 말을 꺼낼지 몰라 그저 막연해져서 제안글이 장황해졌다. 그런들 어떠하리. 어차피 나는 공을 던지는 사람이고 대답은 상대가 할 것이니 나는 내 공 던지는 것에만 집중하자.
이렇게 나는 내 상상 회로의 글을 적은 협상 메일을 두 호텔에 보냈다. 나름 공들여서 썼던 메일이지만, 지금 보니 글이 참 두서없고 부족해 보인다. 수많은 인플루언서 리뷰 전문 블로거들의 홍수 사이에서 어설프게 돌직구한 내가 좀 웃기다. 어쩌면 글이 담당자에게 닿지 않았고 스팸으로 묻혀졌을 것이다. 아니, 사실 그럴 확률이 높다.
후기
메일 전달은 의사소통 방법이 가장 소극적이어서 대면보다, 통화보다는 협상이 닿기가 어렵다는 것을 어렴풋이 예상했지만, 전화 공포증이 있는 나는 처음부터 바로 전화로 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번 미션을 계기로 나는 다음번에는 거절을 당할 때 글을 보낸 후 전화도 한통 해서 내가 메일을 보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완전히 알려야 미션 완료가 되겠다는 깨달음이 든다. 어차피 공들여 쓴 글인데 밖에 내보이지도 못하고 사장되기는 아까우니깐 말이다. 그리고 늘 고자세로 살아온 나의 관성을 벗고, 나를 훨씬 낮춰야 하며, 아무것도 없는 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꾸미고 설명해야 할지 더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다. 분명 이 마음은 나중에 내가 무언가를 제안할 때의 자양분이 될 것이기에 비록 거절당했어도 이렇게 복기하고 거절당한 후의 마음과 다짐을 새기고 기록하는 것이 그다음에 더 나은 내가 되어 결국 진정하게 나를 깰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라 믿는다.
선물이 또 왔어요
호텔에서 답변이 오는 기적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일정대로 즐거운 서울 여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번 메일로 거절을 당해보니 내공이 쌓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아쉬운 김에 체크인을 할 때 '혹시 룸 업그레이드나 더 높은 층을 얻을 수는 없나요?"라고 그냥 돌직구로 말해봤다. 부끄럼쟁이인 내가 평생 해보지도 못하던 그런 말을 꺼낼 수 있었다니, 메일 한번 보내봤다고 숙소와 내적인 친밀감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중 한 호텔은 내 질문으로 바로 가장 높은 층으로 바꾸어 주셔서 멋진 야경을 원 없이 볼 수 있었다. 아이에게도 나는 괜히 으쓱해져서, 나는 창문 밖 풍경을 요란하게 감탄하며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내 안의 소심이들에게도 '이 멋진 풍경 좀 봐. 높은 데서 보니깐 진짜 멋지지. 그냥 물어봤을 뿐인데 이렇게 큰 선물도 받고 너무 좋다. 별거 아니지? 안 떨리지? 괜찮지?'라고 계속 안심 사인을 보내주며 뿌듯했던 서울 여행의 행복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