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실 방실
"과장님은 어떻게 늘 방실 방실이실까?"
어느 날 아침 출근길 청소 아주머님이 건넨 말씀에 정말 깜짝 놀랐다. 나는 무표정일 때 입꼬리가 내려가고 다소 무서워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웃으려고 노력은 한다만 나도 모르게 집중하다 보면 이내 무표정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 나와 방실 방실이라는 말 사이이 이질감이 참 낯설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하!
나는 무릎을 쳤다. 비밀은 바로바로 다름 아닌 아주머님이었다! 그 청소 아주머님은 내가 출근하면 우리 건물에서 가장 먼저 주로 마주치는 분인데, 밝은 미소를 지으며 멀리서도 어찌나 매일같이 반갑게 인사해 주시는지 나 역시 기분이 덩달아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아주머님의 텐션으로 똑같이 인사를 해 드렸었다. 그리고 그 일이 매일매일 반복되니 아주머님에게 내가 웃으며 인사를 하는 행동은 그냥 고정값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미소는 선순환이었다. 아주머님이 나에게 준 밝은 목소리와 미소는 나에게 미소를 되돌려 주게 되었고,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아주머님이 저 멀리서 보여도 미소를 먼저 지으며 하이톤으로 인사할 준비를 했던 것이다! 세상에 긴 대화 하나 없어도 얼굴만 잠깐 보아도 상대를 기분 좋아지게 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 아주머님은 나를 변화시킨 너무나 고마운 분이었다.
창작
그래서 이번 거절 미션은 어려운 부탁이나 제안이 아니고, 내가 먼저 상대에게 초긍정 하이톤 인사를 먼저 한 후 상대의 반응이 나와 같으면 거절을 안 당한 걸로, 상대의 반응이 나보다 덜하면 거절당하는 걸로 구상해 보았해다. 거절당하기 미션 창작 이래 이렇게 설레고 빨리 해보고 싶어서 안달인 질문은 처음인 것 같다. 그래도 명색이 거절 미션인데 기준치를 높이자는 생각으로 아래와 같이 설정했다.
1. 내 평소 목소리의 2배의 크기
2. 내 평소 톤보다 다섯 올라간 솔톤
3. 내 평소 미소보다 훨씬 큰 미소 (모든 이가 다 보일 정도의 해맑은 미소)
4. 그 상태로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를 먼저 건네 보기.
저항
거절 미션 당일 아침이 되니 살짝 부끄러움과 게으름이 일어났다. 아니야 아니야 그거 아니야. 오늘 하루만 나는 내가 아니고 유명한 연예인인 거야. 얼른 다독였다. 그런데 생각나는 유명한 연예인이 딱히 안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미소가 사랑스럽고 목소리가 꾀꼬리인 샤이니 선생님의 오프닝 멘트 스타일로 빙의되기로 하였다.
안녕하세용
(샤이니 샘) "안녕하세요. 행복 부자 샤이니입니다. 어서어서 오세용."
(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당"
내가 그 사운드와 그 표정으로 하려니 정신이 혼미하고 부끄럽다. 모태 내향인 내가 가능할까. 아니야. 그동안 거절 미션보다 백배 하기 쉽잖아. 재미있잖아. 그냥 나는 오늘 아침 제주의 샤이니 샘이 되는거야. 나에게 깊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행동하기 주문을 걸어버렸다.
도전
거절 미션: 아침에 눈을 뜬 직후부터 연속으로 만나는 100명에게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를 나의 최대치 미소로 시도해보기. 내 미소를 거절당할지, 아니면 상대도 같이 방실방실 바이러스에 전염이 될지 궁금하다.
결과
07:00~08:00 : 가족 3명
잠에 덜 깬 아이들은 도대체 엄마가 왜 또 저러나 무반응으로 마무리. 남편도 당황한 것 같지만 딱히 반응은 없었다. 흠 거절당한 게 맞다. 뭐 어때. 아침부터 3번 연속 거절당한 사람인데도 내 기분은 이미 하이톤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08:30~09:30 : 경비아저씨. 카페 직원. 아파트에서 오가는 사람 10명 만날 때까지 도전.
경비아저씨와 카페 직원은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라는 말에 웃으며 대답을 해 주었다. 아파트에서 오가는 학생, 아줌마,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하려 해도 눈이 마주치지 않는다. 좀 뻘쭘했다. 그래도 나는 오늘 빙의된 모드임을 다시금 새기며 눈이 마주치지 않아도 일단 목소리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마스크를 끼지 않은 분들의 반응은 모르겠지만 대부분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주신다. 특히 아이들이 가장 공손하다. 고맙다 아가들아.
09:30 : 오 마이 갓. 이런 아직도 72명이 남았다. 억지로 사람을 만나려면 내가 여기저기 문 열고 다녀야 할 판이다. 이건 너무 정치인 같고 가식적인 상황이기에 원래의 의도에 맞지 않다. 내가 평소에 많은 사람을 접하지 않는구나 깨닫고 급하게 계획을 수정하여 하루에 20명씩 5일간 해보기로 한다. 아마도 가족과 회사 동료, 청소 아주머님, 아파트 경비아저씨는 기본값이 될 것 같다. 매일매일의 결과를 종이에 짤막히 적어놓기로 했다. 나의 일관된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리액션 변화를 기록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복기
아직 100명을 다 해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미 확신이 든다. 누구나 환경에 따라 자신이 달라지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나의 경우 나는 어떤 부서에 가면 상당히 밝고 쾌활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어떤 부서에 가면 이내 쫄아서 눈을 깔고 도망갈 궁리만 하는 소극적인 사람이 된다. 전자의 장소에서는 내가 방실방실 매사 행복해 보이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고, 후자의 장소에서는 내 존재 자체가 불편하게 보일 것이 자명하다. 나는 이번 미션으로 아침에 만나는 내 모든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는 거절을 안 당할 때까지 인사를 지속해볼 예정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도 그 아주머님처럼 미소가 자연스럽고 상냥한 사람이 고정값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 미션의 궁극적 종료 시점은 내가 먼저 인사를 피하는 상황을 제로로 만드는 그날까지이다. 이번 기회에 나는 나 자신을 긍정을 기준치로 세팅해서 의도해서 어떤 환경에서도 긍정을 먼저 건네는 사람으로 변해보고 싶다. 나는 상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반대로 오히려 영향을 줄 것이다. 벌써부터 내 글 자체에서 뻗쳐나가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내면에서 원하는 힘도 이렇게 크니 이건 분명히 끌어당겨져서 이내 이루어질 일이다. 간혹 엘리베이터에 타면 먼저 친절하게 인사해주는 어르신이 계시는데 반응을 어찌 이어가야 할 줄 몰라 난감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미래에 그 분처럼 될 것이라 상상을 하니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아 입꼬리를 조용히 한번 올려보았다.
미션을 창작하다 보면 '거절'이라는 단어. '당하기'라는 단어가 둘 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어서 내심 비틀고 싶었는데, 이렇게 초긍정으로 행복을 전파하는 거절 미션이 있다는 것을 나는 드디어 발견했다. 거절 미션의 범위는 생각에 따라 이렇게 무궁무진한 것이었다. 거절미션도 끌어당기기 기법으로 응용할 수 있는 미션이었구나. 유레카! 다음 달 거절 미션을 무엇으로 창조해낼지 벌써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