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라고 입을 떼보다
1단계. 스타벅스에서 커피 리필 요청해보기
가게에서 거절 당하기 위한 첫번째 질문으로 일단은 거절 당하기 선배님들이 시도해 보았던 클래식한 질문으을 따라해 보기로 했다. 스타벅스에서 커피 리필을 요청하기!. 이건 너무 말도 안 되잖아.
저항
스타벅스 애용자인 나는 리필을 요청하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도무지 용기가 없다. 이건 백퍼 거절당할 게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고 나 자신이 그런 바보를 자청한다는 사실 자체가 용납이 안된다. 생각으로는 쉬워 보이지만 이거 이거 나에게는 역시 고난이도다. 아.... 상상만 해도 내가 작정하고 미친 사람 역할을 하는 것 같아서 목소리가 미리 떨리고 낯부끄럽다. 거절을 당하는 상상만 해도 이렇게 정신이 혼미한데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지? 호쾌한 성격도 안되면서 왜 한다고 월초에 미션을 적어버린 거지?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전
이번 달에는 스타벅스를 갈 일이 안 생겼다. 그래서 인근 신상 카페를 갈 기회가 있을 때 그 곳에서 시도해 보기로 했다. 역시 또 걱정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나는 진상이 되는게 너무 싫은데 나 자신이 진상이 되라니 이거 너무 힘들다. 왜 내가 사서 고생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마감일의 압박이 나를 걷어차고 있고, 결과글을 올려야만 한다. 오늘 밖에 시간이 안된다는 생각에 나는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절반쯤 먹다가 카운터로 눈 질끈 감고 용기를 내서 걸어가 말을 걸어 보았다.
(굉장히 죄송한 표정의 나) "저기요. 혹시 커피 리필 안되죠?"
(점원분은 의외로 의연하심) "아... 저기.... 그러면 컵 가져오시면 물 채워드릴까요?"
(나의 반사적 대답) "아 네 감사합니다"
결과: 절반의 성공(?)
친절한 점원의 역질문에 나는 당황해서 거절을 하지도 못한 채, 나도 모르게 감사하다고 코맹맹 소리로 말해놓고선 자리로 황급히 되돌아오니 내 손에는 반 남은 나의 아메리카노에 물을 가득 채워진 밍밍한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쥐어져 있다. 나의 물 반 커피반 리필 전리품은 참으로 맛이 없었다. 이렇게 어설프고 웃픈 미션은 우여곡절 끝에 어쨌든 마무리되었다.
2단계. 오징어 가게에서 마요 소스 더 달라 하기
어느 휴일 바다 해안도로 앞을 걷다가 오징어를 구워서 파는 상회에 들르게 되었다. 예전에 와봤던 조용하던 그 가게가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줄 서는데만 30분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맛난 오징어는 정말이지 야외 테이블에서 먹는데 맛이 일품이었다. 헐레벌떡 열심히 오징어를 쭉쭉 찢어서 소스를 찍어 먹다 보니 반도 먹지 않았는데 오징어를 찍어 먹는 마요네즈 소스가 부족하다. 이런. 평소의 나였으면 사람도 많은데 소스는 고마 그만 먹고 남은 오징어만 먹고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거절 미션이 생각났던 것이다. 나는 그래 이게 기회다 싶어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가 오징어 굽는 너무나 바쁘신 할머니께 다가가서 여쭤보았다.
도전
요청은 여전히 낯설지만 특히 평소에 이런 것을 안 해 보던 나는, 괜스레 원래 질문 잘하는 사람인 척하고 싶어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크게 물어봤다.
(나) 저기요. 소스 종지 하나 더 가져가도 되죠?
(할머니) 안돼요.
(나) 헉....
단호하고 엄청 커다란 목소리에, 줄 선 사람들이 모두 다 쳐다본다. 이런 너무나 부끄러워 귀가 달아오른다. 주목받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럽다. 하지만 거절 미션은 성공했으니 이 부끄러운 순간을 조금만 버텨보자.
(할머니) 그건 안되고, 저 옆에 있는 곳에서 종지 그릇 가져와서 저기 가셔서 셀프로 담아가세요.
결과: 저기요 성공
친절하지만 커다란 목소리로 오징어 굽기를 중단하고 친히 말씀해주셨다. 덕분에 좁은 공간에서 줄 선 심심한 모든 이들의 이목도 나에게 집중된 채로, 나는 종지 그릇을 가져오러 줄을 흩트린 채로 저쪽으로 넘어가서 마요네즈를 쭈욱 짠 다음 다시 그 좁은 공간 속 인파 사이를 빠져나왔다. 마스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순간의 부끄러움을 극복한 결과 나는 맛있게 찍먹 듬뿍한 고소한 오징어를 알차게 먹었다고 한다.
3단계. 샌드위치 리필해달라고 하기
저항
샌드위치를 리필해 달라고 물어봐야 한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외치며 나는 역시나 미션 종이를 피해 다니며 다른 일로 바쁜 척을 하고 한 달을 보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의 내 테두리 안에서 편하게 배 튕기고 살다가, 테두리 밖에 나가서 '굳이' 하기 싫은 불편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상황은 나만의 엔트로피의 법칙에 철저히 어긋났다. 내 안의 테두리 안에서 얼마나 내가 밖에 나가기를 싫어하는지 나의 바닥을 실험할 수 있었고, 특히나 이 말도 안 되는 미션으로 나는 바보가 되기 싫다고 아우성을 치고 난리법석이었다. 그러다 읽던 책인 팀 페리스의 '나는 네시 간만 일한다'에서 이런 글귀가 보였다. '중요한 일을 피하기 위해 다른 일을 일부러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 맞다..(뼈맞음)'
나는 거절 미션을 피하고 싶어서 다른 일을 일부러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일 (이를테면 스마트폰 보기. 잠자기. 장보기 등 거절 미션이 아닌 모든 다른 일)을 하고 책상 위의 거절 미션 메모를 못 본 체하는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마주했다. 거절 미션을 스스로 하는 행위는 중학생에게 매일 영어사전 한 장씩 암기해서 책을 다 먹어버리라 하는 류의 피해 가고 싶은 최하위의 일이었다.
도대체 왜 그게 그렇게 피하고 싶은 거야? 내 등의 그 끈끈이를 하나하나씩 떼서 테두리 밖으로 좀 나가보자. 그게 뭐라고 그렇게 못할 일이라고 그렇게 주저하는 거야? 그냥 가게 가서 거절당하고 끝내면 되지 도대체 그게 뭐라고 그렇게 안 일어나고 질질 끄는 거야? 팀 페리스 아저씨의 난데없는 꾸짖는 말에 왠지 자존심이 상해서 나는 책을 읽다 말고 내 의지를 실험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 길로 마음이 바뀌기 전에 바로 서브웨이에 갔다. 점원이 진상력으로 혹여나 데미지를 입을까 싶어 사과 메모도 준비했다.
도전
코로나가 나의 대면 능력을 더 후퇴하게 만들었다고 괜히 탓해보며 서브웨이로 걸어가는 내 심장은 조금씩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문을 연 순간 본능적으로 나는 서브웨이에서 메뉴를 보기 전에 점원 얼굴을 스캔했다. 메뉴를 고르는데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계산대에서 말할 걱정만 되었다.
'아... 하기 싫다... 오늘은 안 하고 다음에 할까... 분위기가 너무 무섭다... 나를 어떻게 볼까.... 내가 이렇게 정상적으로 주문하고 있는데 과연 내 입에서 저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
내 안의 소심이 들 다 모여서 아우성치고 난리를 쳤다. 머리가 혼란한 나는 도무지 내가 무슨 메뉴를 말했는지도 모른 채로 어느새 계산대 앞에서 점원과 대면하게 되었다. 나는 마치 단두대로 끌려온 사람 같았다. 올 것이 왔다.
(점원) #$%@ 원입니다
(나) (정신줄 놓기 전) '저기.... 샌드위치 리필되나요?'
(점원) 네?'
(나) '그게.. 샌드위치 다 먹으면 혹시 리필되나요?' (마스크 만세)
(점원) 아니요. 안돼요'
(나)아 네. 감사합니다.
원래는 여기서 왜 안돼요?라고 질문하며 답변을 받아내는 것 까지가 거절당하기의 마무리인데, 이미 나는 도망칠 궁리뿐이었다. 최대치로 올라가는 나의 부끄러움과 심박수.
(점원) 카드 안 가져가세요?'
(나) 아! 네..
신용카드를 받으며 나는 준비했던 사과 메모를 얼떨결에 슬쩍 드리고 얼굴이 빨개져서는 초고속으로 샌드위치 가게를 뛰쳐나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음료컵에 음료를 채우지도 않고 그냥 도망쳐 나와버린 것을 깨달았다. 껄껄.. 집에 돌아와 빈 음료컵과 샌드위치를 보며, 내 등의 끈적이를 떼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내가 이걸 과소평가했구나. 그래서 미션이 이렇게 힘들었던 거구나. 테두리 밖에 나가는 게 나에겐 엄청나게 큰 허들이구나 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결론
이번 미션을 하며 느끼는 좋은 점은, 나도 모르는 내 성격과 나의 강점과 약점을 생생히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질문이겠지만, 나에겐 살면서 하기 힘든 일이라는 걸 알았고, 그런데 그걸 내가 굳이 그걸 스스로 깨고 싶다고 결정하고 깨 본다는 행위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의미가 있고 힘든 일인지 몸소 느꼈다. 그렇기에 결과를 굳이 과소평가할 필요가 없다. 다소 어설프지만 그래도 이렇게 스스로 해낸 나 자신을 한껏 칭찬해주고 북돋아주고 싶은 날이다. 나의 약점 (대면 어려워함. 남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 어려워함)을 도드라지게 돋보이도록 알게 해 주었던 오늘의 특별한 '음료 패싱 샌드위치' 맛은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미션을 성공시키며, 하기 싫은 끈끈이를 스스로 떼내고 일어나며 '저기요' 를 드디어 해내는 하루를 마지막으로 월말을 마무리했다. 제대로 이불 킥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속 편하게 숙면할 것 같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