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깨트리다
전화로 거절을 당해보며 근력을 키워봤으니 이번에는 조금 더 적극적인 방법과 질문으로 거절을 당해보기로 한다. 모르는 사람은 일단 무서우니깐 내가 아는 사람부터 시작해보고 그 다음엔 더 상대를 넓혀가기로 했다.
1단계. 호감인 사람에게 한우 사달라 하기 - 초급
결과: 거절 안 당함 (미션 실패)
반항
일단 처음에는 거절당한 원조 선배님들이 선택한 클래식한 뭐 사달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대상 선정부터 끝도 없는 도돌이표 고민에 빠졌다. 내가 정말 호감인 사람을 선정하면 상대가 거절하기 얼마나 난처할까 싶어서 입이 안 떨어졌다. 그리고 혹여나 진짜 사주면, 한우를 먹으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러면 그 다음에는 내가 다시 사주어야 하는 것인가. 이런 부담스러운 관계를 굳이 내 스스로 시작해야 하나 하는 걱정을 빙자한 핑계가 나를 가로막았다. 호감이야 있지만 그 후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압박감은 정말 정말 떠안기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쯤 해서 나는 찐 인티제(INTJ) 임을 고백한다. 그렇게 나는 적절한 거절당할 만한 만만한 (?) 상대를 찾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며 한 달을 버티고 미루고만 있었다. 아 부담스럽지 않은 한우 사달라고 말해볼 사람 정녕 내 주위에 없나?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던 어느 날이었다. 응급 말 수술을 마치고 말을 회복실에 옮긴 후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퇴근 10분 전이다. 으악. 말이 일어나서 회복하고 입원실까지 옮기는 일까지 마무리하려면 무조건 야근 각인데, 이 시골 동네에는 이 시간에 거의 문을 닫아 저녁을 먹을 곳이 없다. '그냥 라면으로 때우지 뭐'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동료 한 명이 청소하면서 'ㅇㅇ님이 예전에 수술 늦게 끝나면 저녁 사준다고 하셨는데..'라고 운을 뗐다. 흠. 아무래도 나에게 하는 소리 같다. 그렇다면 내가 연락해야 되는 것이구나 싶어 (등 떠밀 린) 나는 상사에게 17:50분에 전화 버튼을 눌렀다. 코로나 시국이다 보니 평소에도 밥 한번 밖에서 같이 먹은 적 없는 높은 분이다. 퇴근 직전의 갑작스러운 질문이기에 바로 거절당할 텐데, 거절하면서 얼마나 미안하실까 걱정되었으나 눈 질끈 감고 말을 꺼냈다.
실행
(소심하게 뭔가 말끝을 흐리며) "저기 오늘 저희가 응급 수술을 이제야 마쳤는데요.. 저녁 먹을 곳이 없어서.. 지난번에 저녁 먹고 싶을 때 말하라고 하신 게 생각나서.. 혹시 오늘 괜찮으시면 저희 저녁 사주실 수 있는지 몰라서 전화를....(쭈굴).."
입사 1n연차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두서없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는 죄지은 사람인 것 같은 말투로 지레 쫄아서 물었던 것 같다. 계획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 머릿속이 고장 난 듯했다. ㅇㅇ님은 퇴근 직전에 말도 잘 안 해본 아랫 직원의 급번개 요청에 당황하신 듯하다. 하지만 이내 호쾌한 성격답게 바로 답을 주셨다.
"아, 그, 그래?..(정적).. 몇 명이야?.. 그럼 나랑 같이 가자. 10분 후에 정문에서 보자"
같이 가자.
같이 가자
'같이 가자?'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 멍하게 있다가 생각해보니. 어라 이거 미션 실패네? 우와 첫 도전인데 초심자의 행운인가. 거절 당하지 않고 승낙을 받았다! 올레!!
결과
이렇게 그날 우리는 한우보다 훨씬 맛있는 이 구역에서 가장 맛난 흑돼지를 상사분에게 얻어먹었다. 비록 등 떠밀린 실행이었지만, 나의 전화 한 통으로 상사와 처음으로 포식을 하며 그날의 모든 정신과 육체의 피로가 사라졌다. 또한 대화가 걱정처럼 어색하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막상 마치고 나니, 아니 이게 뭐라고, 이게 뭐 그렇게 못할 일이라고, 이런 질문 하나도 내가 이렇게도 쭈뼛대며 못하는 유형의 사람인지를 실전으로 제대로 뼈아프게 알게 되었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은, 이제는 한번 뚫어 보았으니 다음에는 조금 더 편하게 '사주세요' 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할 수 있는 경험치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렇다. 시작이 반이라 했다. 다소 쭈뼛댔지만 남이 부담스러울 만한 질문은 지레 넣어두던 내가 처음으로 이 나이 먹도록 생전 안 가던 길을 내 발로 가보았고, 어렴풋이 머리로만 그려지던 거절 미션의 영상과 글들이 이제 정말 내 몸으로 새겨짐을 느끼는 배부르고 짜릿한 저녁이었다.
2. 친구야 나 돈 빌려줄래? - 중급
결과: 거절당함.
돈 빌려본 사람? 돈 빌려줘 본 사람? 월급쟁이로 심심하게 살아온 나는 돈을 빌려본 적도 빌려달라고 한 적도 없다. 게다가 정치와 종교, 그리고 금전 이야기는 인간관계 손절 일순위라고 배웠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소중한 친구에게 세상 살면서 한 번도 못한 선을 넘는 이야기를 해볼 셈이다. 나는 친구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선 넘는 부탁을 한번 해본 후에 시원하게 거절을 한번 당해 보겠다. 이러다 영원히 손절당할지도 모르겠다.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싹싹 빌더라도 일단 말이나 한번 해보기로 한다.
도전
그런데 돈을 누구한테 빌려달라고 말해보지? 일단 목표 대상을 한참 생각해 보았다. 너무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일 친구 (진짜로 입금해버리면 너무 난감하니깐 ㅎㅎ), 그리고 손절 안 당하고 내가 싹싹 빌면 나의 똘끼를 이해해 줄 친구, 그리고 신중하고 사려 깊은 친구를 선택하려 하는데 넓지 않은 내 인간관계 속에서 고르려니 막상 참 어려웠다. 오랜 시간 애꿎은 전화번호부 목록만 백만 번 돌려보며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숨을 가다듬고 친구를 선정했다. 그리고 메시지를 쓰고선, 이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정말 보내야 하는 건지 보내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데라고 마음속에서 외쳐서 소심하게 또 한참을 뭉그적 대다가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후 결국 눈 질끈 감고 전송 버튼을 눌러버렸다. 자주 통화하던 친구가 아니기에 더욱더 메시지를 보내는 내 손이 너무나 민망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보내자마자 읽음 표시가 없어지더니 이런 맙소사 바로 전화벨이 울리네?
헉. 차마 내가 두려워서 통화로는 말할 엄두가 안 나서 메시지로 보낸 건데 너무나 당황해서 못 받고 안절부절못하다가 벨소리가 마지막으로 끊길 즈음에 겨우 받았다.
(친구) "야, 너 맞아??? 너 맞지???"
(나) "........... 어....... 나 맞지....."
(친구) "야, 너 ㅇㅇ 맞아? 이거 피싱 아니야?"
(나)"................... 하하하하하.......... 그게............ 허허허허 허 (민망해서 말을 잇지 못함), 너 그런데 왜 답장을 안 하고 전화를 하냐?"
그렇다.
나의 친구는 피싱 의심자에게 문자를 보내지 않고 바로 통화를 통해 확실히 확인하는 신중하고 똘똘한 친구였다. 오랜만의 통화에 친구를 너무 놀라게 한 것 같아, 나는 일단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싹싹 빌었고 나의 거절 프로젝트에 대한 자초지종을 짧게 설명하였으나 친구는 도무지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이해를 못 한 채로 일단 전화를 끊었다.
결과
거절당하기도 전에 들킴. (이미 거절을 당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생전 안 하던 짓을 행한 나의 작태에 놀란 오랜 친구를 안심시키며 평탄한 삶 속에서 해일처럼 솟은 특별한 하루를 종료하였다.
처음으로 거절 미션을 해본 결과, 나는 상대에게 무례한 질문이었다면 충분히 해명하고 사과할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역시나 세상은 내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내가 항상 상대에 대해 지레짐작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문자로 거절이 올 것이라고 너무나 당연히 생각했는데, 사실 거절은 전화로 확인을 할 줄 몰라서 당황했다. 거절 미션 덕분에, 금전을 빌려달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연락처 목록을 찾는 그 순간이 얼마나 떨리는지 간접 체험을 했고,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인지 오히려 친구에게 배우게 되었다. 이렇게 거절 미션은 생각지도 못한 펀치를 날려주기도 했다.
3. 비호감인 사람에게 한우 사달라고 하기 - 고급
저항
고집도 세고 하기 싫은 일은 엄청 미뤄두는 내가, 나 스스로 비호감인 사람한테 말을 걸으라니, 심지어 거기다 밥을 사달라고 말을 걸으라니, 정말이지 이건 내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나 할 법한 최대로 미루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매일같이 책상 앞에 적힌 미션 질문을 봐도 스트레스만 받을 뿐 결코 행하지 않고 끝까지 미뤘다. 내가 비호감인 사람은 나에게 비호감이 될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나는 그 이유를 하나의 명제처럼 고정했기 때문에 변화시킬 생각이 없다는 것. 그건 내 머릿속의 딱딱한 콘크리트였다. 그럴 이유가 있으니 친 방어막이었는데 그걸 나 스스로 무너뜨리라니 두렵고 또 무서웠다. 상대가 무서운 것보다 내 생각을 무너뜨린다는 그 개념이 낯설어서 무서웠다.
"내 말이 맞는데 굳이 왜 다시 왜 무너뜨려?" 화난 자아가 말했다.
"그러게.. 굳이 하지 말고 그냥 이렇게 살까?" 두려움 자아가 말했다.
그렇게 나는 월말까지 나는 사실 내가 만든 장벽을 무너뜨릴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해서 포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러다 안 되겠다. 이건 그냥 하늘의 오더야. 따지지 말고 비이성으로 해보자. 너는 그저 복종이야. 싫어도 그냥 하는 거야.' 저 안에서 작지만 용기 내는 자아가 말했다.
그래. 해보자. 그냥 생각을 말고 그냥 해보자고 설득시키고 멱살을 잡아서 그냥 침을 한 다섯 번 정도 삼키고 호흡을 크게 하고선 상대를 찾아가 말을 걸었다.
(나) '#$%!#%#@$^^ 쏼라쏼라.. (상대의 눈을 맞추려니 너무 어색해서 앞에는 말도 안 되는 스몰 토크도 아이스 브레이킹도 아닌 노잼 유머도 아닌 소음 같은 말을 조금 했던 것 같음). 그런데, 한번 저한테 소고기 한번 사주실래요?'
(상대) '?????'
상대는 많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나) 시간 나실 때 소고기 한번 사주실 수 있나요?
(상대).... 어. 어.... 그래. 날 잡자고.
(나) 네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듯 돌아오니 좀 멍하다. 정말 사준다는 건가? 내가 훅 치고 들어간 만큼 훅 들어온 승낙 대답을 얻어서 내심 놀랐다. 사실 잘 모르겠다. 나 역시 입장을 바꿨더라도 상대가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을 때 놀라서 단칼에 거절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냥 겉으로는 예스지만, 속으로는 노를 외치며 그냥 그 말이 잊힐 때까지 시간으로 뭉개버렸을 것 같다. 아이고 진이 빠진다. 어렵다. 와우 이렇게 거절은 하기도 당하기도 어려운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결론은, 내 선택으로 콘크리트를 친 장벽을 나 스스로 깨는 것은 정말이지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하며 유연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나는 정말 내 식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했고 호감 비호감을 갈라놓은 사람이구나 실감했다. 인생사 언제 적이 동지가 되고, 언제 동지가 적이 될지도 모르는 긴 시간이겠다만, 이런 나만의 콘크리트가 과연 나를 방어해 주는 것인지, 오히려 고립시키는 건지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 내가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에 대한 초반 선입견과 적대심의 사유를 다시금 떠올려 보았고 그리고 사유들이 평생 유효할지, 아니면 상황도 변해가는 것인지, 그 미래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 생각해보았고 딱 부러지는 결론을 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딱딱한 마음의 한 부분이 다소 말랑해졌다.
결론은
소소한 미션 수행일지를 적다 보니 웃기기도 하고 소심한 내가 적나라해 보여서 어색하기도 하다. 그래도 이런 색다른 거절당하기 미션들이 나의 삶의 신선한 활력이었고, 책상 옆에 항상 쓰여 있었던 3가지 미션을 나름 짱구를 굴려가며 생각해보고 스스로 시도해 보았다는 뿌듯함이 있다.
아는 사람에게 거절 당해보기.
미션 성과는, '활력'과 '뿌듯함'이다.
나는 거절을 스스로 당하는데 있어서 이번에는 적어도 도망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만으로 꽤나 나 자신이 뿌듯했다. 내가 나 자신을 칭찬한 게 도대체 언제였던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나를 내던져보고 나서 잘했어,, 하고 나를 쓰담 쓰담해주는 이 기분. 꽤 괜찮다. 그리고 의외로 민감하고 폐 끼칠까 봐 눈치 보는 나의 짐작 만큼, 상대의 마음이 동일한 크기이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대에 대한 마음을 내 맘대로 재단하는 것, 어쩌면 나만의 시야에서 설정한 고정관념이었을 텐데 일단 부딪혀보니 내 마음이 과한 반면 상대의 마음은 덜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큰 간극의 현실을 이제야 나는 거절미션 실전을 통해 깨달을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