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로 거절당해보기 도전
코로나 이후 비대면으로 세상이 순식간에 잠식된 후에 의외로 행복해진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나이다. 스몰 토크 주제를 고심할 필요도 없고 모임에서 친한 척 굳이 관심 있는 척할 필요도 없으며, 상대의 표정으로 감정을 어렵게 스캔해야 하는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다. 비대면 온라인 회의는 나에게 천국이었고 전화 없이 메신저로 업무를 하는 것은 정말이지 내향인의 신세계여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비대면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신나게 살다가 요즘 다시 대면 세상으로 회귀하니, 그중 내가 가장 부담스러워진 건 의외로 전화 통화이다. 그냥 채팅으로 편하게 물어보면 되는데, 전화를 하게 되면 그 묘한 공기 사이에서 내 말문이 턱 막혀버리고 두서없이 장단을 못 맞추는 퇴화된 나 자신이 어색해 보여서 더더욱 하기가 싫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는 이렇게 고착되어버리는 나 자신을 깨기 위해서 전화로 거절을 당해보기로 결심해 보았다.
1차 도전. 저 오늘 생일인데 공짜 시술되나요?
창작
전화로 거절을 당해야 하는 미션이라. 그래도 직접 얼굴 보고 거절당하는 것보다는 쉬울 것이니 한번 해보자. 머릿속에 몇몇 질문을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건 너무 진상인데?' 진상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진상 고객이란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자기주장만 하고 받으려고만 하며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사람이다. 사실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직장 동료이든 이웃집 아저씨이든 대중교통에서 만난 할아버지든 간에 언제 어디서나 진상을 만날 수 있다. 그 말은 반대로 내가 상대방에게 언제든지 진상일 때도 있다는 것이다. 진상은 타인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그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지. 따라서 일단 나는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질문을 선택해야 하고, 혹여나 상대가 화가 나거나 감정 소모를 했다면 내가 얼른 거절 미션을 이실직고하고 사과를 하며 마무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일단은 불편함이나 화를 느낄만한 질문이 아닌, 가장 무난하다 생각하는 수준의 질문을 해 보자. 내 안의 수많은 소심이 들은 지금 이 상황이 처음 맞이하는 전시 상황일 테니 나는 천천히 이들을 위해 거절당하기 근력을 키워야 결국 나를 설득해서 깰 수 있다.
질문: 제가 이번 달 생일인데 혹시 공짜 시술 가능할까요?
결과: 거절당함.
방어
전화로 거절을 당할 일이 뭐가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다 보니, 거절을 당할 정도의 수위라면 죄다 진상력 가득한 질문 같아서 도저히 맨 정신에 내 입으로 말을 못 꺼낼 것 같다. 나의 거절 미션을 위해서 한 질문으로 상대가 불편함이나 화를 느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냥 남에게 피해 주는 일 만들지도 말고 하지도 말자라고 외치며 나는 역시 질문 하나하나를 자체 제어하며 온몸으로 방어했다. 게다가 내가 생각해낸 질문들이 한 번도 시도를 안 해본 것들이어서, 이런 질문이 진상력 있는 질문인지 아니면 흔히들 물어보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나는 질문을 하고 나서의 내 마음 상태와 상대가 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한 감정을 파악해 볼 생각이다. 남의 감정이나 피드백에 무심했던 나에게 거절 미션은 이렇게 메타인지를 높일 수 있는 셀프 실험 같기도 하다. 덜덜덜 떨리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지만 대면이 아니고 전화니깐 괜찮아. 상대는 나를 볼 수 없고 목소리만 보이면 되니깐 목소리만 이라도 용기 있는 척하고 한번 해보자. 소심이 들을 진정시키고 전화기를 들어보았다.
실전
" (알던 피부과) 저기, 제가 이번 달 생일인데 생일 이벤트 특가 같은 거 없나요?"
"..(당황).. 아 현재는 그런 이벤트가 없습니다."
".. (죄송해하는 목소리에 내가 더 죄송해서).. 아니에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후기
단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나는 거절을 당하며 첫 번째 전화 거절 미션에 깔끔하게 성공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는 내 관념을 나 스스로 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했다. 그 점이 가장 어려운 점이었다. 전화기를 들기까지의 나와의 전쟁은 길었으나 실행하고 나니, 어이없는 것을 물어보는 나의 조마조마한 멘탈에 실낱같은 힘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상대에게 거절을 당하니깐, 오히려 나는 미션이 성공했다는 성취감이 들면서 거절당하는 데에 첫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심지어 거절을 예상대로 깔끔하게 당하니 기분이 개운해짐을 느끼며 이걸 행복해하며 북 치고 장구 치는 나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리고 거절을 깔끔히 당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하고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첫 단추를 가까스로 꿰고, 시작이 반이다는 생각으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두 번째로 전화로 거절당하기를 이어가 보기로 했다.
2차 도전. 저 이번 달에 졸업인데 혹시 회원권 할인 이벤트 없나요?
창작
두 번째 전화로 거절당하기의 상대는 내가 예전에 다녔던 헬스장이다. 운동을 하고 싶기도 하고 요즘 가격이 궁금하기도 하던 했다. 1차 도전처럼 공짜나 할인 이벤트 질문을 공손히 해보면 거절을 깔끔하게 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질문: 저 이번 달에 졸업인데 혹시 회원권 할인 이벤트 없나요?
결론: 실패.
실전
첫 번째 도전으로 약간의 자신감을 얻은 나는 동네 헬스장에 전화를 해 본다. 한 번만에 전화 공포증이 어느 정도 누그러진 게 놀라울 따름이다.
(나) 제가 이번 달에 졸업을 하는데요, 혹시 회원권 할인 이벤트는 없나요?
(직원) (너무 친절하심) "아~ 네~~~ 그러셨군요~~~~. 아쉽게도 그런 이벤트는 없지만, 회원님이 이번 달에 졸업과 생일도 있으셨다니깐 제가 특별히 이벤트가로 모셔드릴게요. 4만 원 할인에, 락카 무료까지 특별히 해드릴 텐데 이번 달 까지여서 오늘까지 등록해주셔야 이벤트가 가능하세요~~ 몇 시쯤 방문 가능하세요?"
(나) (1차 당황) "아.. 제가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생각해보고 다시 전화드려도 될까요?"
(상대) "회원님~~ 제가 회원님 좋은 일 있으셔서 특별히 해드리는 거니깐 오늘까지 꼭 혜택 받으셨으면 좋겠네요 34%@$"
(나) (당황*당황)
가까스로 나는 어떻게 끊었다. 아이고 손에 땀이 나는 것 같다. 거절은 하기도 당하기도 어렵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특히나 나는 거절을 하는 게 당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도망치듯이 당황스럽게 전화를 끊고 나니, 바로 휴대폰 메시지가 띠리링 비집고 들어왔다.
후기
허허.. 호기로웠던 초짜인 나는 영업 고수 분의 코털을 건드린 것 같다. 미션 실패이자, 거절을 안 당해서 개이득인 것 같으면서도 왠지 마냥 기쁘지만은 않고 진땀을 뺐던 두 번째 미션을 끝으로 이번 거절당하기 전화 미션을 마무리했다. 이참에 진짜 운동 등록할까? 생각도 잠시 들었다는 후문.
메타인지
거절 미션을 한번 해보니 이건 거절을 당하거나 당하지 않거나 하는 결과가 나에게 중요 포인트가 아니었다. 그 중간 과정에서 타인이 어떤 마음으로 거절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다음 나는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응대하며 답변을 해서 마무리를 해야 하는지가 거절당하기 미션의 끝이었다. 진정한 끝을 만들려면, 한 명의 진상 1명이 증가하는 게 아닌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지 않게 마무리를 하는 게 위트 있는 거절 미션의 마무리였다. 이번 거절 미션을 통해서 나는 상대방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는 점, 그리고 상대방이 나의 질문에 당황하는 상황이 나 역시 불편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 불편함을 견디는 용기와 배짱이 거절당하기 미션의 핵심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상대방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리고 상대방에게 웃음을 띠게 하며 마무리를 할 수 있는 지혜로운 마무리를 생각해보아야겠다.
이렇게 한 번 두 번이 쌓여서 연말쯤 되면, 여기서 거절당하는 즉시 나는 바로 도망가지 않고 "why?"라고 아주 천연덕스럽게 물을 수 있는 고수가 되는 날이 있겠지.
거절 미션은 질문 창작부터 내 마음에 대한 고찰까지의 좌충우돌 일대기가 마치 일탈 여행 같기도 하고 전혀 몰랐던 방향의 나의 일부를 제대로 툭 건드리고 단련시켜주는 느낌이다. 내 안의 눈치 보는 소심이의 성장일기 같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하던 세상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시도도 안 하면 절대 모른다는 말의 실전형이랄까? 질문이 비윤리적이고 위법이고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수준으로 한정한다면, 거절 미션은 그야말로 고착화된 내 인생에 건강한 자극 점이 되는 것 같다.
이번 전화 거절 미션에서 나는 상대와 나와의 감정과 예상되는 마음을 미리 가늠하고, 그전에 협상 포인트를 찾게 된다는 점에서 메타인지가 더 높아지고, 타인 입장을 한번 더 생각해보는 의외의 순기능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여기에 보다 적극적인 나의 마무리 답변까지 세세히 준비해서, 건강한 거절과 화해로 진상 오해는 풀어내며 서로 간의 윈윈을 도모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욕심을 내 본다면, 다음번에는 미소와 유머를 살짝 버무려서 상대방에게도 어이없는 하나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남을 수 있는 더 멋있는 거절 미션을 창작해보고 싶다. 벌써 새로운 질문을 상상하고 있는 나를 보니 전화 공포증이 신기하게도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메타인지까지 나를 건드려주며 나도 모르게 치료해주는 나만의 거절 미션 루틴이 참 신통방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