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끝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택배기사님들에게 보내는 경고성 안내문이 붙어있다. 잦은 고장으로 주의안내를 하는 것이 이해 안 되는 바는 아니지만,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이유는 아마도 그 자리가 예전에는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그림편지 코너였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이 아파트에 이사 왔을 때 웬 엘리베이터 타는 곳에 그림이 있네? 했었다. 알고 보니 2인 1조로 근무하시는 경비원 아저씨 중 한 분이 소일거리로 그림과 메시지를 적어 주민들에게 공유했던 것이다.
그림체는 좀 올드하지만 각 잡아 쓴 글씨 하며 공을 많이 들이신 태가 났다. 설에는 설 연휴 잘 보내고 오시라고, 코로나 때는 마스크 잘 쓰고 건강하시라고. 며칠에 한 번씩 바뀌는 그림 메시지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파트 연식만큼이나 오래된 아저씨의 그림 스타일에 그 순간만큼은 응답하라 시리즈 안에 주인공이 된 기분도 들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저씨가 경비 일을 하시기 전에는 어떤 직업을 가지셨는지도 궁금했고, 꾸준히 이렇게 메시지를 붙여 주시는데 다들 그려려니 하는 것 같아서 나라도 잘 보고 있다고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마음은 굴뚝같았는데, 부끄럽기도 하고 사느라 바빠 그 짧은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자꾸 다음으로 미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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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그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불편한 한쪽 다리를 끌고 구부정한 자세로 어린이들에게 반갑게 인사해 주시던 분인데, 어디 몸이 안 좋으신 건 아닐까? 혹시 불편한 다리 때문에 해고되신 건 아니려나. 걱정이 됐다. 다른 경비원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잘 모른다고 하더라.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저씨가 그만두신 후 마지막 남아있던 그림은 어느새 빈 벽으로 바뀌었다. 인사라도 해 주시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경비실엔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다른 경비원이 앉아 있고, 더 이상 아저씨의 따뜻한 미니 전시회를 볼 수는 없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엘리베이터 사용 주의에 대한 차가운 경고문만 덩그러니 붙어 있다. 차라리 빈 벽일 때가 나았다 생각하다가 아저씨의 그림을 올려본다.
외국인들에게 소개하는 한국의 장점 중 ’정‘ 이라는 게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이젠 그 문화가 많이 없어진 것 같다. 길을 물어보는 사람에게조차 사이비 종교인가 싶어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핸드폰 화면만 보며 걷는다.
이 반찬 옆집에 좀 갔다주라는 엄마 심부름에 온 동네 애들이 이웃 집 제 집 드나들듯 다니던 아파트의 낭만도 있었는데. 새삼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아저씨, 추운 날씨에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 익명의 한 독자로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