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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울 May 20. 2023

5. 소이증 소년의 두발검사 잔혹사

감추기와 드러내기의 줄타기

■ 스포츠컷, 상고스타일
 - 자신감 있어 보인다
 - 신뢰감을 준다
 - 남자답고 멋있다.

■ 장발, 더벅머리
 - 의기소침해 보인다
 - 신뢰가 가지 않는다
 - 불량하고 비위생적이다
 
- 2007년 3월, 인천 만수북중학교 두발규정 안내문
(C) 정광숙




14살이 되었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요즘은 중고등학교 두발규제가 거의 없어졌다고 알고있다. 정말 축하하고 환영할만한 일이다. 16년전에 나는 두발규제 때문에 정말 미치도록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해도 두발규제가 심하던 때였고, 내가 살던 동네의 모든 중학교가 다 빡빡한 두발규정을 갖고있었다. 중학교 입학 원서를 쓸 즈음 초등학교 6학년생들은 교실 구석에 삼삼오오 모여서는, "만월이랑 만성이 좀 길다더라", "만수와 만수북은 무조곤 반삭이라더라", "그중에서도 그나마 만수북이 낫다더라" 하면서, 1센치라도 머리를 기를 수 있는 곳이 어디일지 열띤 토론을 다.


나는 그 중 규정이 가장 쎄다고 들은 곳에 입학이 되었다.


예비소집이라고 하던가, 개학 전에 불러서 오리엔테이션처럼 이것저것 안내하는 날이 있었다.

그날 학생부장 쯤이었을 어느 선생이, 막대기를 딱딱 휘두르며 머리 긴 애들을 지목하면서 다 밀어오라고 으악 죽였다.

잿빛 갱지에 인쇄된 두발규정에는 '앞머리 몇센치, 뒷머리 어쩌고저쩌고' 라고 쓰여있었지만, 내가 기억나문구는 하나, '귀는 완전히 보이게'였다. 구체적으로는 구렛나루를 기르지말고 귀 주변은 바리깡으로 파야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 야무진 우리 엄마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학교에 찾아가 학생부장인지 학년부장인지를 만났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략 우리 아이가 이러이러한 기형을 갖고 있어서 그러니 두발검사에서 좀 봐달라는 얘기였을 터이다.


어른들이 어찌어찌 대화를 나눴다니깐, 나는 일단은 "내 머리는 잡지 않겠지"하고 덮어두고 안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이었다. 다른 애들은 다 머리를 밀고왔는데 나만 머리가 길면, 필시 "쟤는 왜 머리 안 잡아요"라는 류의 항의가 있을 것이고, 애새끼들이 그런 류의 항의를 (선생님과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점잖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애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나를 가리키며 할 것이 뻔하므로, 그런 류의 해결방식이 내 문제를 오히려 더 두드러지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엄마의 방문이 무색하게 나는 첫 두발검사때 제대로 잡혀버렸으니까.


나라고 뭐 무작정 배짱 부린게 아니고, 나름대로 선을 아슬아슬하게 타 보겠다고 귀 윗부분을 아주 살짝 덮는 식으로 머리를 잘라 갔더랬다. 규정의 입장에서는 한참 못 미치는 성의지만 내 나름대로는 파격적인 노출이었던지라, 그것도 너무 짧다고 울상이 되었다. 거울 앞에서 매일 그 머리길이를 체크하며, 옆머리를 쭉 늘어뜨려 귀를 최대한 덮어보 하나마나한 짓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 슬픈 성의가 무색하게도 학생부의 젊은 교사가 이새끼저새끼하며 나를 잡았던 것이다.


당시만해도 한 반에 30명 남짓 11개 반이었고 전교생이 1000여명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000명 중에 한놈 한쪽 귀가 찌그러져 있건 거꾸로 붙어있건, 그걸 교사들 모두가 서로 공유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공유해서 알고있는 교사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관심 갖거나 기억하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가 가서 쇼부를 본 교사는 학생부장이었고, 그 부장은 다른 교사들한테 별다른 얘기를 안한 모양이고, 다른 교사들은 그래서 내 머리를 잡았다. "이놈새끼 저놈새끼" 욕을 하며.


다시 가서 잘라오라고 이틀인가 말미를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대로 안 잘라오면 직접 밀어버리겠다는 엄포도 덧붙였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결국 미용실에 다시 갔을 것이다. 아니면 엄마가 조금 더 잘라줬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한건 좀더 손을 봤다. 전반적으로 더 짧아보이게,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귀는 가릴수 있게. 이 모순적인 두 요구사항을 동시에 만족시키느라고 미용사가 성질 많이 참았을 것 같다. 엄마였으면 속상함을 많이 참을 것이고.


이틀 후 다시 학생부실에 갔다. 1차로 걸린 애들이 복도에 서 있었고, 학생부 문 안으로 한명씩 들어가 교사에게 머리를 보여주면, 교사가 확인 후 이름을 지워주는 식이었다.


그 복도에 서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 차례가 되어 들어갔다. 군 전역한지 얼마 안됐다는 소문이 있는, 거진 빡빡민 머리에, 다부진 몸에, 썬팅된 안경을 쓰고, 영남 말씨로 "이 쒸발럼아"를 찰지게 갈기는 학생부 젊은 교사가 있었다. 그 나이대 남자애들이 그 나이대 남자교사에게 흔히 그럴수밖에 없듯이, 나는 그 선생이 몹시도 무서웠다.


학생부 안으로 들어가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가 비굴한 웃음이라도 지어보일 새도 없이 교사는 리스트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주 심드렁하게 뱉었다 "넌 안 이 새끼야"


가슴이 덜컥 가라앉았다. 2차 검사에서도 통과안하면 그놈의 벌점을 멕이고(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별 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아직 순진했어서 되게 무서줄 알았다), 아예 밀어버린다고도 했으니까.


나는 하릴없이 발길을 돌리려다가, 엄마가 일러준게 생각났다.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어필해보고 할 요령이 없는 나이인 나에게, 엄마가 "만약 이래도 두발검사에 걸리면 귀를 한번 보여봐라"라고 일러줬었다.


"저기...근데"

"뭐"

"제가 이쪽 귀가 기형이라서요..."

"어 그래? 봐봐. 어.... 니는 통과"


그렇게 허무하게 통과했다.


학생부실을 나오자 복도에 서있던 애들이 전전긍긍하며 서있었다. 나는 방금 전의 상황을 애들이 들었을까봐, 또는 못 들었다하더라도 혹시나 그 머리로 검사를 통과했는지 여부를 물어볼까봐, 황급히 교실로 뛰어들어갔다.


이윽고 교실의 몇몇 범법자들이 나에게 통과여부를 물어봤고, 나는 거짓말을 하고싶었지만 숨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는 '선생을 영악하게 속여먹고 몽둥이를 피해간 악동'이라도 된  마냥 의기양양하고 개구쟁이같은 표정을 짐짓 지어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가슴이 졸여지고 얼굴이 뜨거웠고, 무엇보다도 조금 슬펐다. 나의 통과는 그런 류의 (중학생 기준으로) 영웅적이고 유쾌한 통과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쪼록 그 날 이후로 확실히 알게된건, 내 귀에 대해서 이 학교 선생님들이 호락호락하게 봐줄 생각이 없다는것, 아니 정확히는, 그냥 그럴만큼 관심 자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담임에게도 한번 찾아갔다. 머리 때문에 특별히 찾아갔다기보단, 어쨌든 새 학교에 입학했으니 부모님을 한번씩 불러서 면담하거나 하는 자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귀 얘기도 했을터인데, 별다른 반응이나 조치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흘러갔다.


입학한지 5개월쯤 되었을때이다. 어찌저찌 나는 체념하고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대충 친구도 사귀고 어느정도 루틴하게 생활을 하던 중이였다. 한 친구랑 그냥 앉아있는데, 갑자기 내 귀를 만지면서 말했다.

"이렇게 만지면 아프냐?"

나는 머리를 홱 돌리며 뭐라고 얼버부렸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뭔가 오싹한 감정이 들었다. 그 나이대 남자애 치고는 좀 예민한 편이었던 나는 그 친구의 표정과 말투에서 뭔가 석연치않은게 느껴졌다. 뭔가 논리적으로 안 맞는 것이 있었다. 그 논리적 오류라 함은 대략 이런거였다.

1. 그 친구는 철딱서니없는 놈이다.
2. 그 친구가 내 귀를 처음 본것이었다면?
    - 어? 너 귀가 왜이래? 라는 '발견'의 반응이 먼저 나왔어야 맞다.
3. 처음 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반응을 생략하고 바로 다음 단계의 반응을 보인 것이라면?
     - 그새끼는 정말 철딱서니 없는 놈이기 때문에 스스로 그럴리가 없다

결론. 누군가가 이 아이에게, '어? 너 귀가 왜이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준 것이 분명하다.


나는 순간 얼굴이 벌개졌다. 그래서 다른 친구를 찾아서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 친구의 별명은 후추였다.

"야 후추. 너 내 귀 이런거 알지"

"어엉"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잘 보였냐?"

"담임이 저번에 너 없을때 말한적 있어"

"뭐?!"

"담임이 너 뭐 심부름 보냈던가? 하여튼 너 없을 때, 애들한테 너가 어려서 소아마비였나 뭔가에 걸렸어서 귀가 기형이 됐으니까 놀리지 말라고 그랬어"


그 순간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마구 소리를 지르면서 교실의 책상과 의자를 걷어차며 고래고래 욕을 내질렀다. 후추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거의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담임선생은, 내 콤플렉스를 숨겨주기는 커녕, 발가벗겨서 널어놓은 것이다. 심지어 소아마비 같은 엉뚱한 소리까지 갖다 붙이면서 말이다(어쩌면 '소이'증을 멍청한 우리 후추가 '소아'마비라고 잘못 기억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없다. 담임은 어른이었고 애들은 애들이었다. 제대로 전달해야했으며, 그러지 못한 것은 담임의 책임이다)



지금 와서 그 담임선생을 굳이 원망하지는 않는다. 사실 30살이 된 지금의 내가 내 귀를 다루는 방식은, 숨기기보단 대놓고 드러내기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담임의 '드러냄'이 나쁜 선택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냥 그때는 내가 '숨김'을 원할 떄였다. 머리카락 1센치미터에 목숨을 걸면서, 어떻게든 가려보려고 애쓰던, 그 간절한 숨김이었다. 좋은 의도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내 그러한 간절함을 무참히 짓밟은 그 담임을, 나는 졸업할 떄까지 죽도록 미워했다. 서른 살 먹고 돌이켜보니 그 사람은 초임 교사였으니 스물 대여섯쯤이었을것이다. 택도없이 어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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