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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울 Jul 01. 2023

<결혼 이야기> review

#2 사랑과 증오의 중간지점은 결국 증오다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이혼의 과정과는 달리, 파경을 맞이한 찰리와 니콜은 여전히 여느 부부처럼 서로를 대한다. 만나면 입맞춤을 하고, 상대방의 축하할 일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포옹을 하고, 참혹한 폭언을 내지르며 싸우는 와중에도 ‘여보’라고 부른다. 

 



브런치에서 유명한 작품 중 <손을 꼭 잡고 이혼하는 중입니다>이라는 에세이가 있다.



외도를 거듭한 남편과 마침내 이혼을 하는 과정, 그리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담담한 필체로 적어낸 글이다.

그 글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이혼의 과정이 결코 증오나 분노 일변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혼 접수를 하던 날과 마찬가지로, 이 날도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어제가 일요일이었는데, 내일 법원에 가는 부부답지 않게 역시나 함께 산책을 하고 점심을 먹고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손을 꼭 잡고 이혼하는 중입니다> 中



이러한 언뜻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감정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를 더 이상 견뎌내지도 용서하지도 못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그동안 쌓아온 사랑과 정이 있다. 언뜻 대충 생각하면 미움은 사랑에 마이너스 부호(-)를 붙인 것이고 그래서 두 감정은 서로 상계 가능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할 일이 생겼을 때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건, 의외로 마음 속의 사랑은 그대로고 미움은 그 옆에 병존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어린 남녀의 연애의 시작은 ‘오늘부터 1일’ 선언으로 가능하고, 그 종료는 ‘연락처 차단과 사진 삭제’로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결혼은 결코 그렇지 않다. 거처를 구하기까지 여전히 같이 생활해야 하고, 이혼을 향한 행정적 절차든 재산 분할이든 함께 상의해야 한다. 그동안 많은 것들을 함께 쌓기 위해 발휘해온 둘만의 자상한 파트너십을, 이제는 그것들을 모두 정리하는 작업에서 다시금 발휘해야 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 

이혼 중이지만, 서로 미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 역시 갖고 있는 찰리와 니콜이, 과연 다시 어찌해볼 여지는 없었던 것일까? 미움과 사랑이 병존할 때, 후자에 더 걸어볼 수는 없었던 걸까? 


인간은 한 번에 여러 가지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는 저주를 받은 고등생물이다.

마음 안에서야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가진다한들 하등 이상할 것이 없지만

마음 밖의 세상, 이를테면 사회제도에서는, 부부이면서도 부부가 아닐 수는 없다. 둘 중 하나만 택해야한다.

슈뢰딩거의 부부 따위는 허용되지 않는 세상에서 인간의 비극이 시작된다.


현대의 연애와 결혼은 낭만주의 전통의 지배적인 영향 하에서, 사랑에 ‘완전성 요건’을 부여한다. 1,000일 동안 한 남자만을 사랑한다던 여자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그 중 3일 동안 다른 남자를 탐했다고 한다면, 인간 사회는 그것을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사랑은 1이거나 0이지, 99.7%짜리 사랑은 사랑이 될 수 없다. 완전과 불완전의 중간지점은 결국 불완전이기 때문이다.    



(찰리가 찾아간 이혼 변호사 제이의 명언 : "우리가 이성에서 시작하고 저쪽은 광기에서 시작했을 때, 우리가 합의를 한다면 이성과 광기 사이 어딘가일거요. 그리고 이성과 광기의 중간 지점 역시, 광기이지요")


사랑미움이 공존하는 감정 역시도, 이러한 완전성의 함수에 따라 미움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규정할 수 없으며, 이 관계는 무너져야 한다.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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