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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울 Jul 20. 2023

「언어를 디자인하라」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1 언어에 대한 민감함은 무기일까 걸림돌일까


어려서부터 유독 언어에 민감했다.

내가 다니던 새말초등학교와 옆동네 조동초등학교의 이름이 같은 뜻 (새+마을, 鳥+洞)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희열이 아마 첫 시작이었던 것 같다.

black(검정색)과 blanc(흰색)의 어원이 같은 것임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종종 "혹시 그것이 空의 상태를 의미하는 blank를 검정으로 볼 것인지 흰 색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를 혼자 생각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달콤한 케이크를 먹을 때나 포르노를 보는 것과 같은 도파민 분비를 느낀다. 우세스럽지만 수년 째 그런다.

일상에서 나는 "~라고 생각해"와, "~라고 알아"와 "~라고 믿어"를 모두 엄정하게 구분해서 사용한다. 각각의 단어가 가진 적확한(*'정확한'의 오타가 아니다) 의미감을 나는 예민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같이 본 사람에게 "어땠어?"라고 물어봤을 때, 그 사람에게 "좋았어", "재밌었어"라는 대답이 나오면, 나는 그것이 무성의하게 느껴져서 서운하기까지 한다. 나 같은 사람에게 그건 마치 "그 가방은 얼마야?"라는 질문에 "5천원에서 5백만원 사이야"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렇듯 언어에 대한 감각이 예민하게 발달한 나는 언어능력이란게 일종의 무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것이 오히려 걸림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언어에 너무 예민한 나머지 '언어가 아닌 것'은 비교적 잘 보지도 보여주지도 못하는 것 같다는 자각이 들었다. 왜냐면 모두가 나만큼의 엄정한 언어선택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 예시로, 직장에서 자주 겪는 일이다. 모두가 침묵 속에서 일을 하는 와중에 상사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본 채로 허공에 대고 대뜸 말한다. "이거는 A 때문에 그런거죠?"

그러면 나는 그 (대상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짧은 문장 속 뻥뻥 뚫린 부분에 재빠르게 전체 의미를 채워 넣어야 한다.

"XX씨, 방금 올린 품의에서요. 마지막에 ~라는 문구를 넣은 이유는 전결규정에 ~ 부분을 고려해서 ~하다보니 A가 필요해서 그런건가요? 이거 그런데 ~ 때문에 ~하므로 굳이 안 넣어도 될 것 같은데요?"


또는 이와 반대의 상황도 있다. 누군가 나에게 아주 거칠고 사나운 표현을 담아 내게 화를 낸 적이 있다. 나는 그 표현된 언어의 강도만큼 상대방의 분노와 증오심을 파악했고, 관계의 종결을 이해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중에 와서는 사실은 그렇게까지 화나지는 않았던 것처럼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 감정이 앞서서 심하게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 표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태도나 행동을 보여주기를 내심 바랐던거라는 말도 한다. 


이렇듯 누군가는 전달하고 싶은 의미를 언어에 50%만 담아서 말하고, 누군가는 200%를 담아서 말한다. 쏟아지는 과소표현 또는 과대표현들을 마주하면서 상대의 적확한 의미 100%를 찝어내는 것은 언어적 능력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는 내가 예민한 종목인 언어에 너무 기대고 있다. 최근에 내가 겪은 몇가지 어려움들이 거기에 연유하고 있다고 느낀다.



#2 책 소개


언격은 인격이다. 언어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고, 누구와 어울렸고,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언어의 레벨이 그 사람의 인생의 레벨이라고까지 말한다. 

언어가 왜 중요한지에 대하여,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나의 언어를 레벨업 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관점 디자인의 대가라는 박용후 대표와 스스로 지식생태학자라고 칭하는 유영만 교수가 공저하였다.


[Part 1]에서는 언어란 '생각의 옷'이며 '개념의 집'이라고 선언하고,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이끌고 더 나아가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갈수록 읽기 능력이 퇴화되고 있는 현대인들의 '빈어 증상'(피가 부족하면 빈혈이듯이, 언어가 부족하면 빈어)을 염려하는 한편, 왜 언어를 디자인 해야하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Part 2]에서는 '언어 레벨업'을 위해 7가지 개념사전을 써볼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신념사전, 관점사전, 연상사전, 감성사전, 은유사전, 어원사전, 가치사전이다. 자신만의 사전들을 써봄으로서, 사회가 규정하는 개념을 초월하는 자신만의 개념을 정립하라고 한다. 그것이 나를 나답게 만들고, 내 고유의 색깔과 가치관을 뚜렷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3 이런 것이 좋았다.


1. 언어에 대한 내 애티튜드를 바로 세워줬다.


나는 이상하게도 어려서부터 일종의 '비주류 언어'의 말맛을 재밌어했다. 내가 지독하게 좋아하는 것들은 영화 속 미국 흑인들의 말투, 온갖 사투리들, 노름꾼들이나 깡패들이 하는 은어들 따위다. '쑈부', '시마이', '와꾸' 등의 일본어들, '가라치다', '짬때리다' 따위의 군대 속어들의 거칠고 날것의 표현들에서 시원시원한 쾌감을 느낀다. 그런 말들이 가진 매력이 있다면, 고상한 말들(주로 한자어거나 외국어)에 비해 묘한 운율감과 솔직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에 얼마 전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그런 말을 쓰지 말라는 얘기를 몇번 들었다. 나는 누가 '뭐 해라 뭐 하지 말아라' 라고 하면 오히려 삐쭉거리는 심리가 발동하곤 하는, 좋게 말해주자면 리버럴이고 중립적으로 말해도 꼴통이요 반골이요 엉덩이에 뿔난 못된 송아지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는 그러마 했고 실제로도 입버릇을 좀 고쳐보려고 했지만, 마음 깊은 곳까지 와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 '언격이 곧 인격이다'라는 말을 하고, 그 같은 말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내게 설득하자, 스스로 경각심이 느껴졌다. 그래, 말을 조심해야지. 나도 나이가 서른인데. 내 자유로움이나 말의 운율 따위를 꼭 천박한 단어들로 표현해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따지고보면 내 언어구사력의 밑천이 그렇게 한정적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책에서 강조했듯 언어가 곧 나라면, 나를 바꾸는 손쉬운 방법은 내 언어를 바꾸는 것일테다. 그런 애티튜드를 일깨워준 것이 내가 얻은 소득이라고 하겠다. 



2. 나의 '마지막 단어'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주었다.


자신만의 '마지막 단어'는 무엇인가? 책에 따르면 누구나 그 사람을 나타내는 단어 하나가 존재한다. 어쩌면 인간은 그 짧고 단순한 단어 하나를 남기고 떠나는지도 모르겠다. 간디는 '비폭력', 스티브 잡스는 '다름', 리처드 브랜슨은 '상상', 공자는 '인', 부처님은 '자비', 예수는 '사랑', 니체는 '아모르파티' 등이다. 한 사람의 세계관은 하나의 언어로 구성된다.


그럼 내 마지막 단어가 무엇일까. 후보를 적어본다


개성
초등학교 때 어딘가에서 '개성'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다. 이상하게 신이 났고, 이거다 싶었다. 개성있는 사람이 되겠다며 서울 가서 레게머리를 하겠다고 설치기도 했고, 학교에는 실내화 대신 고무신을 신고 갔다. 전교조 선생님이 운영하는 풍물패에 들어가 농사꾼 복장에 북을 치면서도 그 동네에서 비트박스 잘하기로 유명한 애였다. 하여간 좀 튀는 애이긴 했다. 

물론 나도 어디까지나 조선 땅에서 사회화를 거쳤다보니, 모난 돌에 정 때리는 미풍양속에 의해 적잖이 후두려맞았다. 어려서부터 날 봐왔던 내 친구들이나 은사님들은 내가 얌전한 직장인이 된 것에 실망스러워 하고, 그건 나 스스로도 그렇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내 색깔을 뚜렷하게 만들고싶고, 대체될 수 없는 나만의 캐릭터를 구축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서 내 나름대로의 투쟁을 한다.


이해

나는 무지와 무경험을 두려워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단순명료함이 아닌 복잡성에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 복잡한 면면을 하나하나 이해하게 될때마다 즐겁다. 

내가 생각하는 삶의 의미는 죽기 직전까지 계속 새로운 것을 이해하고, 그 이해로부터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90년대 미국 힙합에서 자주 등장하는 'Been there, Done that'이란 말이 있는데, 본래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산전수전 다 겪고 이렇게 성공했다"는 힙합 특유의 허세가 담긴 표현이다. 나는 뭐 성공에는 별 관심없고, 다만 내 마음대로 이 말의 뉘앙스를  '이것저것 다 해보면서 경험과 이해의 폭이 넓어진 사람의 프라이드'로 이해해본다. 그리고 그러한 'Been there, Done that'의 정신을 가진 늙은이가 되고싶다.



#4 이런 것이 별로였다.


1. 바쁜 현대인에게는 다소 한가한 소리

7가지 사전을 만들라고? 매일 하나씩만 나만의 개념정의를 해보라고? 좋은 조언이긴 하다만, 은퇴한 시니어들이라면 모를까 매일매일이 현실문제와의 투쟁인 나같은 젊은사람에게는 너무 한가한 조언이다. (물론 이 책이 무슨 실용서를 목표로 쓰인 책도 아닌데, 좋은 말 해주는 책에다 대고 엄한 투정부릴 생각은 없다.)


2. 어원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 그리고 말장난에 불과한 것들. 

'어원사전'을 만들라는 장에서 여러가지 단어의 어원을 설명해둔 부분은, 너무 부정확하고 무엇보다 웃기지도 않는 말장난들이 많았다.

米(쌀 미)를 파자하면 여덟 팔(八)자를 2개 겹쳐서 만든 것이라며, 쌀 한톨에 88번의 수고가 들어가서 그렇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책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그게 틀린 소리어서가 아니라(米는 벼 이삭에 쌀알이 붙어있는 모양을 본뜬 명백한 상형자이다) 너무 오그라들어서이다. heart는 he와 art를 합친 말이라며, '그 분이 주신 예술품'이란 뜻이라던지, together를 (설마설마 했는데) 'to+get+her'라는 뜻이라던지 하는 부분에서는 정말 징그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책은 전반적으로 꽤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했고, 저자에 대한 흠모도 어느정도 갖고 있었다. 이 부분을 읽기 전까지는.


3. 언어도 결국 레거시한 소통 방식

서론에서 토로했듯이, 나는 여러 사람들 중에 나 혼자만 유독 언어에 예민하고, 또 내가 여러 소통 수단 중 언어에만 예민한 것이 고민이다. 언어는 결국 쌍방을 전제로한 개념이다. 내가 언어를 잘 구사해봤자 상대방이 언어를 잘 이해해야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저자도 인정했듯이 사람들이 더 이상 글을 읽지 않고 영상으로 정보를 얻으려하며, 그 영상조차도 길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세상이다. 그러한 세태를 나무라면서 이 책을 읽는 독자라도 언어를 갈고 닦으라고 하는 것이 과연 좋은 조언일지 나는 모르겠다. 

삼사십년 전 어느 시점에서는 분명 "요즘 애들이 한자를 못 읽는다"라는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기존 언어체계의 수호자이자 기득권자들은 (이 책의 저자가 현재 그러듯이) 어린 세대에게 한자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한자를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은 2023년 현재 남들보다 우위를 점했나? 기껏해야 지나가던 문화재 건물의 현판을 읽으면서 몇초간 여자친구 앞에서 우쭐댈수 있따는 것 정도 뿐이 아닌가. 아무도 엑셀함수를 모르는 세상에서 나 혼자 엑셀함수를 잘 안다면 그것은 무기가 된다. 그러나 아무도 한자를 모르는 세상에서 나 혼자 한자를 아는 것은 말짱 헛빵이다. 언어란게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에서는 레거시한 소통수단인 언어에 대한 강조보다는, 영상이나 디자인 등 새로운 소통수단에 대한 강조가 더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5 기록해두고 싶은 구절들



다른 사람에게는 쉽게 찾아볼 수 없으면서도 그만의 독특한 컬러와 스타일을 담는 언어가 바로 '자기언어'이다. 자기언어는 곧 정체성이다.


자기 언어를 가질 때 비로소 자기 세계가 열린다. 다른 사람의 언어를 빌려 쓰면 내 생각도 타자의 생각에 종속되거나 기생한다. 


책이라는 것은 딱 내가 살아온 삶만큼만 읽힌다


내가 아는 언어만큼 낯선 세상이 열린다. 좋은 경치를 봐도 그 장면이나 풍광을 표현할 언어가 없으면 못 본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모르는 언어만큼 세상도 어둠에 갇혀있다. 


한 사람이 이제까지 없던 내용과 방식으로 사전을 만들고 있었다. 이 사전이 세상에 나온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전은 다른 사전과 다르게 첫 번째 항목이 '신'이 아니라 알파벳 순서를 따라 'atmosphere'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언어를 권위에 따라 배열하지 않고 알파벳 순서대로 평등하게 나열하겠다는 발상은 당시에는 상당히 위험한 것이았다. 지금부터 약 200여 년 전만 해도 지식의 주도권은 생산자나 유포자에게 있었다. 이것을 사용자가 쥘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위험한 사전을 통해 위험한 생각을 세상에 퍼트린 주인공이 바로 프랑스 사상가인 드니 디드로다. 그는 <백과전서> 편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개념정의가 바뀌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뀐다. 관점을 바꾸려면 먼저 언어 사용방식을 바꿔야 한다. 관점은 특정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는 방식, 즉 연상에 따라서 바뀌기도 하니까 말이다. 알다시피 제임스 다이슨은 선풍기에는 반드시 날개가 있어야 한다는 통념에 "왜 꼭 그래야 해?"하고 질문했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대답으로 날개 없는 선풍기를 만들었다.


지식은 정돈된 무식이고, 지혜는 성공보다 실패에서 많이 얻는 슬기


새로운 개념을 만나는 일은 그랜드 피아노를 집 안으로 들여놓는 과정과 비슷하다. 기존의 좁은 문으로는 그랜드 피아노를 집에 들여놓을 수가 없다. 어찌어찌 문을 통과했다 하더라도 그랜드 피아노를 놓은 공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문은 물론 집의 구조까지 바꾸어야 한다. 이전과 다른 괒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면 먼저 인식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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