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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즈 Jun 29. 2021

으른 입 맛의 초기 증상

숭늉을 믹스커피처럼 마신다면



여전히, 오늘 뭐 먹을까?



서른



 약 2~3년 전이던가.. 장오리 씨와 나는 처음으로 둘이서 함께 돌솥밥을 사 먹었다. 단순한 돌솥비빔밥이 아니라 갓 지은 찰밥으로 가득 찬 두터운 돌솥밥 말이다. 왠지 이런 식사는 연인보다 가족들과 먹는 게 더 익숙했다. 아빠와 함께 식당을 가야지만 맛볼 수 있는 메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수많은 메뉴 중에 굳이 돌솥밥을 고르고 내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이 음식을 먹었던 기억은 없다.



뜨겁고 묵직한 솥이 우리 앞에 하나씩 놓였다. 사각형 모양의 나무 받침대가 솥을 지탱했고 반찬 몇 가지와 찌개가 따라 나왔다. 돌솥을 함께 대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다행히 우리 둘 다 먹는 방법은 잘 학습돼 있었나 보다. 자연스럽게 뜨거운 솥 안의 찰밥을 퍼냈고,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불리기 위해 주전자 물을 부은 뒤 뚜껑을 덮었다.





 이렇게 퍼낸 찰밥은 나물 반찬을 곁들여 칼칼한 순두부찌개와 야무지게 먹었다. 신기하게도 찰밥에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칠맛이 느껴졌다. 밥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 맛있었다. 풀풀 날리는 쌀알이 아니라 진득하게 엉겨 붙는 느낌이 새로웠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이제 숭늉을 한번 먹어볼까~"라고 장난치며 불어난 누룽지를 벅벅 긁어냈다. 둘이서 누룽지를 함께 긁는 건 처음이라 그 광경이 마냥 재미있었다. 그런데 웬걸. 숭늉을 맛 본 장오리 씨와 나는 탄성을 질렀다. 이미 배부르게 식사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뜨끈한 숭늉이 몸속으로 퍼지는 기분이란..! 말로 표현하기가 참 어려웠다. 그저 "크아~~ 와 미쳤다."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날 이후 등산을 다녀온 어느 주말. 우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또 다른 솥밥 집으로 향했다. 다양하고 기깔난 메뉴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왜 굳이 솥밥을 선택했을까? 이날도 찬을 곁들여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뒤 마치 믹스커피를 마시듯 숭늉을 들이켰다. 밥이 뽀얗게 우러나와 그 자체로 구수한 물을 충분히 음미했다.



장오리 씨는 거의 솥에 얼굴을 묻고 연달아 숟가락질을 해댔다. 나 역시 그저 고개만 저으며 온몸으로 맛있다는 걸 표현했다. 개운한 배추김치를 얹어서 뽀얀 국물을 싹싹 비워냈다. 그리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감탄하는 중)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각자의 배를 두드렸다.






이걸 사 먹다니



 그날 이후, 속이 불편하거나 깨끗한 음식을 먹고 싶을 때면 나는 종종 누룽지를 끓였다. 심지어 돈을 주고 누룽지를 사서 부엌 한켠에 쟁여두기도 했다. 급할 땐 작은 그릇에 누룽지를 덜어 내고, 전기 포트로 물을 끓여서 뜨거운 물을 부어 부드럽게 불려 먹었다. 달달한 시리얼만큼 간편하고 맛도 좋았다.



추운 겨울날이면 엄마 아빠가 찬밥을 끓여 먹던 기억을 더듬어 찬밥을 팔팔 끓이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이라도 속이 더부룩한 날이면 누룽지를 불려서 밥 대신 맑은 숭늉을 마셨다. 순한 국물과 어울릴만한 저염식 채소 반찬을 만들거나, 냉장고 속 장아찌만 꺼내어 간단히 곁들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 음식을 찾는 횟수가 점점 늘어갔다.




누룽지를 사 먹게 될 줄은 몰랐지.....
슴슴하지만 향이 좋은 당근 라페
저염 반찬 (생 올리브와 당근 절임)





호기심 온 더 테이블



서른 하나



 분명 이전 같았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음식이다. 식비로 누룽지를 소비한다는 것 자체가 소소하지만 흥미로운 변화였다. 아침에 즐겨 먹던 달콤한 시리얼을 찾는 횟수도 줄었다. 정말 어른 입맛이라는 게 따로 존재하는 걸까? 정녕 음식을 고르는 취향도 나이테에 비례해 골이 깊어지는 걸까. 동갑내기인 장오리 씨와 나는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을수록, 몸이 원하는 음식도 변해 간다는 걸 어렴풋한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몸이 편안한 음식, 입이 즐거운 음식, 식탁 위에 풍요로운 이야기를 더해 주는 음식까지.. 이렇게 식탁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놓인 시간을 바라보는 일이 새삼 즐겁다. 낯설지만 어른들이 공유하는 맛을 하나둘씩 발견해나가는 재미도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 만나 함께 식사를 할 때면 우리는 여전히 고민한다.



오늘은 뭘 먹을까?


이전과 변함없이 오늘의 메뉴를 고민하지만 조금씩 천천히 변하는 식탁을 바라보며 어른들이 공유하는 맛이 더욱 궁금해진다. 세상 구경하는 즐거움에 취해 십 대 이십 대 때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그런 맛. 숭늉보다 더 어른스러운 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려나?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식사를 할까?


다양한 사람들의 식탁도 빼꼼 들여다보고 싶었다. 나이에 관계없이 다른 사람들은 어떤 가치관과 어떤 방식으로 그릇을 채우고 있을까. 아무튼 이런 호기심은 앞으로 우리가 꾸려갈 식탁에게 질문을 던진다.



천천히 마흔을 향하기 시작한 우리. 앞으로 어떤 음식을 찾게 될까.




무엇을 먹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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