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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덕 May 15. 2024

인도네시아 정착 초기

일요일에는 자카르타 시내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목사님과 교인들이 처음 나온 우리를 반겨주었다. 낯선 나라에서 한국 사람들을 보니 모두 친근하게 느껴졌다. 믿지 않았던 사람도 외국에 가면 교회에 다니게 된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배가 끝난 후 점심을 먹으면서 교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억나는 것은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하면서 알아 두면 좋은 그러한 이야기들이다. 그중 하나가 물에 대한 것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절대 수돗물을 먹으면 안 된다. 심지어 양치질할 때에도 수돗물을 사용하면 안 된다. 물에 석회질이 많이 있어서 나중에 치아가 모두 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양치질할 때 생수를 사용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아쿠아’라는 상표의 생수가 가장 무난하다고 해서 아쿠아를 사용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아쿠아도 못 믿겠다고 했다. 오래 있으면 물통 안에 침전물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후 우리는 정수기를 사용했다. 그런데 한인 중에는 정수기마저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한국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인도네시아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그중 하나는 가사 도우미와 운전기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인도네시아 생활의 행과 불행은 가사 도우미와 운전기사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였다. 인도네시아 한인들은 대부분 가사 도우미와 운전기사를 고용하고 있어서 두 사람을 잘 만나면 행복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는 얘기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도우미를 ‘뻠반뚜’라고 하는데,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저렴한 비용으로 도우미를 고용할 수 있어서 어떤 집은 도우미를 서너 명씩 고용한다. 빨래와 청소를 하는 도우미, 어린아이를 봐주는 도우미, 요리를 해 주는 도우미, 정원을 관리해 주는 도우미 등 다양하다. 문제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 때문에 도우미와 갈등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마음에 맞는 도우미를 만난 한국인 주부는 인도네시아에서의 생활을 매우 행복하게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운전기사도 마찬가지이다. 오랫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운전기사를 고용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자가운전은 위험하니까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데다가 차들이 대부분 선을 지키지 않아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도네시아에는 도로가 많지 않고 좁아서 차들이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게다가 차 사이를 곡예하듯 빠져나가는 오토바이들은 종종 운전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상황이 이러니 처음 인도네시아에 정착하게 된 한국인들은 대부분 운전기사를 고용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도 처음에는 운전기사를 고용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어를 모르니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르므로 불편한 일들이 종종 생긴다. 물론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이러한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다. 그리고 고의로 나쁜 짓을 하지 않는 한 기사는 대체로 많은 도움을 준다. 인도네시아어와 인도네시아 문화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무슨 문제가 생길 때 해결사 역할을 해 주기도 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기사는 운전하고 나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쾅 소리가 났다. 오토바이와 운전자가 차 앞에 쓰러져 있었다.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토바이 운전자는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기사 말에 의하면, 오토바이가 유턴하려고 2차선에서 1차선에 있는 우리 차 앞으로 갑자기 들어왔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더니 기사는 나에게 차에서 나오지 말라고 하면서 돈 10만 루피아(만 원 정도의 금액)만 달라고 했다. 나는 그것 가지고 될까 했더니 일단 달라고 했다.

기사는 오토바이 운전자를 부축해서 도로 옆에 앉히고 오토바이도 옮겨주었다. 그는 다시 내 차로 와서 구급약을 꺼내 갔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타박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돌아온 그는 나에게 10만 루피아를 돌려주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 오토바이 운전자가 돈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본인의 과실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직접 운전하다가 그랬다면 상황은 좀 달랐을지 모른다.

인도네시아 한인들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온 한국 여성들은 두 번 운다. 인도네시아에 처음 올 때 울고 귀국할 때 두 번째 운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편을 따라 인도네시아에 도착하자마자 주변 환경에 실망해서 울다가 인도네시아를 떠나게 될 때는 떠나기 싫어서 운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한국인 주부들은 도우미와 운전기사 덕분에 한국에서는 누리기 힘든 여유를 즐기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잘 정착하기 위해서는 집도 잘 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학교 숙소에서 생활하면서 수업이 끝나고 나면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집이 마음에 들면 집 값이 너무 비쌌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해외 대학에 객원교수를 파견하면 대학에서 객원교수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는 숙소를 제공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해서 재단에서는 나에게 집값으로 월 300달러를 주었다.

당시 많은 한국인이 자카르타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아파트를 알아보기도 했으나 가격이 너무 비쌌다. 그리고 학교까지 오고 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려서 학교 근처에 집을 얻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마침 학교 근처에 있는 <쁘소나 카양안>이라는 주택 단지를 학과장 교수가 소개해 주었다. 우리는 몇 군데 돌아보다가 마음에 드는 집을 구했다. 2층집인데 깨끗하고 넓었다. 값은 월 50만 원 정도였다. 당시 한국의 원룸 가격 정도여서 싸다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집을 구할 때 보통 1년 단위로 계약한다. 그리고 입주하기 전 1년 치를 한꺼번에 지불해야 한다. 계약 기간이 길면 싸게 해 주기도 한다. 우리는 2년 계약으로 집을 빌렸다. 그리고 집을 구한 지 얼마 후 한국에서 보낸 이삿짐이 부두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리는 학교 숙소에서 새로 계약한 집으로 이사했다. 배가 도착했다고 하니 곧 짐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삿짐을 찾기 위해서는 노동허가서라는 서류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삿짐센터에서는 한국에서 짐을 부칠 때부터 이 사실을 강조했다. 많은 사람이 이 서류를 받지 못해 벌금을 낸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인도네시아에 오기 전부터 학교에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서류는 그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런데 2주 정도 기다려도 서류는 나오지 않았다. 급기야는 과태료가 부과되었다. 이삿짐을 기간 내에 찾아가지 않으면 보관료도 내야 했다. 학교에서는 서류가 곧 나올 것이라고 했지만 나오지 않았고 지불해야 할 보관료는 점점 더 많아졌다. 무엇보다 이삿짐 없이 지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할 수 없이 벌금과 보관료를 내고서 이삿짐을 보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튿날 바로 그 서류가 나왔다. 고의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당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이삿짐이 오고 나니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제일 반가운 것은 침대였다. 그동안 침대 대신 캠핑용 고무 튜브를 사용했었다. 너무 불편했다. 나중에 물놀이 갈 때 사용할 생각으로 샀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튜브가 심하게 움직여서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았다. 꼭 피난살이하는 기분이었다.

학과장 교수는 집에 도착한 이삿짐을 보고 무슨 짐이 이렇게 많냐고 했다. 한국에서 짐을 많이 버리고 왔는데도 그랬다. 침대, 책장, 책상, 약간의 주방 기구, 그리고 책만 실었는데도 컨테이너에 가득했다. 무엇보다 책이 많았다. 인도네시아에 한국 관련 책을 기증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학과장 교수는 우리가 이민 온 것 같다고 했다. 사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갔었다. 물론 2년 계약이 끝나면 귀국하거나 다른 나라로 가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능하면 인도네시아에서 제2의 인생을 꾸려보고 싶었다. 아내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아내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나와 달리 집안 살림을 해야 해서 현지인과 직접 상대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가면 또 그 나라의 말을 배워야 하고 새롭게 적응하느라 애써야 하기 때문에 싫다고 했다.

나 역시 다른 나라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인도네시아에서 오래 살고 싶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힘들게 살면서도 느긋하고 친절한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다. 화를 내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이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도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한다.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사는 동안 나의 급한 성격을 바꾸어 보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1시간이나 늦게 오는 기차를 기다리면서도 짜증을 내기보다는 그 시간에 인도네시아어 단어를 즐겁게 외웠다.


                                    인도네시아대학교에 근무할 때 살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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