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9.13
처음엔,
홍생수의 영화는 어쩐지 특정한 '과'들이 보는 것 같아서 꺼렸는데 몇 년 전 채널을 돌리던 중 케이블 티브이에서 우연히 보게 된 '잘 알지도 못 하면서'를 시작으로 요즘엔 신작도 기다리는 둥 꽤나 심취하고 있다.
나는 이전 포스팅에 이미 찌질이들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는데, 그래서 그의 영화를 재밌게 보는 것인가?
몇 가지를 생각해봤다.
내가 본 몇 안 되는 홍생수의 영화들은 몇 가지 큰 축을 중심으로 한 상황극 정도로만 보이는데 초기작은 모두 스킵했으므로 나는 그와 그의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고, 그러니 작품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지만 경솔하게 몇 자 적는다.
일단은, 나는 그냥 재미로 본다.
영화의 대사나 인물의 행동 등에 크게 의미를 두지도 않는다.
내가 본 영화들은 무언가 여지를 남기고 다니는 여주인공과 거기에 바보같이 홀리는 주변 남자들의 행동과 반응이 주된 소재였는데, 인물들의 대사나 상황이 꼭 어디서 본 것만 같은 기시감을 줘서 재밌었다.
흔히들 홍생수 영화에 찌질이들이 대거 등장한다고들 하더라만, 내가 느끼기엔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그냥 보통의 사람들이다.
홍생수는 모두가 찌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단지 그걸 그대로 보여 주는 것 아닐까.
온전히 사람이 찌질해서가 아니라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찌질이가 되기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비슷한 인물(연령대나 직업도 늘 고만고만)들로 꾸려나가는 내용들도 자기 작품들 안에서 항상 클리셰로 돌아다니는데 나에겐 그런 면 자체로 웃음 포인트다.
할욱희 할아버지나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도 좋아하는데 마찬가지로 본인들 작품 안을 떠도는 키워드들이 있다. 그런 걸 찾아내는 것이 재밌다.
결국 나도 내가 꺼림칙하게 여겼던 그런 '과'가 되어 버렸는지도.
여담으로,
작년에 영상자료원에서 진행한 '다른 나라에서'의 GV프로그램에 운 좋게 끼어들게 됐는데 그때 사람들의 질문이 어마어마했다.
다들 굉장히 열심히, 온몸으로 영화를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들 같았다고 해야 하나.. 뒷목이 좀 뻣뻣해져 오는 그런 분위기.
기억나는 질문은, '극 중 이자벨 위페르의 원피스 색이 초록이던데요, 잦은 술자리 장면과 함께 소주병을 연상케 하는 거 같았는데 뭐 다른 복선을 위한 소품이었나요?'
조금 현기증이 났다.
나도 괜히 홍생수 감독에게 뭔가 말을 하고 싶어서 생각해둔 질문이 있었지만 왠지 부끄러워서 생각으로만 그쳤다.
(영화와 전혀 상관이 없는, 질문도 뭣도 아닌 개인적 요청이었다.)
난 사실 홍생수 영화의 여주인공 같은 여자를 알고 있는데 그 여자가 생각나서 더 재밌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