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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하는리타 Aug 20. 2021

사치하고 싶은 날은 사치스러운 술을 : 닷사이

돈 쓰는 방법도 가지가지

이야기의 시작과 발단


닷사이 이야기를 하려면 일단 6월 4일에 있었던 일을 말해야 한다. 그 일이 없었다면 닷사이를 마시지 못했을 테니까. 6월 4일은 동반자가 나에게 자전거를 두 번째로 가르쳐주는 날이었다. 이미 더위가 시작된 6월 초, 자전거를 배우느라 땀 흘릴 나와 뒤따르느라 땀 흘릴 동반자를 위해 편의점에서 물과 이온 음료를 샀다. 나무 한 그루를 빙 두르는 원 모양의 벤치에 짐을 두고 여의도 공원 공터에서 교육을 시작했다. 


40분가량 자전거를 타고 쉬기 위해 벤치로 돌아왔다. 동반자가 짐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휴대폰이 없어졌다. 가방을 뒤집을 기세로 탈탈 털어보고, 자전거 바구니에 있나 싶어 들여다보고, 바닥에 떨어뜨렸나 해서 공터를 몇 바퀴 돌았다. 휴대폰이 없다. 동반자는 가방 안쪽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어뒀다고 했다. 누가 훔쳐간 게 분명하네, 굳이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걸 빼낸 거 보니. 동반자는 확신했고 나는 의심했다. 정말 가방에 넣어놨어?


동반자는 '분명히'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했지만 나는 심리학 전공자로서 기억이 밥 먹듯 거짓말한다는 걸 안다. 동반자는 깊게 신뢰하지만 동반자의 정신머리는 믿지 않는다. 구글로 위치 추적을 해서 잡히는 마지막 위치는 여의도 공원 어딘가였다. 우리가 간 적이 없는 쪽이었지만 동반자는 자전거를 타고 그 주위를 몇 바퀴씩이나 돌았다. 이러려고 빌린 따릉이가 아니었는데.


이야기의 절정과 결말


동반자가 휴대폰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동안, 들떴던 내 기분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혼자 연습이나 하자는 생각에 공터로 나갔다. 나는 자전거로 직진만 할 수 있었다. 꽤 긴 거리를 타고나니 눈앞에 짧은 내리막길이 보였다. 가속도가 붙어도 곧 평지가 나오니 자연스럽게 멈출 수 있지 않을까? 오산이었다. 가속도는 예상보다 크게 붙었고 쫄보가 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른쪽 무릎이 시멘트 블록에 세게 부딪혔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몇 분 간 무릎을 부여잡고 있다가 벤치로 돌아왔다. 나 넘어졌어. 대수롭지 않은 줄 알았건만 무릎은 점점 부어올랐고 나는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황망한 두 사람이 여의도 공원에서 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우리는 종로로 넘어갔고, 중간에 을지로에 들러 정형외과에서 진료를 받았다. 무릎에 금이 간 건 아니라고 했다. 물리치료를 받고 계산한 병원비는 7만 원이었다.


단골 이자카야까지 가는 사이 동반자의 휴대폰으로 숱하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동반자는 늘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둔다. 딱 한 번만 더 전화해보자. 스피커폰으로 해두고 기대 없이 전화를 걸었다. 젠틀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동반자는 펄쩍 뛰며 내 휴대폰을 들고 이자카야 밖으로 나갔다. 돌아온 동반자의 얼굴이 밝았다. 편의점 휴지통 위에서 주우셨대. 거 봐라, 뭐가 분명히 가방에 넣어놨는데야. 타박을 하건 말건 휴대폰을 되찾은 동반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 닷사이 나옵니다


습득하신 분은 여의도 근처인 대방동에 거주하는데, 거주하는 아파트 경비실에 휴대폰을 맡겨두겠다고 하셨다. 휴대폰은 다음 날 찾았고 그제야 진심으로 안도한 동반자는 오늘 사치를 하리라 선포했다. 새 휴대폰 살 돈을 아끼게 되었으니 기분을 내도 된다는 기적의 논리였다. 쭈구리 같던 동반자가 생기를 되찾은 게 기뻤던 나는 그렇게 하라며 내버려두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참치가 포함된 모둠회를 주문했다. 동반자는 백화점 주류 코너를 기웃대다 닷사이 2병을 사 왔다.


우리가 마신 닷사이는 정미율 45%와 39%였지만, 사실 닷사이는 극한의 정미율 23%의 쌀로 빚은 니와리삼부로 유명하다. 정미율이 23%라는 건 쌀 한 알의 77%는 깎아내고 쌀눈에 가까운 23%로만 술을 빚었다는 의미다. 정미율이 50% 이상만 되어도 일본주 최고 등급인 다이긴죠인데, 23%라니! 니와리삼부는 아니지만 우리가 마신 2병의 닷사이도 모두 높은 정미율에 쌀과 누룩으로만 맛을 낸 준마이 다이긴죠였다.


쌀을 씹을 때 느껴지는 단맛은 앞서 말한 쌀눈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쌀눈 주변부를 깎아내는 비율이 높을수록 술에서 맑은 단맛이 느껴진다. 고급 일본주를 마신 건 처음이었는데, 어릴 때 산에서 마셔본 약수의 맑은 맛이 느껴서 깜짝 놀랐다. 숲이나 돌을 떠올리게 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청량한 맛이 난다. 생각보다 많이 달고 술의 질감이 미끄럽다. 쌀의 끈기가 술이 되면 이런 느낌을 주는 건가 싶다. 마시고 난 뒤에 입에 남는 달착지근함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냥, 사치하고 싶은 기분이 들면


커피, 술, 차 등 음료라는 건 사치가 끝이 없는 분야다. 동반자 왈, 오래 묵은 위스키가 비싼 이유는 해가 갈수록 오크통에 남는 술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란다. 대신 남은 술이 품고 있는 향이며 맛은 엄청나게 응축되어 보통 십몇 년 어쩌고 하는 위스키는 맛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닷사이를 만드는 아사히주조는 준마이 다이긴죠급만 출하하는, 평균 정미율 41%를 자랑하는 고급 일본주 주조 회사다. 평균적으로 쌀의 3분의 2 가량을 버린 다음에야 술을 만든다니. 그야말로 돈 쓰고 싶은 날 제격이 아닌가.


차지게 숙성된 각종 회를 안주 삼아 고급 일본주를 마시며 우리는 새 휴대폰이 필요 없게 된 것을 축하했다. 새 휴대폰은 몇십만 원이지만 이들은 다 해도 20만 원 정도라는 기적의 논리가 다시 한번 등장했다. 그래, 주식이 오르거나 로또에 당첨되었거나 연봉이 올랐을 때만 사치할 수 있는 건 아니지. 가끔은 불행이나 불운을 피한 것만으로 기뻐해도 된다. 휴대폰을 잃어버렸지만 되찾았을 때나, 크게 넘어져 절뚝거릴 만큼 아프지만 뼈가 부러진 건 아니었을 때. 그런 날 괜히 사치하고 싶은 기분이 들면 비싼 술을 마시는 것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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