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뷰하는리타 Sep 30. 2021

등장인물로 주변 인물 이해하는 법

저 새끼는 왜 저럴까 싶을 때, 문학을 권합니다

※장문주의


지독한 내향인의 삶


내향인은 어렵게 산다. (한국에서만 살아봐서 그런지 몰라도) 대한민국에서는 더 어려운 것 같다. 힘든 시간을 혼자 정리하는 사람에게 '나가서 사람 좀 만나고! 산책이라도 좀 하고!'라는 말을 조언이랍시고 하는 문화, 숫기가 없으면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처럼 보는 시선, 끊임없이 활발하게 무언가를 하라고 독촉하는 사회 분위기 따위가 내향인을 힘들게 만든다. 물론 내향적인 기질을 가졌더라도 훌륭하게 사회화에 성공하는 사람도 많다. 본인이 말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밖에서 에너지를 뿜고 다니는 내향인도 있다. 존경스럽고 대단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아니다. 전혀 아니다. 내향인으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기질이 심화되어 내향적인 데다가 내성적(속에 있는 생각을 말로 잘 내뱉지 않는)인 사람으로 완성된 경우다.


어린 시절에는 주체하지 못할 에너지 탓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외향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지만 기질은 바뀌는 게 아니니 어릴 때부터 내향적이었겠지 싶다. 양육자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책 보는 걸 좋아하고 고집이 세고 생떼가 심한 아이였다고 한다. 책을 좋아해서 교우관계에 무심했는지, 고집이 세고 생떼가 심해서 교우관계가 어려운 탓에 책을 파고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절친한 친구는 만들지 못했고 책만 보고 또 봤다.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진한 우정의 맛을 알았는데, 초등학교 시절 훈련량이 부족해서인지 말을 지지리도 못 했다. 듣기만 하거나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었고 억울하면 갑자기 울었다. 억지로 꺼낸 요령 없는 말이 실수가 되어 돌아오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경험을 반복하자 결국 나는 낯선 사람 앞에서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를 만나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니, 서툰 의사소통 방식을 이해해주는 오래된 사람들이 아니면 항상 불편했다. 불편함이 싫어 낯을 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피해 다녔다. 사람을 대하는 일은 나날이 힘들어졌다. 나이 들수록 실수의 허용 범위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더욱 버거웠다. 그래서 가급적 모난 곳 없이 딱 맞는 사람들만 만났다. 실수해도 괜찮고 대꾸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그런 사이. 하소연을 들어줄 정도로 친한 사람. 비슷한 의견을 나누고 비슷한 지점에서 행복을 느끼며 비슷한 사건에 분노하는, 정확히 내가 원하는 반응을 해주는 상식선이 비슷한 사람. 선택의 결과는 당황스러웠다. 나는 내향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에서 "왜?"와 "이해가 안 되네."를 달고 사는 화 많은 내향인이 되어 있었다.


분노는 대부분 이해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전화번호도 남기지 않고 내 차 앞을 가로막은 트럭을 마주치면 화가 난다. 나와 상식이 다른 트럭 운전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인이 양다리를 걸치다가 들켜 헤어지게 되었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도 화가 난다. 바람피우지 않아야 한다는, 적어도 관계를 청산한 다음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기본 상식도 없는 친구의 전 애인이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20대 중반 무렵부터 이런 분노를 하루에도 열두 번씩 겪었다. 상식이 다른 타인을 이해하지 못해서 화병을 앓았다. 세상을 사는 기준이 엄격하고(이건 안 되지, 그건 아니지.), 앞뒤가 안 맞으면 못 참으니(저번에는 괜찮다고 했으면서 왜 이번에는 별로라고 말하지?) 이해하지 못할 주변 인물이 넘쳐났다. 누군가의 잘못에 쉽게 기분이 나빴다. 누군가의 실수는 상황보다 단점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 지었다. 그런 잘못을 저지르다니, 저런 습관이 있다니 하면서 눈살을 찌푸릴 때마다 마지막 문장은 늘 같았다. 진짜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돼! 


화가 많은 내향인은 그냥 내향인보다 더 어렵게 산다. 이해가 안 되고 화가 나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만약 오해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먼저 손을 내밀지도 못한다. 갈 곳 없는 '도대체 왜?'라는 의문 아닌 의문만이 끊임없이 떠오를 뿐이다. 분노를 잠재울 방법은 뒷담화와 손절뿐이었다. 내 상식을 번번이 벗어나는 지인이 있다면, 억지로 이해하거나 맞춰주기보다 인연을 정리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회사 동료나 상사 등 일방적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관계라면 뒷담화로 분통을 터트렸다.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러려니 내버려 두는 게 낫고, 포기하면 편하다는 마음을 먹으려 애썼다. 한바탕 뒷담화를 마치면 조금 개운한 것도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첫 이직을 했지만 사회초년생이라 이렇다 할 커리어는 없을 때였다. 확실한 시도와 성과를 갖고 싶다는 마음에 갖가지 기획을 해봤다. 상사는 팀 회의 시간이면 너무 좋은 아이디어라며, 우리 꼭 해보자며 물개 박수를 쳤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실행을 위한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다. 특히 비용이 필요한 일은 대표의 컨펌을 받아야 하는데, 그 무엇도 보고하지 않았다. 나는 불만스러운 마음을 티 내기 시작했다. 별 다른 반응조차 않던 상사는 슬슬 귀찮았는지 '조용하게 다니면 한없이 좋은 직장인 이곳에서 일 벌이지 마라'라고 대꾸했다.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상사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왜 저러고 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상사를 몇 개월 간 들이받다가 결국 거하게 하극상을 벌였다. 보신주의로 수년 간 자기 자리를 지켜온 상사와 입사 1년도 안 된 내가 싸움이 될 리 없었다. 마지막까지 스스로 그만두게 하려는 온갖 계략이 있었으나 권고사직으로 마무리됐다. 


하극상을 벌인 건 나지만 난생처음 권고사직을 당해보니 마음이 힘들었다. 내가 회사에서 잘렸다니? 실업급여를 받으며 다음 일자리를 알아보면서도 지독한 회의감에 빠졌다. 사회생활이 젬병이니 어딜 가나 똑같지 않을까. 얼굴을 붉히지 않고 뜻이 다른 사람과 일할 수 있을까. 앞으로 만나게 될 상사는 다르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이런 고민을 하면서 애매한 태도로 다음 직장을 찾는 둥 마는 둥 하며 매일을 흘려보냈다. 당시는 독서 암흑기라 시간이 많아도 책을 거의 읽지 않을 때였다. 마냥 놀기도 지겨웠던 어느 날 쌓아둔 책 중 하나를 읽었다. (도서정가제 시행 직전, 출판계 전체가 광란의 할인을 벌인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사놓은 책은 정말 많았다.) 바로 인생 책이 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네 등장인물의 복잡한 사정,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서술자로 나선 밀란 쿤데라의 통찰이 가득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분노로부터 나를 해방시키는 첫걸음이 되었다.


시시콜콜 요정이 있는 소설의 세계


현실에서는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행동의 이유를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술잔을 기울이며 오해가 있는 사람과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나눌 기회도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다. 앞뒤 전후 사정을 파악하는 일은 언제나 셀프였다.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를 아무리 맞춰봐도 상대를 이해하지 못해 속상하고 화가 났다.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저 사람에게 사실 이런 사정이 있다고, 나에게 심하게 군 이유가 따로 있었다고 시시콜콜 설명해주는 요정이라도 있었으면 나았을까. 내가 마음이 상하고 잠을 못 이룬다는 사실도 저 사람에게 대신 알려준다면 뭔가 변할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독서 암흑기를 뚫고 오랜만에 펼친 소설의 세계에 내가 찾던 시시콜콜 요정이 살고 있었다. 어떤 인간이 이상하게 행동하는 이유를 낱낱이 밝혀주는 존재 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시는 테레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밥 먹듯이 바람을 피우는 남자다. 밀란 쿤데라는 토마시라는 이상한 남자가 외도를 저지르는 맥락을 설득력 있게 적어놓았다. 외도 상대를 만나러 가는 남자는 당연히 흥분되고 즐거운 상태일 것 같은데 이야기 속 토마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테레자와의 관계성도 토마시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데 기여했다. 내가 나 자신으로 사는 데 방해가 되지만 깊이 사랑하는 사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4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여자 사냥을 멈추지 않는 토마시, 신분 상승을 꿈꾸는 테레자, 무엇이든 쉽게 배신하는 사비나, 여자에 집착해 아내를 버리는 프란츠. 현실에서 만났다면 험한 욕을 퍼부으면 퍼부었지, 절대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못했을 인물들이다. 하지만 마음의 밑바닥을 헤집어 보여주니 이들도 이해 못할 것 없는 사람이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특별한 경우인 건 아니다. 소설의 세계는 대부분 다층적이고 구체적이다(불친절하게 풍경, 심상만 묘사하거나 독자의 뒤통수를 때리는 게 목적인 소설도 있지만 예외적인 경우다). 평면적인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은 훌륭한 작품이 되기 어렵다. 악하기만 한 악당이나 가련하고 선하기만 한 주인공은 재미도 감동도 없는 이야기를 만든다. 그래서 악당에게도 슬픔을, 영웅에게도 비열함을 부여해 인물이 가진 특성을 여러 겹으로 쌓아 입체적으로 빚는다. 작가는 이렇게 빚은 등장인물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데 인색하게 굴지 않는다. 오직 언어로 소개하는 인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면 설득력과 개연성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들은 독자가 등장인물의 행동을 이해하며 따라갈 수 있도록 대사, 행동 묘사, 심리 상태 등 다양한 단서를 최대한 자세히 설명한다. 이러한 맥락 단서들이 풍부하게 제공되기 때문에 현실에서 만났다면 반감만 불렀을 인물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시콜콜 요정이 등장하는 소설의 세계에 들어갔다 나오는 경험은 그 무엇보다 확실한 경험치를 줬다. 사람이 무서운 내향인으로 나고 자란 탓에 직접 쌓은 경험치는 보잘것없었다. 오히려 소설의 도움을 받아 온갖 인간군상의 심연을 들여다본 이후, 예전에는 앞모습 밖에 몰랐던 주변 인물의 옆모습과 뒷모습을 상상하는 능력을 얻었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뒤 권고사직의 맛을 보여준 상사를 떠올렸다. 한 회사에 오래 있었는데 제대로 된 역할 없이 떠다니는 스스로가 불안했겠지. 나서서 팀장을 맡는다고 한 것까진 좋았는데 팀원 하나하나가 다 호락호락하지 않고 자꾸 일을 만들어서 하려는 인물들이었으니 놀라기도 했을 거야. 본인도 대표가 무섭고 눈에 띄기 싫은데 자꾸 컨펌 받아오라고 보내는 게 얼마나 불편했겠어. 권고사직이 쌓이면 회사에 페널티가 되니 내 입으로 그만두겠다는 말이 나오게 살살 긁은 것도 말은 되는 행동이네. 상사 역시도 맥락을 살펴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잘했다거나 나라도 그랬을 거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인간은 경험한 만큼 자신의 세계를 넓혀간다. 부모가 되어봐야 내 부모님의 마음을 안다는 말처럼 많은 사람이 꼭 찍어먹어 본 다음에야 누군가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입장을 직접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범죄자가 왜 범죄를 저지르는지 알기 위해 범죄자가 되어봐야 할까? 남자를 이해하기 위해 여자인 내가 남자가 되어볼 수 있을까? 양부모님이 모두 계신데 홀어머니 아래 자란 사람의 삶을 경험할 수 있을까? 모두 불가능하다. 경험으로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의 사고방식에 가까이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은 이러한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상하다고 치부할 인물도 속마음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서술을 읽고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면 대부분의 행동을 납득하게 된다.


반감을 부르는 등장인물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경험은 이후에도 반복됐다. 애인이 있는 여자에게 끊임없이 집착하는 남자의 심리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이해했다. 소아성애자의 역겨운 자기 합리화 과정은 <롤리타>를 보고 알게 됐다. 당연히 공감하거나 응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행동하고 범죄를 저지르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또 개성을 찾는 여정인지 광기에 몰두하는 여정인지 알 수 없는 예술 하는 마음은 <달과 6펜스>에서 엿볼 수 있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살의를 느끼는 것과 살의를 실행하는 사람의 사정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주변에 민폐만 끼치는 인물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악인에게도 서사가 있었다. 탐사 보도 프로그램이나 뉴스에서 보던 인물에게도 비정상적으로만 보이는 행동의 근거와 사건 전후의 삶이 있었다.


소설, 그중에서도 세계문학


오해를 살까 걱정되어 다시 강조하지만 소설을 읽는 의의는 이해 안 되는 존재들을 이해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오직 나의 평안한 일상과 안녕한 마음 상태를 지키는 데 있다. 소설을 읽고 등장인물의 삶과 사고에 깊이 잠겨 드는 경험은 마음의 항상성 유지에 도움을 준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며 평소처럼 분노하기 전에 '어쩌면 이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며 (아마 누락된 게 분명한) 맥락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주변 인물의 옆모습과 뒷모습을 상상하는 능력과 같은 말이다. 거듭해 읽다 보면 얻게 되는 이 능력은 내가 보는 게 일부분이고 전체의 모습은 따로 있으리라는 당연한 사실을 상식으로 장착하게 되는 순간, 갑자기 생긴다. 이후에는 오직 자신의 사고력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을 포기하거나 일시적으로 감정을 배설한 후 얻는 평화가 아닌, 진정한 이너피스innerpeace 말이다.


소설 선택은 자유지만 취향이 따로 없다면 각종 메이저 출판사에서 나오는 세계문학전집에 속하는 작품을 권하고 싶다. 유명하고 오래되어서가 아니다. 세계문학전집은 숱하게 많은 문학 작품 중에서도 전문가들이 오래 살아남아 읽힐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작품들로 구성된다. 비현실적인 상황, 극단적인 성격,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얼핏 무리해 보이는 설정도 작가의 능력으로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특이한 상황이나 인물을 설정해놓고 '우연히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거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의존하는 소설은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될 만큼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몰입도가 깨지기 때문에 믿고 읽을 수 있는 소설로 시작하는 게 좋다. 전집 속 작품이 문학사에 남긴 의의, 전집에 포함된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독자에게 '이 이야기는 말이 안 된다'라고 느끼게 하는 작품은 없다고 봐도 된다.


세계문학을 읽는다고 해서 너무 경외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 세계문학에는 의외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부분도 많이 있다. 과거에는 글자 수 단위로 원고료를 지급했기 때문에 엿가락처럼 분량을 늘리느라 애쓰기도 했다. 글을 써서 먹고살았던 작가들의 작품이 특히 그렇다. 그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빚을 갚기 위해 한 달 만에 갈겨쓴 작품도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어 있다(도스토예프스키는 악마의 재능을 가진 작가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쓴다). 문장 하나하나에 대단한 의미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공부하듯 세계문학을 읽으면 지친다. 작가도 인간이라 모든 문장에 심혈을 기울이지는 못한다. 게다가 우리는 작품을 분석하고 논문을 쓰려는 전문가가 아니다. 편하게 읽으며 와닿는 부분이 있을 때 놓치지 않고 나의 간접 경험치로 전환하면 충분하다. 재미가 없고 어려운 작품을 골랐다면 중단하고 다른 작품을 읽으면 그만이다. 그 소설이 아니더라도 좋은 작품은 많다.


앞으로 이어질 글에서는 세계문학을 읽으면서 직접 겪어보기 어려운, 그래서 이해하기도 어려웠던 몇 가지 상황에 가까이 다가갔던 경험을 적으려고 한다. 살면서 자주 마주치지만 선뜻 이해한다고 말하기 힘든 상황과 인물을 다룬다. 앞서 언급한 작품 외에도 성폭력을 저지른 남자, 아내의 사촌을 사랑한 남자,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 등이 등장한다. 각 작품의 등장인물은 멀리서 보기엔 그냥 이상한 사람, 미친 사람, 나쁜 사람이다. 혹은 그냥 배에 타고 있는 사람, 길을 걷고 있는 사람,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소년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작가가 공들여 적어둔 그들의 자세한 사정을 들여다보고 맥락을 파악하는 게 우리의 목표다. 각자의 맥락을 살펴보면 이 세상에는 이상하지만 슬픈 사람, 미쳤지만 천재적인 사람, 나쁘지만 우울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다음부터는 일상에서 화가 날 일이 급격히 줄어든다. '이해가 안 돼' 대신 새로운 말버릇이 생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도,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짜증스럽다면 세계문학을 읽어보자. 길을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선 앞사람과 부딪쳤을 때, 짜증 대신 앞사람 시선이 닿는 곳에 걸음을 멈추게 만들 정도로 멋진 석양이 있다는  발견하는 능력이 생긴다. 공로를 가로채는 직장 동료를 좋아하게 될 순 없지만 부족한 그의 능력을 측은하게 여기는 넓은 마음도 갖게 된다. 고속도로에서 미친듯이 차선을 바꾸며 질주하는 차를 보고 '급똥 왔나'하는 여유로움까지 장착된다. 직접 겪어보지 못한 유형의 진상과 악당을 미리 피해가게 되는 제3의 눈을 얻는 건 덤이다. 한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간 혐오에 빠져 살던 내향인의 경험담이니 믿어도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