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다원 Oct 09. 2023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사회에 발들인 첫 일터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겨울방학. 

한국전자기술연구소가 구미공단에 있었는데 그곳에 친구랑 둘이 취업을 해서 방학 동안을 다니게 되었다. 계속 다녔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같이 갔던 친구는 계속 다녔고, 개학하면서 학교에서 친구들이 대학을 들어갔다며 모여서 하는 이야기들 누군 효성여대, 계명대, 영남대, 경북대 학교에 간 이야기만이 오가서 대화가 안 되었다. 이미 일반대학은 전형이 끝났고 전문대 지원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경북공업전문대학이라는 띄는 학교 홍보책자가 보였다.

나도 대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엄마에게 졸라 원서를 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책자를 남편이 학교 학생회 임원으로 있으면서 구미여고에 갖다주고 왔다고 들었다. 그리고 학교에 입학을 했다.

전자과에 들어갔는데 뭐를 알아서가 아니라 여고 1학년때 우리 집에 금오공대 다니는 오빠가 동생 공부 봐주러 오곤 했는데 전자공학과에 다녔다. 괜히 전자공학과를 동경했고, 나의 과를 정하게 된 동기였다. 과목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어쩌고 컴퓨터 도스가 어쩌고 어떻게 공부했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도 영어나 수학, 국어, 체육, 등 일반교양과목은 고등학교 때도 했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전자과의 전공서적은 노답이었다. 그래도 성적을 잘 주는 편이라 낙제 없이 성적이 나왔다는 거지요.

학년 초에 학생회 본부에 차장을 모집하는데 총학생회 부회장이 우리 과에 와서 차장 모집한다고 나를 추천했다고 한다. 말썽이 많았던 게 구미 선산의 학생을 위주로 차장을 뽑았다며 학생회 각 부장들한테 욕을 먹었다고 한다. 하필 지도부차장을 여학생을 시켰냐며 지도부장이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해마다 50사단에 병영훈련 가는데 지도부장과 차장이 가야 하는데 차장이 여자였으니 참 어처구니가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학생회 일을 맡았으니 수업이 끝나면 본부에 가서 죽치고 놀았다.

점심 뭐 먹지? 짜장면 곱빼기라고 서슴없이 대답하면 여자가 많이 먹는다고 남자애들이 타박을 했다. 우리 과에는 여자가 둘이었는데 남자들 사이에서도 꿋꿋하게 잘 견뎌냈다.

학교 바로 앞에는 동부경찰서가 있었다.

수시로 학교로 넘나드는 전경들이 보였고, 데이트도 했지.

화공과가 우리 과 건물 위에 있어서 미팅도 했었고, 당시에는 인기도 많았다.

기차통학하였기에 점심때 학교 옆에서 자취하는 친구네 가서 라면도 끓여 먹고, 그 친구들은 지금 뭐 하고 살까? 같이 캠핑도 가고 어렴풋이 생각이 나긴 하는데......

용숙이라는 친구는 걸핏하면 욕하고 소리 지르고 이름은 여자인데 남학생임. 우리 과 학생장이라고 좀 뻐긴 듯하다. 2학년이 되면서 야간부에 있던 학생이 학생장으로 바뀌었다. 그는 학교옆에서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가끔 놀러 가서 밥도 얻어먹고 신세 지기도 했다. 

당시에는 연탄가스에 질식해 숨지는 일이 허다했다.

우리 가족도 연탄가스 사고로 길바닥에 끌어내어 엎어지게 하고, 김칫국을 마시게 했던 일이 생각나기도 했다.

전자과 학생이 안타깝게도 하늘나라로 갔는데 그때 맘 아파하고 얼마가지 않아 잊혔다.

2학년이 되고 선배들은 졸업을 했고, 후배를 맞아 학교생활을 그럭저럭 재미나게 보내고 있었다. 기타를 잘 치던 영길이 초등학교 선배였지만 대학은 후배로 들어왔다. 

자취방에서 기타 치던 모습을 보고 반했다. 쟝가였던가? 아직도 기타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영남호텔 사거리에 있는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안에서 고압소리치면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고 겉을 다 씻으면 차량 내부 청소를 하는 것이다.

그러고 한 달 아르바이트해서 받은 돈이 40,000원이었다.

학교로 편지가 왔다. 과에 근무하던 언니가 편지를 전해 준다.

누구인지? 어랏 부총학생장이었던 선배가 보낸 편지였다.

무시할까 하다가 언니가 알아서 답장을 보내던지 해라고 했다.

그러면서 몇 번의 편지는 언니가 답장을 해서 오갔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이 맞다고 하겠지?

어느 날 답장을 했다. 안 써본 편지인 데다가 사랑이니 그런 말은 오글 그려서 못하니까.

그렇게 편지로 시작이 되었다.

여름 방학 실습 나가던 날 7월 16일 이날은 평생 잊지 못한다.

3 사관학교에 다녔던 선배가 휴가를 나왔다.

실습기관이 비산동에 있었는데 퇴근하고 동성로에서 만나기로 했다.

술집에서 생맥을 8,000cc나 먹었다는 나야 술을 안 좋아해서 한잔 정도 마셨나? 마지막 기차를 놓치고 대구에서 밤을 새야 했다. 이하 생략 

나의 수치일이라 평생을 잊지 못하고 있다.

다음날이 노는 날이라 집에 들어가니 엄만 난리가 났다 어떤 놈이 딸내미 인생을 망치냐고.

엄마 걱정 마 책임진다고 했어. 동생 보기도 민망했고, 다음날 실습장에 갔더니 같이 실습하는 친구가 얼굴을 보고 왜 이랬냐며 멍자 욱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 친구가 학교에 소문 다 냈다. 창피해서 얼굴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10월에 임관을 하고 초군반에 입교를 해서 그곳으로도 면회를 다니곤 했다. 동기생들과 같이 모여서 웃고 맛있는 거 먹고 부산까지 데이트도 하러 갔다.

겨울방학 때는 구미에 있는 신일전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선풍기 만드는 라인에서 볼트를 조으는 일이었는데 두 달 정도를 하였다.

그러고는 졸업을 앞두고 교육을 마치고 최전방 15사단으로 발령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전방에 가면 바람나고 할 텐데 결혼식을 하고 가는 게 어떻냐고 해서 갑자기 결혼 아닌 결혼식을 성당에서 해버렸다. 어린 나이 22살 꽃다운 나이에 피우지도 못한 채 어느 누구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대학을 다니고 있고, 직장에 다니기도 하는데 난 뭐임? 엄마가 서울로 데려갔다. 친척오빠집이 봉제공장을 하는데 그곳에서 일하며 전방에 면회가라고. 잠실의 상가 3층이 봉제공장이고 기숙사도 있어서 그곳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면회도 갔다. 마장동 터미널에서 화천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땐 전화도 수동식 다방에 들어가서 전화를 쓰겠다고 하면 손잡이를 돌려서 교환이 나오고 연결해 준다. 다목리라는 곳이 오지 중에 오지였다. 

한 번은 연락이 되지 않아 터미널에서 내렸다가 그냥 서울로 나가려고 버스를 타고 가는데 군인이 버스를 세운다. 다들 무슨 일인가? 쳐다보고 있는데 버스로 올라오더니 내려하며 내 앞으로 오는 게 아닌가? 못 보고 가는구나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도 되는구나! 따라 내려서 부대안 BOQ에서 있었다. 아궁이 불 때는 방 조그맣고 봉창이 있는 그런 방이었다. 군복만 있고 다른 도구들은 보이지 않았던 문도 작고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문이었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서울로 돌아왔고, 어느 날은 면회를 가니 훈련 나가고 없었다. 춘천 신포리 FTC 훈련장으로 갔다고 한다. 중대장님 숙소에서 머물렀다가 부대 가족들이 같이 면회를 가게 되었다. 

면회 가는 날은 잔칫날이다. 온갖 음식들을 만들어서 훈련받는다고 고생하니 맘껏 먹게 한다. 대대에서 중대별 소대별 점수가 있다 보니 훈련도 잘해야 되거든요.  

이렇게 소대장은 화천에서 마치게 됩니다.

눈 오는 날은 덤프트럭이 굴러서 사고가 나기도 했다는데 다행히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 내가 기도해 준 덕분이라고 하기도 했답니다.

서울에서의 생활도 임신 사실을 알고 접고 구미로 내려왔지요. 

세탁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여기서 다림질을 배운 게 군복 다리는데 도움이 되었어요.

2월에 큰아들이 태어났고, 4월에 남편도 소대장을 마치고 광주 상무대로 발령이 나서 내려오게 됩니다. 기갑아파트에 방이 있었고 살림을 시작하게 되어요.

군인 아파트에서 생활은 그야말로 재밌었어요.

출근시키고 나면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고스톱을 치는데 새댁하고 부르면 애 안고 달려가서 옆에 앉아 구경을 합니다. 우리 아들 맨 처음 배운 말이 광입니다.

새댁은 광이나 팔아 

어린 나이라 사모님들이 아이고 나도 이럴 때가 있었지라며 이뻐해 줬답니다. 

동현아 여기 서있어. 엄마 잠깐 집에 갔다 올게 라며 아파트 입구에 세워 뒀는데 집에 들어가서 지갑 챙겨 나오니 아이가 없어졌다. 아파트 관리실에 이야기해서 방송해 달라고 하고 온아파트를 다 찾아도 없다. 

정신없이 울먹이며 뛰어다니다가 도로변에 공사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흙장난하며 놀고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다행이다 안도의 숨도 쉬었지만 애를 엉덩이를 때려줬어요. 아이는 잘 놀다가 왜 엄마가 때리지? 의아해하며 울었는데 찾았으면 감사해야지 왜 아이를 때렸을까요?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부모가 되는 교육을 받지 못해서 이지요. 부모교육은 미리 받아 놓고 부모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종교는 천주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