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 도착했을 무렵 이곳은 1년 중 가장 추운 계절을 지나고 있었다. 아침 온도가 무려 18도까지 떨어지는 매우 희귀한 날씨. 방콕의 5월, 그 뜨거운 태양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나로서는 방콕이 이렇게 추워도 되나 싶은 정도였다.
물론 방콕이 아무리 추워도 한국의 겨울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동안 느껴온 연말연초의 계절과 너무 달라서인지 아무래도 "연말 느낌"이 잘 나지 않는다. 두꺼운 스웨터와 눈 속에서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기획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그냥 어느 여름날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기분을 느끼고 있자니 "한 해의 마지막과 첫날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던 빈약한 결심이 비로소 실현되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한 해 돌아보기'라든지 '새해 결심 되뇌기'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쓴다. 내게 익숙한 연말과 너무 다른 곳에서 한여름의 기분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게 마냥 새롭다.
2023년에 가장 잘한 일을 두 가지 정도 꼽아 보자면 하나는 Layer 모임을 한 것이고, 그다음은 퇴사한 것이 아닐까 싶다. 더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실현될 수 없었던 일이 많다. Layer 모임이 없었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특히 동남아시아를 바라보는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없었을 거로 생각한다. 이곳에서 얻게 된 소중한 인연과 다양한 정보 덕분에 나의 시각 또한 더욱 깊어졌다.
다음은 퇴사한 것인데, 퇴사하고 나니 그동안 내가 뭘 그렇게 두려워했던 건지 모르겠다. 물론 돈은 없지만, 회사 다닐 때도 늘 돈이 없었으니까. 퇴사하고 시간이 많아지니 더 많은 것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그림 그릴 시간이 더 많아졌고, '스웨덴 영화제 청년 앰버서더'도 할 수 있었고, '굿즈 만들기 수업'도 듣게 됐고, 게다가 방콕에 한 달이나 올 수 있게 됐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많은 걸 느끼고 배웠고, 비슷한 취향과 생각을 공유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참 귀한 시간이었고, 여전히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것 말고도 또 잘한 건, 아무래도 2월에 서교연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거랑 소소하게 버틀러의 '애도의 범위' 번역한 게 아닐까? 서교연 컨퍼런스에서 발표된 글 중에 내 글이 제일 "귀여운" 글이었지만, 내가 그 글을 쓰느라고 고민한 세월과 받은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포기하지 않은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발표할 때 너무 떨어서 그때 생각하면 쥐구멍에 숨고 싶지만 그래도 잘했다. 버틀러 글도 길지 않은 에세이 같은 글이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해내서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번역하면서 많이 마음 졸였는데, 그때마다 "내 번역 맘에 안 들면 님이 하시든가"하는 심보로 한 문장 한 문장 번역해 갔다.
2022년을 마무리하며 쓴 글 속에 "생활과 삶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해 아쉽다."라는 내용이 있더라. 다시 읽으니 참 어이없는 말이다. 생활과 삶에 대한 고민이 충분할 날이 오기는 할까? 그래도 다행인 건 2023년이 아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지만 그래도 2022년보단 덜 아쉽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좀 더 확실히 하기로 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인사 총무' 쪽이 전혀 아니라는 걸 확실히 깨닫게 되었으니까. 이것만 해도 큰 수확이다. 물론, '소스 다이어리'를 좀 더 추진력 있게 발행하지 못한 부분이나 원래 번역하려고 했던 짧은 선언문을 번역하지 못한 것, 태국어와 크메르어 수업을 들었지만, 아직도 전혀 읽지 못하는 것은 참 아쉽지만, 나에게는 2024년이 있으니까.
방콕은 언제 선선했냐는 듯 다시 덥다. 춥다가도 금방 뜨거워지는 게 꼭 삶 같기도? 나의 2024년은 또 어떻게 춥다가 덥다가 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