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3년 10월 7일에 개인 인스타그램에 발행한 글을 업로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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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했다. 내년 2월이면 들어 둔 적금도 만기라 당분간 생활비 걱정도 좀 덜 수 있으니, 24년 1월까지 버티고 2년 치 퇴직금 꽉꽉 채워 이 돈으로는 한 달 동안 태국 가겠다고 다짐했지만, 결심은 8월에 무너지고 말았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1년 7개월 동안 한 직무에서 다양한 일을 경험했고 배운 것도 정말 많았지만, 도무지 일하는 게 재미있지 않았다. 전에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인터뷰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여기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 “일의 희로애락을 겪어야 재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직무를 잘 선택해야 한다.’도 아니고, ‘잘 맞는 일을 해야 한다.’도 아니고, 일 때문에 기뻐도 보고, 화도 나보고, 슬퍼도 보고, 즐거워도 봐야 재미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일의 희로애락은 느끼고 있지만 재미는 느끼지 못했다. 물론 1년 7개월이란 시간이 재미의 세계로 들어가기엔 부족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노(怒)와 애(哀)의 감정만 쌓여 가는데, 과연 재미를 느끼게 될지가 의문이었다. 일은 해도 해도 제자리걸음인 것 같았고, 단순하게 상사에게 욕먹지 않기 위해 일하는 나 자신이 죽도록 싫었다. 계속 이 상태라면 스트레스받아서 내년 1월까지 못 살 것 같아서 퇴사했다.
일단 당차게 퇴사는 했는데, 걱정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앞으로 나갈 돈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고 퇴사 1주일 만에 동네에 있는 작은 회사에 가서 면접을 봤다. 그렇게 돈과 퇴사 라이프를 저울질하던 중 엄마가 ⌈퇴사는 여행⌋이라는 책을 건넸다. “경진아, 이거야. 이 책이야. 너한테 이 책이 딱이야.” 나는 대체로 엄마 말은 잘 안 듣는 편이지만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엄마의 조언이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번만큼은 엄마 말을 들었다.
이 책에서 발견한 건 신나는 여행 이야기보다도 ‘내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민이다.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도 ‘일’과 ‘삶’에 대한 고민이 끊이질 않는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나답게, 좀 더 재미있게 일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성찰하는 문장들 속에서 많은 용기를 얻었다. 면접 본 회사는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별로 가고 싶지 않았던 것도 맞지만 단순히 당장 나갈 돈 걱정 때문에 헐레벌떡 취직하지 않기로 했다. 퇴직금 나온 거 있으니까, 일단 좀 쉬면서 천천히 내 삶에 대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9월 한 달을 팽팽 놀았다. 그렇다고 책 저자처럼 해외로 나갔다거나 발바닥에 땀나게 이곳저곳 돌아다닌 것도 아니고 대체로 집에 있었다. 인생 최초로 집에 가장 오래 있는 중이다. 코로나가 창궐할 때도 집에 없던 내가 거의 매일 집에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렇다고 자괴감이 든다거나 인생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냥 나에게는 이런 시간이 필요했던 거구나 싶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동안 인풋은 계속 있는데 아웃풋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집에서 놀면서 짧게 글도 써보고, 개인 노션 페이지도 만들어 보고, 소스 스토리 연재도 시작했다. 태국어랑 크메르어 강의도 듣고 있고, ‘상상마당’에서 하는 굿즈 만들기 강의도 듣는다. 아마 바로 취직했다면 먼 미래로 미뤄졌거나 피곤함에 찌들어 제대로 못 할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음 달 즈음이면 퇴직금 다 떨어져서 다시 돈 벌기 위한 일을 시작해야 할 수도 있지만 일단 그 걱정은 넣어두고 현재에 집중하고 있다. 지금은 그냥 재미있어 보이는 걸 여유롭게 하면서 최대한 방황하고 있다. 그놈에 방황 인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하신다면 할 말은 없고 대신 책 속 한 문장을 공유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만든다. 밑져야 본전이라면, 안 된다고 믿는 것보다 된다고 믿어보자. 조금 더 자신을 믿고 인생이란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방향 설정이 내면에서 나오는 한 방황하는 과정도 멋진 모험기가 될 테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재미있어하는 것을 찾아 최대한 방황하다 보면 거기서 또 어떤 멋진 모험기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나에게 이런 용기를 준 『퇴사는 여행』 만세! 그리고 나에게 이 책을 건네준 엄마도 만세! 또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도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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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아, “좋아하는 일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folin, 2023.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