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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량음료 Jan 20. 2023

부활

세상을 바꾼다는 것

러시아어과 학생이라고 해서 러시아 문학작품을 다 읽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러시아 문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접근하기 쉽지 않다. 대학 때 한 학기 동안 러시아 문학 과목을 들으며 책을 읽느라 말 그대로 죽을 뻔했다. 급하게 읽은 책은 체한 듯 머리와 마음에 남지 않았고 방대한 양과 심오한 내용에 짜증만 났다. 하지만 나의 이런 반응은 다 나의 높지 않은 수준에서 나오는 것이고 사실 누가 뭐래도 러시아 문학은 위대하다. 자세히 읽으면 그 안에서 위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내가 위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자세히 읽을 인내심과 이해력과 집중력이 없다는 데 있다. 하지만 한때 러시아어과 학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문학을 잘 알지 못한다는 부채감에 언젠가는 이 작품들을 다 읽어 이해해 내고 말리라, 그 위대함을 나도 느끼리라 라는 마음으로 한 두 권씩 사모으기 시작했더랬다. 지금 우리 집 책장에는 목침 같은 두께의 러시아 문학작품들이 나란히 꽂혀있다. 그 책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왜냐하면 나는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터럭만큼도 그들의 위대함을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러시아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그 이름도 악명(?) 높은 문학계의

양대 산맥을 꼽으라면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들 수 있겠다. 두 사람 중 굳이 꼽자면 난 톨스토이를 선호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특히 내용이 방대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악령, 백치 등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의 말 많음에 질리기 일쑤이고 말 많음과 이야기의 전개 사이를 오락가락하다 보면 나중에는 나의 정신마저 함께 오락가락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 자체도 약간 뭐랄까, 정신이 온전치 못한 분들이 많이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다 읽고 나서도 과연 내가 무엇을 읽었는가 자조하게 된다(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대학교에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해치우듯 읽은 후 비교적 최근인 1년 전쯤 다시 읽어 보았는데, 분명 수업 때 이 책의 ‘대심문관 이야기’가  세계문학의 압권이라고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막눈에는 왜 대심문관 이야기가 위대한지 잘 모르겠던 터라 다시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반면 톨스토이는 그래도 그나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보 이반’,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등과 같이 어린이들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잘 알려진 단편소설도 많이 있기에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 ‘부활’과 같은 장편도 적당한 대사량과 적당한 속도로 진행되는 이야기의 전개,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덕분에 책을 읽어나가기가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몇 년 전 오랜만의 친정 나들이에서 부산의 보수동 중고서점 거리를 들렀다가 톨스토이의 ‘부활’을 발견했다. 부활은 전에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집어 들었는데 최근에 발간된 책은 아니어서 번역이 어떨까 싶어 잠시 망설였다. 후루룩 넘겨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저렴한 가격에 구입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 집 책장에 꽂혀만 있다가 독일로 온 후 펼쳐 보았다.




‘부활’은 사회를 바꾸고 싶어 하는 귀족 남성 네흘류도프의 이야기이다. 그가 처음부터 사회 개혁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지체 높은 귀족 집안의 상속자인 그는 순수한 청년이었으나 어느 날 고모댁에 놀러 가서 만난 카츄샤라는 집안의 하녀(이지만 양딸 비슷하게 키워진)와 하룻밤을 보낸다. 이후 그 일쯤은 까맣게 잊어버린 네흘류도프와는 달리 카츄샤는 아이를 가지게 되고 그로 인해 집에서 쫓겨난다. 아이는 죽고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여러 일자리를 구하지만, 하녀로 들어가는 곳마다 그 집안의 남자들이 추근대는 바람에 분노한 그 집안의 여자들이 그녀를 쫓아낸다. 농노 출신이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귀족 마나님들의 심부름이나 하며 편하게 살아온 탓에 아무리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다급한 상황이라도 세탁부와 같이 정직하나 강도 높은 노동을 해야 하는 일은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국 카츄샤는 유곽에 들어가 창녀가 되어 방탕한 생활로 삶을 이어간다.


그렇게 7년이 지나고 그녀는 어느 날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운나쁘게도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게 된 카츄샤는 재판정에서 네흘류도프와 마주친다. 운명의 장난인지 네흘류도프가 카츄샤 사건의 배심원이 된 것이었다. 그 사이 네흘류도프는 순수한 청년에서 노련하고 세속적인 장년이 되었으나, 카츄샤의 팔자가 자신과의 하룻밤으로 인해 기구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그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점차 사회 변혁가로 변모해 가기 시작한다. 결국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야만 하는 카츄샤를 책임지기 위해 결자해지 하는 심정으로 그녀와 결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카츄샤를 따라 시베리아로 떠난다. 떠나기 전 자신이 물려받은 많은 재산은 농민들에게 환원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그 당시 러시아 사회의 부조리, 부패, 불의 등을 목격하며 점차 각성해 나가는데, 현재의 불합리한 사회모습에 대항하여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며 세상을 바꾸어 나가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카츄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의 원래 성정이었던 순수하고 남을 돕고 불의를 참지 않는 모습이 다시금 ‘부활’된다.


마슬로바(카츄샤의 성)와 네흘류도프 공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슬로바는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덕에 제정 러시아 사회를 변화시키려다 감옥에 갇힌 동료들과 교제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새로운 기쁨을 맛보게 된다. 선량하고 남을 기꺼이 돕는 마슬로바의 본래 성정도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함께 수감된 억울한 동료들을 도우며 부활된다. 그리고 본인이 사랑하는 네흘류도프 공작을 자신이 처한 시궁창 같은 상황에 끌어내리지 않기 위해 다른 이와의 결혼을 택하며 공작을 놓아준다.


이 책을 읽으며 ‘가진 자의 각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네흘류도프는 최고지위를 가진 공작으로서 자신이 가진 권력을 십분 활용하여 억울한 죄수들을 돕는다. 그는 운 좋게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세상에 태어났고 그런 사람이 각성까지 하니 파급력이 대단하다. 그러나 만약 그가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고 사회운동에 뛰어들라고 한다면? 그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각성 상태를 유지하며 용감하게 사회를 개혁해 나갈 수 있을까.

나는 어떤가. 나는 월드비전에 오랫동안 후원해 왔고, 돈 없고 힘없는 이들의 아픈 사연에 눈물을 흘린 적도 여러 번이다. 시간과 물질을 기꺼이 내어놓은 적도 있다(큰 것은 아니었고 자랑하고자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든 내 삶에서 나의 작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도울 용의가 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를 가진 자라는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은연중에 나는 우위에, 그들을 하위에 두고서 내가 이걸 좀 더 가졌으므로,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가지고서, 하지만 그러한 추한 우월감을 아무도 깨닫지 못하리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스스로를 포장해 왔던 것은 아닐까. 내 안에 있던 오래된 고민을 건드린 느낌이었다. 내가 가진 알량한 것들이 다 사라지고 그냥 나 자신 하나만 남는다 해도 나는 여전히 조금은 착하고, 조금은 의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내 안에 이어졌다. 조금이라도 더 가진 자들인가. 가진 게 없어서 생존자체를 위협받고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이들은 과연 세상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못 가진 자들은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도움만 받으며 바뀌어야 할 세상의 피해자로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마슬로바가 떠올랐다. 그녀는 하층민으로서 남자들의 노리갯감이 되었다가 결국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는 법의 보호도 받지 못했다. 그랬던 그녀가 권력을 가진 네흘류도프의 구명 운동으로 인해 사면을 받게 되고, 같이 수감되었던 정치범 수용소 동료들에게 감화를 받아 아름다운 내적 성장을 이루어간다. 마슬로바는 아마 네흘류도프와 헤어진 이후 이제는 자신의 작은 세상을 바꾸어가는 사람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처음에는 성장을 이룰 인적, 물적 자원이 전혀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나 이제 더 나은 한 인간으로 살아갈 동력을 얻었으므로 그녀는 아마 더욱 극적으로 변해갔을 것이다. 만약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네흘류도프가 다시 마슬로바를 만났다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멋지게 변해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인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인간이다. 운 좋게 가진 것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많다면, 아니 평범함 중에서도 조금이라도 다른 이들에 비해 가지고 있는 비범함이 있다면 그것은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의 낡은 동아줄이나마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마지막에 네흘류도프가 성경 마태복음에서 발견한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읽어냈다면 그 길은 인간답게 살고자 노력하는 우리 모두의 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카츄샤와 헤어진 네흘류도프는 이후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갔을까. 자신의 유언장을 쓰면서까지 자신의 영지에 살던 농민들의 권익을 보장해 주려던 그런 순수한 첫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살아갔을까. 톨스토이는 네흘류도프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톨스토이의 인생 행보를 보았을 때 소설 이후의 네흘류도프의 삶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막대한 재산을 민중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결정을 지키기 위해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일으켰을 테다. 어느 귀족 가정에서 느낀 안락함과 우아함과 깨끗함을 경험하고는 자신도 그런 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카츄샤와 관련된 형무소의 일을 불쾌한 의무로 여겼던 것처럼 종종 마음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톨스토이가 실제로 재산의 사회환원에 대해 극렬히 반대한 아내와의 다툼으로 인해 82세의 나이에 가출하고 객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가족과 친지들의 비난도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흔들리면서도 여전히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삶을 바쳤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담이지만 이 소설은 좀, 잔소리가 많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70 넘은 노작가가 사회를 향해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사회 변혁을 위해 고뇌했던 노인이 안타까운 마음에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 크게 크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네흘류도프의 입을 빌어 아주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갖다 안기듯 전하고 있다. 그래서 좀.. 부담스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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