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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May 28. 2024

해맑은
완벽주의자

"띠리리리-띠리리리-" 

알람이 울린다. 본 알람이 울리긴 전 4시 50분에 맞춰진 알람을 무참히 꺼버린다. 눈꺼풀 한번 움직였을 뿐인데 5시 정각에 맞춰진 알람이 다시 울렸고, 산뜻한 민트색 아침이 신경질적인 주황색으로 변하며 미간을 찌푸린다.

"하아, 일어나기싫다......"

평소 알람을 지양한다. '알람' 자체가 이행해야만 하다는 '강박'처럼 느껴지고, 알람을 끄는 행위는 곧 '무력함'과 '죄책감'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알람 하나 맞췄을 뿐인데 과한 실패가 동반되는 상황은 곧 오늘도 하지 못한 to do list를 상기시키는 아이러니를 가져왔으니,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 unsplash


"괜찮아, 연습하는 거잖아. 백 점 맞지 않아도 돼, 못 맞는 게 당연한 거야."

아이는 처음 해보는 급수에서 백 점이 나오지 않으면 툭툭 신경질을 부리더니, 이내 서러운 점수를 흘리고 만다. 연습 아무리 언질을 줬어도 점수를 받아들이지 못해 울고야 마는 아이를 보면, 이해되지 못한 만큼의 한숨이 푹푹 새어 나온다. 

"그렇게 잘하고 싶다면 연습을 해. 노력하지 않고 바라는 건 온당치 않아. 노력했는데도 점수가 낮다면 억울하고 속상할 수 있지만, 지금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잖아."

지나치게 단정한 이야기는 날카로운 곡괭이가 되어 적확하게 내 가슴에 찍히고 말았다. 

'이거 너한테 해당하는 얘기 아니니? 넌, 지금 최선을 다하고 온당한 결과를 바라고 있니? 불량식품의 영양가 같은 헛된 바람은 없니?' 



고작 며칠 만에 습관이 잡히길 바랐다. 기대하는 마음만큼 애정과 시간을 쏟지 않고 탁월하게 높은 결과를 원했다.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사소한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최소한 너는 나를 사랑해야지 않아?' 거침없는 투정을 부리고야 말았다. 사소한 관심도 어떻게 쏟고 표현하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는 걸 알면서, 대체 무엇을 바랐던 것인가. 

삶에 이기적인 순간이 많아진다. 욕심이 난다. 스스로 생각하길 '경쟁은 나와 어울리지 않아. 각자의 속도가 중요한 법이야.'라고 수만 번 외침과 속임을 건네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잘하고 싶은 마음, 잘 해내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인 것을 솔직히 고해본다. 내 앞에 펼쳐진 여유의 흩날림조차 완벽히 계산된 '틈'임을 알고 있다. 누구 하나 몰아치지 않는 어정쩡한 삶에서 되레 자신을 가장 몰아치는 아이러니함이라니. 자율성이 보장되자, 스스로에게 성과와 성취를 발현하라고 마음의 채찍을 휘두르는 내 정체성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모습과 글쓰기를 하고부터 마주치는 내면의 목소리는 서로 다른 인격체만 같았다. 해맑은 완벽주의자는 결국 나를 향한 '수긍의 말'이었을까. 그동안 외면했지만, 어쩌면 난 모든 면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욕심내고 있었다.

© unsplash

먼저,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는 정체성에서 스스로를 들볶는 면이 있다. 학원 가기 싫어하는 아이의 성향도 있지만, 밀어붙였다면 다녔을 것이다. 단지 엄마 마음에 드는 학습 학원이 없어서 보내지 못한 것이 크다. 그 와중에 '엄마표 신화'를 신봉하는 면도 없지 않다. 좀 더 자연스러운 학습이 되도록 바랐지만, 두통을 유발하는 모습을 보면 과연 어떤 선택이 옳은지 좀처럼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럼에도 학습서를 살피고, 전문가 강의를 들으며 불안으로 잠 못 자는 하루를 맞이하다 보면, 조금 더 편한 길로 가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아이들 먹거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전에 말했다시피 전업주부 엄마 밑에서 집밥을 먹고 자란 나는 자주 배달할 경우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외벌이의 얇은 지갑도 그렇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 유독 물을 찾고 더부룩한 배를 만지작거리는 아이를 보면 오늘의 잔꾀를 반성하게 된다. 그리곤 이내 온라인 장바구니를 두둑이 담고 칼질 소리로 하루를 채우게 된다. 


이런 상황에 '엄마의 글쓰기'가 들어오자, 이 또한 욕심났다. 초반 며칠은 성공했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오전에 글을 쓰고, 아이들 간식과 끼니를 미리 준비해 놀이터 지킴이 역할을 했다. 예체능 학원을 보내고 틈틈이 집 정리를 한 뒤, 집밥을 먹인다. 설거지를 마치고 저녁 공부를 하면 하루가 끝이 난다. 할 일을 클리어하고 잠자리에 누워 오늘을 되짚다 보면, 이 애씀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할지 깊은 한숨이 나오곤 했다. 단기 에너지를 끌어모아 간신히 버티다 결국 탈이 나는 건 나일 텐데. 그럼에도 자신을 들볶아 이상향의 삶을 동경하며 무한 반복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그것이 과연 우리를 위한 길인지 수만 번 흔들리는 나는, 사실 해맑은 완벽주의자를 동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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