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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Jun 14. 2024

흔한 엄마

집중의 대상이 내가 되면 편하다.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고요함이 주어진다면, 혼자 사색하다 종이에 끄적이고, 그 끄적임이 글이 되곤 했다. 하지만, 이 시간과 고독이 주어지지 않으면, 다시 말해 내가 원치 않은 시간에 원치 않은 대상에게 집중이 쏠리면, 어김없이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글을 쓸수록 다정한 엄마가 되리라 생각했지만 이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이 기발한 착각 속에 매일 고군분투하며 줄다리기 하고 있다. 엄마의 역할과 글을 쓰는 자아로서의 나. 아이들과 있으면서도 글쓰기를 생각하고 책을 읽고 싶어지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진다. 아이가 독립을 향해갈수록 나 역시 아이와의 독립을 원하고 있었다. 사진첩 속 불과 일 년 전 모습만 봐도, 그 시절이 아쉽기만 했었는데. 정작 같이 있는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보기보단 자아 찾기가 시급해졌다. 나에게 몰두할수록 아이와 트러블이 생겼다. 그만큼 놓아주어야 함인데, 사실 난 아이를 믿지 못하면서 적당한 거리에서 감시의 눈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엄마 손이 더해갈수록 결과물은 탁월했다. 받아쓰기 점수, 글쓰기에 대한 선생님의 첨삭, 교우 관계, 학원 선생님의 피드백, 하물며 아이 키와 몸무게마저.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상쇄시켜 버릴 '감정'은 어떠할까. 내 완벽함을 향한 동경이 커질수록, 아이와 나는 서로를 향해 더 팽팽한 기 싸움을 하고야 말았다. 감정을 매만져주는 아빠와 사이가 더 좋은 것은 사실이다. 몸으로 놀아주고, 다정한 애정 표현을 하고, 감정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아빠는 아이에게 '새살 돋는 연고'와 같을까.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시간에 엄마가 함께한다는 점이고, 엄마 역할에 이어 감정까지 신경 쓰라는 건 풀 수 없는 최상위 문제집이 턱, 발등에 떨어진 것과 같았다. 




내가 생각했던 난 아이를 낳고 모성애가 가득할 줄 알았다. 무릎 위에서 아이를 키우고, 섬세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하루의 눈 맞춤을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난 지독한 면이 있었다. 그 지독함이 때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저돌적이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타인에 대해선 너그러운 마음, 심지어 안타까움과 선량한 마음이 기꺼이 드는데 왜 내 주변에는 무미건조하게만 나타날까.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라는 슬로건 속에 자꾸만 기분이 태도가 되어버린다. 

© unsplash


아빠의 이중적인 모습은 항상 불만이었다. 외부 사람들에겐 '허허, 그럴 수 있지, 괜찮아.'하는 넉넉한 인심을 드러내면서 집에만 오면 험상궂은 양복의 중년이었다. 그렇다고 체벌 속에 자란 것은 아니지만, 되짚어 보면 믿음 속에 자랐다고도 할 수 없겠다. 자식을 향한 기대가 클수록 자식들은 엇나가기 바빴고(때론 엇나감이 아니라 자아 찾기였겠지) 아빠의 목소리는 짜증스러움과 한숨을 동시에 내뱉었다. 아빠가 그럴수록 엄마는 다소 자포자기 심정의 '어쩌겠냐, 육아'를 시전했다. '그럴만한 상황이 있었겠지. 아니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해야지. 걔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니' 등등. 엄마의 끊어질 듯한 느슨함과 아빠의 숨을 막혀오는 눈빛 속에 자란 나는 그토록 갑갑했던 아빠를 닮았나 보다. 


© unsplash

아이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수록 아빠의 공기가 소환된다. 모두를 살얼음 속에 집어넣었던 아무 말들이 내 입에서 나올 것만 같아 예민해진다. 그토록 싫었던 이기심. 보고 자란 게 그것이라 나는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없을까.

가끔 엄마가 생각난다. "그때 더 공부하도록 잡을걸." 어설픈 한탄을 흘리는 엄마를 보면, 결국 사람은 자기가 갖지 못한 성향을 항시 후회하나보다.

엄마와 아빠에게 습득된 육아와 '요즘 육아'가 덧붙여진 내 생활은 자괴감 회오리의 연속이다. 부모가, 특히 엄마가 신경 써야 함을 모두가 외치고 있고, 심지어 담임 선생님조차 알림장에 적어주시니 긴장된 채 점수를 받아 모시게 된다. 받아쓰기를 연습시키고, 단원평가를 봐주고, 대화로 글쓰기 내용을 이끌어주고. 그 밖에 학원에서 행해지는 당근과 채찍을 가정에서 휘두르다 보면, 말을 키우는 조련사와 뭣이 다른가 싶다. 말의 갈퀴를 쓰다듬어 주고 방목시키는 아빠와 풀을 먹이고, 말굽을 갈고, 목욕을 시키고, 똥을 치우고, 위생 상태를 살피며 조련하는 엄마. 너의 자유로움을 친히 허락하고 싶지만, 자꾸만 울타리를 치는 내 모습에 넌 앞발을 들고 '히이이잉' 울고만 있는 듯하다. 


네가 행복한 원더랜드는 어디일까.

혹시 우리 주변은 풍요로운 감옥은 아닐까. 

자유롭게 뛰어다니다 먹을 것 하나 없는 벌판을 마주하는 건 아닐까.


한낮의 바람 한 점에도 흔들리는 나는, 바로 이 시대의 불안한 '흔한 엄마'다. 넓은 울타리를 치고 내 아이를 보살피며 걱정 한 움큼을 짊어지고 있는, 이 시대의 옆집 엄마다. 그리고 이 글은 그녀에게 깊게 깔린 낮은 읊조림이다. 나는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까. 우리가 공존할 방법은 과연 존재할까. 그게 너와 내가 모두 만족할 만한 지점이 되긴 할지, 오늘도 흔들리고 있는 나는 바로, 흔한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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