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미다 Jun 21. 2024

입원실의 문제집

한 극성한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는 나는 인정한다. 단원평가가 있는 날 저녁, 문제집을 보며 예상 문제를 동그라미 치며 이것만은 꼭 풀고 가기를 염원한다. 풀어야 할 문제가 하나하나 늘어갈수록 아이의 "그만"이라는 푸념이 덧붙여진다. 

"엄마는 네가 백 점을 맞든 말든 상관없어. 네 공부고, 네 점수지."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씨불이며 쿨한 척하지만, 난 극성 엄마다. 이왕이면 잘했으면 좋겠다. 이왕 해야 하는 공부, 잘하면서, 인정받으면서, 즐겁게 했으면 좋겠다. 잘해도 힘든 공부인 것을. 12년을 꾸준히 해야만 하는 이 레이스를 힘들지 않게 했으면 싶다. 아이에게 테스트지를 출력해 주고 브런치를 켰다. 엄마의 눈길이 정답을 쏘아주지 않도록 노트북을 열어 시선을 차단했다. 난 글을 쓸 테니, 넌 수학 문제를 풀 거라. 자꾸만 노트북 너머로 눈알을 굴리고 싶지만 애써 쿨한 척, 남편 보듯 시험지를 본다. 

나랑 상관없거든.


한 장, 두 장 푼 흔적을 보며 빠르게 눈으로 계산한다. '정답, 정답, 정답......이 아니라, 이 쉬운 걸 틀렸다고.....? 지금 집중해서 푼 거 맞아?' 엄마 시선이 오래 머무르자, 아이가 "왜?"라는 의심을 건넨다. 

"응? 아니, 엄마 눈이 침침해서 잘 안 보이잖아. 그래서 무슨 숫잔가 봤지. 뭐야 벌써 다 풀었어?"

"몇 분 남았어? 아직도 그렇게나 남았어?" 하며 허세 떠는 아들이다. 

'이놈아, 좀 제대로 풀 수 없니? 17번 문제 좀 다시 풀어보면 안 되냐, 정녕 이 쉬운 걸 모르는 것이냐.'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볼 수 없는 금기의 문장을 삼키며 "오~"라는 짧은 단어로 한숨을 대신한다. 

그 한 단어가 우리 사이를 더 이상 넓히지 않았다. 

© unsplash

아이가 병원에 입원했다. 학교에서 급히 받은 전화 너머로 신속하게 짐을 챙기며 무슨 촉인지, 노트북과 헤드셋, 충전기 그리고 두 권의 문제집을 챙겼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는데 그 찰나의 순간에 문제집과 필통을 챙긴 나는 (심지어 '자'도 넣었다) 어떤 엄마일까. 내 머릿속에 '루틴이라는 이름'의 무엇이 이토록 지배하기에 내 오른손은 가방 한 쪽에 문제집을 넣었는지, 새삼 나의 극성에 스스로가 혀를 내두른다. 

그만하자, 누가 보면 한 성적 하는 줄 알겠다.


아이의 열이 내려갈수록, 입이 살아날수록, 가져온 문제집을 곁눈질하는 횟수가 늘어만 간다. 하루 종일 텔레비전 속 스포츠 채널을 가삐 움직이는 저 손가락에 연필을 쥐어 줄 순 없을까. 적당한 타이밍을 생각하며, 극성 눈길을 바삐 움직인다. 

"핸드폰 좀 그만 보자."

"엄마, 나 할 일 끝내면 이따 야구 봐도 되지?"

10개 구단 선발 투수를 보며 오늘의 승패를 예상하고, 선수들의 최근 성적을 줄줄이 읊는 아이를 보니, 챙겨온 문제집이 남의 물건인 양 마음이 편치 않다. 

그만해 아들, 눈치 좀 챙겨.


리모컨을 누르던 손가락은 어디를 갔나. 방전된 연필은 이미 굴러떨어진 지 오래. 할 의지가 없다.

'인간적으로 하루 종일 누워 텔레비전만 보는 건 아니지 않니? 최소한의 루틴은 좀 이어가 줄래?' 앙다문 입술 속 복화술을 들려줘봤자, 아이는 위풍당당한 수액 꽂은 손등을 치켜들 뿐이다. 그의 환자복이, 수액 줄이 천군만마인양 기세등등이다.

© unsplash

아이가 입원해 있는 동안 관찰의 시간이 늘어났다. '아이의 무릎이 이렇게 튀어나왔나, 한쪽 오금이 더 갈색이네, 볼에 났던 주근깨가 코언저리까지 퍼졌구나, 손목에 나랑 같은 점이 생겼네.' 그동안 내 눈길을 머물게 하지 못했던 '너의 자람'이 곳곳에 그려져 있었다. 잘 때는 발목을 주물러줘야 잠이 더 잘 온다는 사실도, 수액을 맞느라 새벽에 화장실을 갈 때마다 엄마한테 미안해한다는 점도, 아침에 일어나 "엄마, 잘 잤어?" 따스한 한 마디를 먼저 건네는 것도 너인 것을, 왜 자꾸 내 눈길로만 속단하려 했을까. 


내 기준이 맞다는 보장도 없건만 아이보다 몇십 해 더 먹은 나이를 위세 떨며, 내 말이 정답인 듯 고고하게 소리쳤다. 정해둔 범주 안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속단하고 단정하려 했다. 아이보다 아이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엄마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규정하려고만 한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예측 불가한 모양으로 튀어나왔고, 나는 자꾸만 둥그스러운 모양으로 만들고자 입과 손을 쉬지 않았다. 때론 '엄마가 지나 봐서 아는데' 또는 '네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런다' 싶은 라떼를 소환하며 자꾸만 내가 아는 지식의 한계에 가두려 했다. 

한편으론 창의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며 다른 아이들처럼 '좀 있어 보이는 주제'에 관심을 두지 않음에 한숨 쉬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이가 아플 때는 그저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는 초심으로 돌아갔지만, 조금이라도 열이 떨어지곧장 욕심이 올라왔다. 그런 엄마여도 그저 '엄마'로써 바라봐주고 따라와 줌이 얼마나 고마운지. 눈에 띄않는 그림자 같은 성장이라 할지라도 상기시켜야겠다. 그렇게 의식적으로라도 너에게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흔한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