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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Oct 23. 2024

한강에 흐르는 텍스트 힙

x축과 y축에 수많은 점을 찍었다. 인지도와 작품 역시 유명한 작가, 이름은 알려졌어도 작품성은 그에 못 미치는 작가, 작품성은 뛰어나지만 개인적으로 불호인 작가 그리고 그 어디에도 작은 점이 찍히지 않는 수많은 작가. 그러나 한강 작가에 대한 위대한 칭송이 전해진 지 만 하루가 지나자, 내 머릿속은 좌표 대신 계급을 나누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 심리적 두께가 이보다 더 단단할 수가 없다.


동네에 책 축제가 열렸다. 들어보지 못한 작은 출판사들 매대 위로 대표작들이 진열됐다. 기대 없는 눈빛과 건방진 손때를 묻히며 '소비자로서' 감정의 우위를 내비친다. '이런 작품도 있었네. 그런데 판매는 될까?'

만약 내가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작이나,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의 띠지를 만지면서도 이와 같은 마음일까. 금박이라도 붙여진 듯 공손한 마음으로 책을 소중히 살피거나 바로 집어 계산대를 향했을지도 모른다. 내용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이게 그 작품이래.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읽어보자'라는 마음으로.


저녁 8시, 조용한 식탁에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단 몇 초 차이로 온라인서점은 마비되었고, 조용히 잠자던 재고는 소란스러운 유난에 새 옷을 입기에 바쁘다. 지루하리만치 평범한 하루가 금빛 호명 하나로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다니. 매대 속 그 책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사람들이 상기된 얼굴로 먼지 쌓인 책을 갖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작가라는 타이틀은 등단으로 얻을 수도 있지만, 단지 글을 쓰고 있단 이유로 쟁취할 수도 있다. 느슨한 문턱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작가라는 이름표를 얻었고, 그 경계는 점점 모호해졌다. 노벨문학상 수상에 태극기가 걸린 영광된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고개 숙여 자기 명찰을 직시하게 됐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이젠 글에도 계급이 생겨버린 느낌. 작가로서, 내 글의 세계관이 오늘따라 속 좁아 보인다. 지금으로썬 남들이 눈치채기 전에 뒷걸음질 쳐 슬그머니 내빼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왔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내 글의 형편없음을 인정하며 쭈그러진 마음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글을 쓰고 있을까. 일기장에 불과한 글, 비슷한 내용의 글을 계속 써 내려간다는 게 의미 있을까. 한동안 글이 써지지 않았고, 그럴싸한 주제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만한 실력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질적 성장을 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글쓰기 자체가 고행이었다. 쓰다만 흐려진 주제에 덧붙일 생각도 없었고, 그 생각이란 것도 알맹이가 없어 활자 수를 늘릴 수도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 마음이 가라앉았다. 붕붕거리던 소란이 조용히 내려앉고 '뭐 어쩌겠어'싶은 어깨 으쓱거림과 함께 생각이 다른 방향을 그렸다.

지금 우리가 글을 쓰는 브런치는 취향을 찾는 공적이며 사적인 공간이다. 뛰어난 작품 역시 중요하지만 소소하게 내 눈길을 사로잡고 클릭하게 만드는 글 역시 소중하다. 내 안목이 뛰어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각자 손길이 닿는 영역은 엄연히 다르다. 글쓰기 주제 역시 그렇다. 누군가의 호명을 받진 못해도 실력의 차이와 함께 취향의 차이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그게 심신에 더 이로울 수도). 각자의 소리를 글로 담으며 소통하고 종국에는 나 자신과 소통하면 되는 것 아닌가.

다소 가벼운 생각이라도 글로 남기고 책과 공존한다면, 홀로 끄적이며 내 취향을 발견하는 소중한 점들이 찍힌다면, 우린 모두 동네 철학자가 될 것이다.




한강 작가의 세계관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어제도 썼고, 오늘도 썼으며, 내일도 쓸 것이다. 평소처럼 읽고 쓰고 산책하며 평온한 나날을 유의미한 속도로 흘렀고, 우린 그동안 못 느낀 유속에 그녀의 세계관으로 빨려 들었다. 거대한 문학의 쓰나미가 우리를 넋 놓게 만든 것이다.

급류에 휩쓸리느라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때론 허우적거렸지만 이젠 다시 내 작은 물줄기를 흘려보내야겠다. 언젠간 대양에서 만날 일을 상상하며 작은 글 방울들을 만들어 조용한 물의 흔적을 남길 수밖에.

한강을 기준으로 강북과 강남의 격차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글 줄기'를 공유하며 좀 더 비옥한 토지가 될 순간임을 직시하고, 지적인 강물을 곁에 두고 삶을 비옥하게 바라봐야겠다. 비록 일순간 타오르는 한강의 기적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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