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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Nov 07. 2024

트럼프를 제쳐두고 한강에서 울었다.

당선이다. 빨간 넥타이와 은발. 미간주름과 함께 손가락 끝을 직시하는 그가 다시 한번 정상에 오르고 말았다.


아침 신문으로 전해진 그의 강력한 입매를 보고 식탁 언저리에 내려놓았다. 현실 속 지갑은 얼른 신문을 펼치고 정독하라며 뜨거운 시선을 보냈지만, 정작 한 일은 물을 끓이고 커피 한잔을 타서 푹 꺼진 쇼파에 안겨 소설책을 집어 든 것이다.



친정집에서 무상으로 빌려와 하루 이틀 우리 집 냄새가 밴 그 책을 간간이 집어 들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펼쳐지는 글자들을 따라 숨죽여 읽고 있었다. 엄마를 찾는 아이들과 아내를 찾는 남편의 목소리에 남은 페이지가 제 속도를 내지 못했고 삶 또한 잔잔했다. 설거지하며 이따금 스며오는 책의 공기에 마음이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버틸 만했다.

놀이터의 소음 속에서 차디찬 벤치에 앉아 굽어진 등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담요로 삼아 중반부를 읽었다. 신발 던지기를 하는 웃음과 하늘 높이 올랐다 떨어지는 둔탁한 소음이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못하도록, 슬픔에 잠식당하지 못하도록 적당한 가림막이 되었다.


문제는 오늘이다. 오늘 아침.

아이들과 남편이 모두 집을 비운, 강제로 집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일정에 쇼파 한구석으로 엉덩이를 밀게 만든 상황은 어느 순간 꺽꺽거리는 울음을 토해내게 했다. 그동안 현실 상황에 치여 몰입 독서를 하지 못한 게 다행이리만큼, 전지 작업을 하는 차량과 톱의 전기 소리가 가끔 들리는 이 고요한 아침에 터져버리고 말았다.


아니다. 사실은 어제저녁이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뒤엉킨 그 고깃덩어리에 쉽사리 손이 가질 않았다. 뭉텅이로 엉켜있는 살점들을 떨어트려 올리브유, 소금, 후추에 버무렸다. 붙어있는 면적은 거무튀튀하며 손끝으로 주무를 적마다 물컹한 속성이 전해지는 육류의 진한 비릿한 냄새를 처음으로 맡았다. 그 순간 읽던 한 페이지가 떠올랐다면, 극단적 울렁거림일까.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매체를 통해 그날의 극악무도한 사실들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지만, 제대로 읽지 않았다. 어렴풋이 아는 봄날의 핏빛 벚꽃 날림을 마음으로 느낀 적이 없었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잘 기억나지도 않아 상영된 비디오가 다시 처음부터 보이길 기다려야 하는 보통의 우리 모습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있었다. 아니, 그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이미 죽었던 망자들도 다시 일어나 죽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남은 자들은 내가 죽은 것인지, 죽어가고 있는 것인지, 죽음을 앞둔 것인지도 모른 채, 사자와 함께 기억을 되돌려 혼이 빠진 육체만 살아지고 있을 뿐이었다.


살았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이 이토록 처절하고 허망할 줄이야. 과연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를 만큼 텅 빈 마음을 안고, 더 이상 흐를 눈물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뜨거운 울분이 저 밑바닥부터 차오르면 몸이 비틀어지는 눈물을 다시 흘릴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내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내 봄은 어땠던가.

빨간 피로 물들여져 흩날리는 벚꽃을 본 적이 있던가.

또 오고야 마는 봄날을 참혹하게 견딜 수밖에 없는, 숨이 턱턱 막혀오는 새순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작가의 할 일이였다.


세상이 잊힌, 세상에 잊혀간 그 작은 이름을 소중히 담아내 널리 알릴 책무였다. 작고 너무 소중한 벚꽃잎을 가슴에 안고 더이상 흘릴 피도 남아 있지 않은 희고도 흰 잎을 페이지에 적어가야 했다.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죽은 자의 혼이 다시 육신으로 돌아가 피비린내 나는 봄에 고통으로 문들어져가는, 뒤틀어져가는 모습을 적어가는 작가의 영혼은 어땠을까.


페이지에 조용히 적혀있는, 발소리조차 가벼운 그들이 왔다간 수많은 페이지를 이리 쉽게 읽어도 될 만 한가. 묵직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나는 과연, 어떤 봄날을 맞이해야 하는가.  

문학은 분명 내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다만, 삶의 농도를 짙어지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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