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인터뷰⑤] 독일 프랑크푸르트 이승영
우리(김병철, 안선희)는 10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하며, 해외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을 만났다.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 문화, 사람들 속에서 살아보는 것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기록을 공유한다.
독일에 머물 땐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인터뷰 요청이 특히 많았다. 그중 한국에서 언론사에 있다가 현재 물류회사에 다니는 이승영씨는 ‘전직 기자'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더 관심이 갔다. 밖이 아닌 집에서 만나서였을까. 그와의 인터뷰는 지인을 만난 듯 편안했다.
- 가족 : 아내
- 거주지 : 독일 프랑크푸르트
- 독일 거주 3년 11개월 차
- 미국계 물류회사 근무(한국계 사장)
*모든 내용은 2016년 10월 인터뷰 시점이 기준입니다.
2006년 대학 졸업, 뉴시스 입사
2011년 경제투데이 입사
2012년 11월 독일로 출국
2013년 5월 물류회사 취업
2014년 2월 아내(당시 여자친구) 독일 입국
2016년 3월 한국에서 결혼식
2006년 대학을 졸업하기 전 뉴시스(뉴스 통신사)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했던 이승영씨는 그때만 해도 기자가 천직인 줄 알았다. 인턴을 마치고 문화부 기자로 일한 지 5년 반쯤 지났을 무렵, 어느 순간 그는 정체돼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다른 매체로 이직을 하기도 했지만 기자로서 열정은 점점 더 수그러졌다. 의미를 찾을 수 없던 업무와 매일 이어졌던 술자리는 일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했다. 오랫동안 고민했던 그는 결국 2012년 사표를 냈다. 입사 7년 차였다.
대학시절 그는 어학연수나 해외여행을 경험하지 못한 채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퇴사를 하자 그동안 모은 돈과 퇴직금으로 3개월 정도의 자유를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부산에 계시는 부모님께 ‘여자친구와 함께 내려와 밥이나 먹자’는 연락이 왔다. 그때 그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의 부산행이 독일행으로 이어질 줄은.
- 기자 생활을 그만두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문화부 기자 생활하면서 고민이 많았어요. 문화부, 연예부를 많이 하다 보니 ‘내 비전이 뭘까, 나중에 뭐가 될까' 이런 생각들이요. 어떤 선배는 좋은 대학 나와서 정치부 가고, 방송국 출입하는 선배는 홍보팀도 갈 수 있고 다들 각자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데, 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고민도 많이 하고, 술도 많이 마셨어요. 월~금은 일 때문에 마시고, 그다음 금금은 신세 한탄하면서 마셨죠. 몸도 많이 망가져 있었어요.
그러다 스카우트 제의가 있어서 신문사로 옮겼는데 지면 기사를 쓰는 게 저와 안 맞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더 이직을 하면서 부서를 바꿨어요. 문화부는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정치부는 제가 원래 관심이 없었고요. 산업부로 가고 싶었는데 너무 인기가 많은 부서였고, 결국 관심 2순위인 증권을 다를 수 있는 금융 분야로 옮기려고 원서를 넣었어요. 그러다 보니 경력이 뒤죽박죽이 된 거죠.
- 이민은 언제부터 생각하셨어요?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생각은 했어요.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했지만 사실 독일에 가보지도 못했어요. 아버지가 다니시던 회사가 합병되면서 집안이 조금 어렵게 된 적이 있어요. 더군다나 동생이 악기를 하고 있어서 제가 어학연수를 갈 형편은 못됐죠. 일을 빨리해야 할 것 같았고, 졸업 전에 뉴시스에 인턴으로 들어간 거죠. 문화, 공연에 관심이 많아서 대학 때는 대학로에서 연출부를 하기도 했고요.
연예부 기자로 홍콩, 일본에 취재 갈 때가 있었어요. 그렇게 잠깐 출장 가거나 휴가 받아서 5~6일 정도 여행을 갔다 오면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사는 게 내 인생인가'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어요. 사람이 항상 마음속에 이상향을 가지고 있잖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언어 공부를 좀 더 해서 특파원으로 갈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했죠. 그래서 공부를 시작한 게 이민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일을 하면서도 영어 공부의 동기부여가 된 적이 있었는데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뮤지컬 작곡가(지킬 앤 하이드)인 프랭크 와일드혼 인터뷰였어요. 보통은 통역사가 있는데, 그때 무슨 이유였는지 없더라고요. “만나서 반갑다, 내가 진짜 팬이다”하고 나니, 다음 말이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보통은 질문지를 한글로 준비해 가니까요. 당시에는 구글 번역도 없었고, 이상한 번역기로 긁어서 겨우 인터뷰를 마무리했죠. 너무 충격이 컸어요. 그때부터 영어 공부는 꾸준히 했어요.
- 여러 나라가 있는데 독일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처음엔 영어권 나라를 생각했어요. 기자가 아닌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서, 한국 기업이 많은 말레이시아로 떠나는 구상도 했고요. 퇴사하고 며칠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있는데, 부산에 계신 부모님이 내려오라고 연락을 하셨어요. 여자친구도 결혼할 사이라는 걸 이미 알고 계실 때라 같이 내려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밥이나 먹자고.
아버지가 ‘앞으로 계획이 있냐’고 물으셔서 말레이시아에서의 취직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거기는 경기가 안 좋은 것 같으니 여동생이 있는 독일로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쪽으로 가면 허락해 주시겠다고. “알았다”고 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요. 사실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 독일로 가는 준비는 얼마나 하셨어요?
독일로 가기로 마음먹고 서울에서 어학원을 알아보고 있는데 부모님한테 다시 연락이 왔어요. 이왕 준비하는 거 저나 여자친구나 ‘서울 집 정리하고 부산에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죠. 서울 집 계약도 얼마 안 남은 시점이라 비용도 줄일 겸 바로 짐 싸서 내려갔어요. 이렇게 부산 내려가기까지 퇴사하고 일주일 걸렸어요.
부산에 도착하자, 부모님이 여자친구에게 말씀하셨어요. “너희 둘 결혼할 거지? 엄마, 아빠가 보증이라도 서서 우리 집이든 다른 집이든, 너가 편한 곳으로 집을 구해줄게. 너가 독일 가기 전 아니면 승영이가 취업하기 전까지 6개월에서 1년만 시간을 주면 안 되겠니?” 아내는 부산에 있고 저만 독일에 먼저 가서 자리 잡으라는 얘기였어요.
이미 제 비행기표까지 다 사놓으셨더군요. 그러면서 결혼하면 평생 함께 살 테니 1년 이별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저희를 설득하셨죠. 그렇게 설득당하고 일주일 반 동안 준비하면서 맨날 여자친구랑 꺼이꺼이 울었어요. 이 모든 일부터 출국까지 퇴사하고 한 달도 안 된 시간에 다 이뤄졌죠.
2012년 11월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그는 1년짜리 어학 비자로 독일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늦었다고 하기도 힘들지만, 별다른 준비 없이 유학을 떠나는 게 흔한 나이도 아니었다. 다행히 독어독문학이었던 전공 덕을 봐서였는지 5개월 차가 되자 원하던 등급(B2)의 어학 성적을 얻게 되었다.
- 처음 왔을 때는 어학비자로 오신 거죠?
네, 떠날 때 33살이라 워킹 홀리데이 비자도 안 되고, 아무것도 되는 게 없었어요. 어학비자를 신청해서 운 좋으면 2년도 나오는데 저는 1년을 받았어요. 어학 등급이 A1→A2→B1→B2→C1→C2 순서인데, C1이 돼야 대학에 갈 수 있어요. 어느 정도 생활할 수 있는 정도는 B1이면 되고요. 저는 대학에서 배운 게 있어 그런지 B2까지는 금방 올라가더라고요. 독일에서 대학 갈 건 아니니까 성적을 더 높일 필요는 없었죠.
처음엔 구체적인 목표가 있기보다는 막연하게 떠났기에 안 되면 돌아갈 생각도 했다. 하지만 첫 목표를 달성하고, 막상 비자가 6개월 정도 남게 되자 빨리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한국에서 힘들게 살지 말고 외국에서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여자친구한테 호언장담했던 순간과 ‘나이 들어서 미쳤냐, 쪽박 차고 들어올 거다’라고 말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마음이 급해졌어요.
우선 한국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대상은 한인신문이나 한국과 거래하는 물류회사로 좁혀졌다. 마음이 급해 바로 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인 신문사는 기사 건당 급여를 받는 구조라 경제적으로 어렵겠다고 판단했고, 물류회사는 채용 비수기(2, 3월)였다.
이곳저곳 알아봐도 취업에 별다른 진전이 없어 하이델베르크 강 근처에서 체념하고 있는데, 독일에 코트라(KOTRA)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무슨 용기에 그랬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는 곧장 그곳에 전화를 걸었다.
- 코트라는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 무역을 도와주는 곳이잖아요. 전화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처음엔 코트라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물류 쪽을 검색하는데 타고, 타고 들어가다 보니 프랑크푸르트에 지사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전화를 했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전화해서 바로 이렇게 말했어요.
“안녕하세요. 하이델베르크에서 어학공부하고 있는 이승영입니다. 제 말씀 좀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렇게 제 사정을 압축해서 말씀드렸더니 전화받으셨던 과장님이 이력서를 보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 코트라가 그런 업무도 하나요?
과장님의 업무가 그런 일이었는지, 아니면 제가 불쌍해서 개인적으로 도와주셨는지 모르겠지만 몇 군데에 이력서를 넣어주셨어요. 아무리 절실히 노력해도 안 되는 경우도 있지만, 뭔가 타이밍이 딱딱 맞아떨어질 때도 있잖아요. 제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게 처음 면접 본 회사가 지금 다니는 회사예요. 1차 합격됐다는 연락 후에 면접까지 3주를 기다렸어요. 독일어와 영어 면접을 봤는데, 그런 강단이 있었다면 한국에 있는 어느 회사라도 들어갈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미국계 물류회사인데 사장님이 교포세요. 프랑크푸르트 지점장은 한국분이고요.
처음엔 한국어로 구구절절 얘기했어요. 몇 시간을 얘기했는데 ‘자 다음은 독일어 면접’ 하시더라고요. 독일 직원이 독일어로 물어봤는데 뭐라고 답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영어 면접이라면 준비된 답변이 있었는데 독일어라 너무 당황했어요. 면접 보고 나왔는데 ‘떨어지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2주 정도 연락이 없었죠. 코트라 과장님께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부탁할 생각까지 했어요.
- 다른 곳도 준비하다 합격 연락을 받으셨나요?
아니요. 제가 원래 한 군데만 바라보는 성격이에요. 딱 2주가 되는 날 어학원 수업 시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B2까지 올라가서 ‘C1까지 해야 하나, 대학 입학을 해야 하나’ 생각이 많았죠. 이때 전화가 온 거예요. 받아보니 면접 봤던 회사의 담당자분이었어요.
독일어로 ‘Leider’는 유감스럽다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인데 그런 의미로 저한테 ‘이번 기회는 안 된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표정이 안 좋아지니까 수업하던 선생님도 지켜보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한국말로 “뻥이야!”라고 하시는 거예요. 알고 보니 마침 회사에 한 사람이 출산 휴가를 가게 돼서 타이밍이 딱 맞았던 거죠. 합격 연락받고 1주일도 안 돼서 프랑크푸르트로 넘어왔어요.
- 그 후 취업비자를 받으신 건가요?
그때 ‘이 나라에서 살 팔자인가 보다' 생각했어요. 다른 전공이라면 취업이 수월했을 수도 있는데, 저는 독어독문이잖아요. 독일에서 독어는 기본인데 이 전공이 무슨 플러스 요인이 되겠어요. 근데 다행히 우리 회사에서 한국인 바이어들을 상대하는 파트가 있었고, 마침 자리가 났고, 한국에 전화하는 업무도 있던 거예요. 제가 독일어 전공이라 독일어를 한다는 걸 미국 본사가 독일 관청에 설명해서 비자도 쉽게 받았어요. 이왕 이렇게 잘 맞아떨어진 거 재밌게 살자고 생각했죠.
저는 3년짜리 비자를 받았는데, 3년이 지나면 또 3년을 받을 수 있어요. 60개월 세금을 꾸준히 내면 영주권이 나오는데 요즘 법이 관대해져서 53개월이 되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권리가 나와요. 많은 세금(블루카드)을 꼬박꼬박 잘 내고 있다고 외국인청에서 인정이 되면 영주권이 더 빨리 나올 수도 있고요.
- 아내는 어떤 비자로 오셨어요? 독일어를 처음 배우셨을 텐데, 적응하는 건 괜찮았나요?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지금 회사에서 경력을 2~3년 정도 인정해 줘서 신입보다는 급여가 높았지만 둘이 생활하기엔 빠듯했죠. 아내가 한국에서 제 부모님과 지낼 때 일식,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어요. 덕분에 아내가 어학원 다니면서 8개월 동안 한인 레스토랑에 일할 수 있었어요. 부모님은 미리 그것까지 다 생각해 놓으셨던 거예요.
그러다가 운 좋게 독일의 대형 마트 중 하나인 레베(REWE)에 들어가게 됐어요. 저는 회사에서 한국사람들을 상대하는데, 아내는 손님과 동료들이 다 독일사람이잖아요. 어느 순간 저를 넘어서더니 지금은 저보다 독일어를 훨씬 잘해요. 레베에서 일 년 반 정도 일할 때는 노동허가를 받아서 일했는데, 지금은 저랑 결혼하고 동반 비자가 된 상태예요. 지금은 레베를 그만두고 다른 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회사 생활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집도 이사를 하고 나니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술을 좋아하는 편이라 저녁 시간에는 한국에서처럼 아내와 종종 술을 마셨다. 그러다 집안에 쌓여가는 맥주병을 보면서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부부는 새로운 취미로 블록 장난감을 모으기 시작했다.
새로운 취미를 찾은 것도 작은 변화지만 회사 생활을 하면서 그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처음 왔을 때 ‘한국으로 언젠가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지금이라고 해서 없어진 건 아니다. 다만 이곳의 생활이 충분히 행복하기에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잠시 접어 둘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고흐'와 노래를 좋아하는 아내에게 1년 뒤 돌아와서 고흐 작품도 보여주고,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도 보여주겠노라고 약속을 했었다. 아내가 독일에 왔을 때 그는 영국으로 가서 그 약속을 가장 먼저 지켰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이뤄가는 즐거움. 독일은 그와 그의 아내에게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중에 태어날 아기와 함께 만들어 갈 또 다른 꿈을 위해 독일에 남는 걸 선택했다. 누군가는 그가 운이 좋았다고 할 것이다. 이승영씨는 그것을 ‘타이밍'이라 했다. 이민이라고 해서 꼭 눈물 짜는 사연이 많아야 하고, 우여곡절이 많아야 하는 건 아니다. 절실함은 기본이지만 우울한 순간에도 ‘재미있게 살자'는 그의 인생관답게 언제나 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이 그가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 회사 생활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시겠어요?
배우면서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처음 들어가면 프로베차이트(Probezeit)라고 수습기간이 있어요. 한국처럼 수습이라고 월급을 적게 주거나 하지는 않아요. 월급을 주긴 주는데 6개월간 유예기간을 두는 거예요. 그동안 정말 게으르거나 일을 못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해고해도 법에 저촉이 안 돼요. 6개월 동안은 신입사원처럼 배웠어요. 물류는 처음이니까요. 회사에서 일하고 집에 가면 인터넷으로 많이 찾아봤어요. 선배가 가르쳐 준 걸 1부터 10까지 순서대로 적어 놓고 일할 때 하나씩 체크해 가면서 했죠. 그렇게 3~4개월 하니까 조금씩 수월해지더라고요.
저희 독일 지사엔 한국인, 독일인 직원이 함께 있어요. 저는 한국 및 중국 등 고객사의 항공물류를 주로 다루는데, 한국과는 시차가 있어서 거의 이메일로 일을 해요. 독일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한국사람처럼 이메일 쓰는 걸 어려워하세요. 독일에선 본론만 딱 쓰거든요. 제가 상대방이 좋아하게끔 이메일을 쓴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딱 부러지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거죠. 한국사람들이 그런 건 잘하잖아요. 이게 제 특기가 됐어요. 발표 자료를 만들 때 영어와 한국어 버전이 필요하면 제가 교정이나 문구 수정도 해요.
- 한국 기업을 고객으로 만나는 건 어떤가요?
시차 때문에 한국 사람과 접촉할 수 있는 시간이 업무 중에 2시간뿐이에요. 저희 회사는 전화를 받을 때 영어나 독일어로 받는데, 저도 일단 독일어로 받아요. 한국 전화인 걸 알고 제가 “안녕하세요"라고 받은 후에도 상대방이 ‘제가 교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는 않으세요.
물론 어떤 분은 문제가 생겼을 때 가끔 소리를 지르기도 해요. 한국에 있는 고객사 중에 물류회사를 을도 아닌 병, 정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어요. 처음엔 그것 때문에 우울증이 오더라고요. ‘사회생활 9년을 했는데, 여기 와서 안 먹던 욕을 먹고 있네’ 이런 생각이요. 근데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다 적응이 되더라고요. 제가 기자를 막 그만뒀을 때와는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이제 4년 차가 돼가니 꽤 적응했죠. 그럼에도 기자가 가끔 그리울 때가 있어요. 동등한 입장에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기자라는 특권은 정말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죠.
- 한국에서보다 시간적 여유가 많을 텐데, 외롭거나 심심하지는 않으세요?
그게 딜레마예요. 회식을 해도 맥주 한두 잔만 마시고 저녁 8시, 9시만 되면 집에 가는 거예요. 오후 6시에 일 끝나서 집에 오면 허무함, 허망함 같은 게 몰려오더라고요. 한국에서는 술 먹자고 부를 사람이 있는데 여기는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취미 생활을 찾게 되더라고요.
처음엔 ‘뭘 하지’ 그러다가 집에서 아내와 TV 보면서 맥주를 마셨어요. 근데 그런 생활이 한국이랑 똑같고, 술 먹는 비용도 만만치 않잖아요. 그래서 취미를 바꾼 게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어요. 그다음은 레고였어요. 가격이 비싸지만 매일 사는 게 아니니까요. 퇴근하고 혹은 주말에 짬 내서 하는 거라 완성하는 데 시간도 꽤 걸리고요. 요즘엔 아내와 빠른 걸음으로 돌아다니는 등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 향후에 독일 시민권을 받으실 생각이 있으세요?
저는 이민자이지만 시민권을 취득할 생각은 없어요. 우리나라 사람인 게 좋고요. 부모님 자식인데 족보에서 없어지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양쪽에서 이방인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건 기정사실이거든요. 노란 피부니까 독일에선 이방인이고, 독일 국적자면 한국에서도 이방인이잖아요.
여기서 고생스럽게 자리 잡은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누구나 살면서 목표가 있잖아요. 요즘 1년마다 부모님을 뵈면 날이 갈수록 연로해지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즐겁게 살자, 후회하지 말자,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잘하자.” 이런 생각도 많이 들고요. 부모님 연세가 있으시니 그분들이 여기 와서 살기는 힘들잖아요. 제가 연고는 여기에 두더라도 1, 2년이라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어요. 그 이유 때문에 한국에 가고 싶기는 해요. 그렇게 되려면 제가 한국에서 살 수 있는 여력이 있어야겠죠.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어렸을 때 못 누렸던 것들을 독일에서 태어날 아이에게는 누리게 해 주고 싶어요. 직장에 들어가더라도 정시에 퇴근하고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등이요. 교육도 그렇고요. 이 나라에서 태어나면 일단 3개 언어(한국어, 독일어, 영어)는 잘할 수 있잖아요.
아이들이 아기 때는 한국말만 배우다가, 유치원에서 독일어를 시작하면서 한국어를 등한시하게 된대요.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도 인지하게 되고요. 그 기간이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까지 가는데 그 무렵에 부모님이 잡아줘서 한글학교에 꾸준히 보내면 두 개 국어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한국어를 잘 못하게 되는 거죠. 우리 아이가 한국에 가더라도, 3개 언어를 한다면 좋은 스펙을 갖게 되는 거잖아요. 좋은 학교를 못 보내더라도 그것만큼은 해주고 싶어요. 외국 애들과 뛰어놀고, 자유롭게 언어를 구사하고, 대신 집에 오면 아빠랑 한국어 열심히 하고요.
- 독일 이민을 추천하나요?
사실 그렇게 추천하지는 않아요. 물론 야근 안 해도 되는 점은 좋기는 해요.(웃음). 그런데 요즘은 비자받기가 너무 어려워요. 제가 받을 때도 어려웠지만 지금은 난민 정책으로 더 오래 기다려야 하고 까다로워졌어요. 독일은 난민 수용 자체를 환영하는 나라예요. 하지만 최근 들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분별하게 난민들을 수용하면서 기존에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한 점이 분명히 있어요. 어느 동네 가면 여기가 독일인지 헷갈리는 곳도 있을 정도니까요. 동양인들이 살기 위험한 동네도 분명 있고요. 앞으로도 ‘난민 수용을 계속한다면 이보다 더 심해지겠구나’는 생각이 들어요.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영주권을 따는 게 목표라기보다 새로운 도전을 한 만큼 우선 이 회사에서 제 역량을 키우고 싶어요. 다방면으로 능력을 키워서 기회가 되면 다른 나라 지사로도 나가고도 싶고요. 유럽이잖아요. 내년이나 내후년쯤엔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고요.
자리가 조금씩 잡혀가면서 와이프한테 ‘이제 하고 싶은 일을 하자’고 그랬어요. 우리의 목표는 ‘재밌게 살자’니 그렇게 살자고요. 보험은 있어야 하니까 일을 등한시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독일에서 평생을 산다면 아내가 원했던 소중한 꿈들을 하나둘씩 이뤄주고 싶어요.
아내가 노래를 불렀던 친구이기도 해서 노래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50살이 되기 전에 무대가 있는 예쁜 카페를 하면서 거기서 노래도 하고, 저녁엔 간단하게 한국음식도 팔고요. 여기 와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힘들지 않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돈 많이 주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게 꿈이라면 꿈입니다.
o 노동허가, 체류허가 : 코트라(KOTRA)
o 관련 사이트 : BAMF
글쓴이의 한마디 : 저희가 만난 분들의 이민 이야기는 그분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비교하지도 말고, 함부로 재단하거나 동경(혹은 훈계) 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저 사람은 저런 선택을 했구나’라는 정도의 시각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행복을 찾아 한국을 떠난, 이민자 11팀의 정착 이야기가 담긴 저희 책이 나왔습니다.
브런치에는 없고 책에만 실린 인터뷰도 있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구매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