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대웅 Apr 25. 2024

찬란한 사랑의 추억

* 이 글은 @슈퍼피포 작가님의 2024년 4월 25일 글 <코노에서 학생을 만난다면!!??>에서 영감을 얻어 썼습니다.

     

제목을 써놓고 보니 낚시 싶다. 제목만 보면 격렬하고 애달팠던 옛사랑의 고백인 줄 알겠다. 하지만 아니다. 이 글은 한때 열심히 다녔던 (지금은 아니지만) 노래방의 추억에 대한 것이다. 존경하는 @슈퍼피포 작가님의 노래방 글을 읽고, 너무 재밌어서 나도 써 본다. 제목의 <찬란한 사랑>은 1996년의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히트곡이다. 만약 이 곡과 가수인 R.ef를 안다면, 당신은 빼박캔트 아재다.     

 



때는 1999년. 세기말의 음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입시지옥에서 막 탈출해 대학이라는 약속의 땅에 입성한, 스무 살의 신입생이었다. Y2K니 IMF니 취업난이니 하는 거대 담론은 알빠노였다. 그때는 정말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노는 데만 전념했다. 매일 새로운 사람과 어울리고, 이곳저곳을 쏘다니고, 술을 마시는 것만으로 재미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일과를 요약하면 이렇다. 모든 수업은 오후 5시면 끝났다. 물론 시간표상 6시까지 이어지는 수업도 있었다. 그런 수업은 5시에 과감히 자체 종료(즉, 땡땡이)했다. 그때쯤 사회과학관 앞으로 나가면 이미 친구와 선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선착순으로 10명쯤 차면 일단 술집으로 몰려갔다. 이후 또 10명이 차면, 추가로 몰려오는 식이었다. 보통 1차는 소주였다. 그리고 2차는 막걸리, 3차는 맥주로 이어졌다. 왜 알코올 도수의 역순이었냐고? 돈 없는 학생들이라, 빨리 취해서 낙오자를 걸러내야 했기 때문이다. 1차부터 맥주로 시작하면 술값이 감당 안 됐다(…) 3차까지 끝나면 밤 11시쯤 되었다. 그럼 4차로 노래방에 갔다가, 5차는 과방이나 누군가의 자취방으로 가서, 다음 날까지 디비 잤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체력 좋았다. 저 짓을 2년 넘도록 하다가 군대에 갔으니.

     

노래방은 이 일과의 하이라이트였다. 지금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못 부르는 나지만, 그땐 달랐다. 심지어 친구들과 노래방 모임도 했었다. 이름이 <노찾사>였다.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노래방을 찾는 사람들>의 약자였다. 학교 앞에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노래방이 있었는데, 다른 곳보다 좀 더 쌌다. 그곳이 <노찾사>의 회합 장소였다. 지하라서 곰팡이도 많고 꾸릿꾸릿한 냄새도 났지만, 괜찮았다. 혜자인 가격이 그 모든 단점을 상쇄했으니.

     

그 시절은 김경호가 전국의 노래방을 평정하던 때였다. 친구들과 계단을 내려가 노래방에 들어서면, 어느 방에선가는 꼭 “저 하이 너어를 사아랑훼~~~” 하면서 절규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노찾사>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당시만 해도 팝송의 신봉자라, 가요는 거의 듣지 않았다. 내 가방에는 보이즈투멘, 머라이어 캐리, 베이비페이스 같은 해외 뮤지션들의 CD 가득했었다. 그런데도 노래방만 가면 친구들과 김경호 노래를 불렀다. 특히 <금지된 사랑>과 <나의 사랑 천상에서도>가 레퍼토리의 양대 산맥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노래를 못한다는 걸 몰랐다. 어느 날 친구가 그랬다. “야 너는 왜 모든 노래의 키를 죄다 춰서 부르냐?ㅋㅋㅋ” 이럴 수가. 내 딴에는 원키로 부르는 거였는데. 내가 고음고자라는 걸 처음 인지한 순간이었다. 친구들이 그렇게 놀리자 더는 김경호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김경호 노래는 간지가 생명인데, 나의 처참한 고음으로는 도무지 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지가 안 나는 김경호 노래니, 차라리 안 부르니만 못하다.

     

그래서 어느 날 노선 전환을 선언했다. 발라드가 아닌 다른 장르로! 그렇게 장착한 신무기가 제목에서도 인용한 R.ef의 <찬란한 사랑>과 나훈아의 <건배>였다. 이 노래들은 고음이 안 되어도 괜찮았다. 아무리 음정이 나가도, 일단 부르기만 하면 분위기가 활활 타올랐다. 아마 들어보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노찾사> 세 명 중 가장 량이 떨어지는 나였지만, <찬란한 사랑>을 떼창할 때는 달랐다. 그때만큼은 내가 이성욱이었고 나머지 둘이 성대현과 박철우를 맡았다. 왜냐면 도입부의 오글거리는 랩을 소화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두 놈은 도저히 이것만큼은 못 부르겠다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마이크를 넘겨받은 내가, 김경호를 못 불러서 한 맺힌 목소리로, 이 곡의 백미인 도입부 랩을 완창(?)하고는 했다. 그러면 뒤에서 보던 두 놈이 역시 이 노래는 너만큼 잘 부르는 사람을 못 봤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지금 생각해보니 칭찬이 아니라 비웃음이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른 요즘에는 노래방에 가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회식문화에 질려버린 탓이다. 회사생활 초창기에 음주가무와 노래방에 진심이었던 상사분이 있었다. 그분과 일할 때는 6시에 퇴근한 기억이 없다. 항상 야근 -> 저녁회식 -> 노래방이 디폴트였다. 처음에는 나도 사회생활 한답시고 <노찾사> 시절 익혔던 절대 무공을 대방출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나 가야 그것도 통하지. 나중에는 체력도 떨어져서 노래방에 가면 취한 채로 그냥 잤다. 마지막으로 노래방 가본 게 10여 년 전이다. 그것도 내 결혼식에서 셀프 축가를 부르려고 연습하러 간 거였다. 당연히 MZ세대의 아이콘인 코인노래방은 가본 적도 없다.

      

그러다 오늘 문득 @슈퍼피포 작가님의 코인노래방 글을 읽고, 그 시절이 불현듯 떠올랐다. 코인노래방이란 곳은 1시간이 아니라 한두 곡만 부르고 나와도 괜찮은 시스템인 듯하다. 그럼 나도 오랜만에 한번 <찬란한 사랑>이나 불러볼까? 도입부 랩이 여전히 되려나 싶어서 가사를 떠올려 보니, 이럴 수가 아직도 생각난다. “너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어. 내가 내 불행마저 감당할 수 없는데~” 역시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새긴 기억은 오래가는 모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곁에 있지만 닿을 수 없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