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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Apr 29. 2024

알아두면 피와 살이 되는 일본의 과학 문화 (2)

1922년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는 단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1905년 26살의 아인슈타인은 300여 년 전 아이작 뉴턴이 쌓아 올린 근대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그것도 단 3편의 논문(광전효과, 브라운운동, 특수상대성이론)으로. 남들은 평생 걸려도 못 이룰 성과를 한 해에만 세 개나 이룬 셈이다. 그러니 이미 이 시점에서 노벨상은 확정적이었다. 아인슈타인도 이를 잘 알아서, 1919년 첫째 부인과 이혼할 때 노벨상 상금을 위자료로 주겠다고 약속할 정도였다.

     

1921년, 맡겨놓은 물건을 찾아가듯 아인슈타인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이 결정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소식을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서 접했다. 고베항에 내린 아인슈타인은 큰 환대를 받았다. 가는 곳마다 그의 강의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아인슈타인이 머무른 43일 동안 강의를 들은 일본인만 1만 4천 명에 달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현대 물리학을 새롭게 연,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난해한 것임에도 그랬다.

     

당시 중학생이던 유카와 히데키도 이때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들었다. TV도 없던 시대에, 과학자를 꿈꾸던 변방의 소년에게 세기의 천재와의 만남은 감격스러웠다. 아인슈타인 이후에도 석학들의 일본 방문은 끊이지 않았다. 코펜하겐 학파의 수장인 닐스 보어를 비롯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폴 디랙 등이 줄줄이 일본을 찾았다. 이들은 훗날 양자역학의 전성기를 여는 주역이 된다. 덕분에 대학생 유카와는 하이젠베르크와 디랙으로부터 불확정성 원리와 전자의 상대성이론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저자 직강의 끝판왕이라고 할 만했다.

1922년 일본을 방문한 아인슈타인은 엄청난 환대를 받았고, 과학에 대한 범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후학들이 그의 강연을 듣고 과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유카와는 중간자 이론을 발표했다. 원자핵에는 양전하를 띠는 양성자와 전하가 없는 중성자가 함께 존재한다. 이것은 원자핵 내부에는 양전하를 띠며 서로 강하게 밀어내는 힘만 존재함을 함의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원자핵이 어떻게 강한 반발력을 이겨내면서 유지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비밀을 밝힌 것이 유카와의 중간자 개념이었다. 유카와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중간자라는, 전자의 200배 정도 질량을 갖는 미세한 입자를 서로 교환하면서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몇 년 뒤 이 예측이 실험으로 검증되었고, 유카와는 단숨에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마침내 1949년, 유카와가 일본의 첫 노벨상(물리학상)을 받았다. 이 수상이 대단한 이유는 그가 순수 국내파였기 때문이다.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오사카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유카와는 중간자 이론으로 유명해진 1939년에야 처음 해외에 나갔다. 그때까지는 굳이 일본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이미 국내에 세계 수준의 연구 환경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석학들이 방문한 것도 연구 파트너로서 일본의 수준을 인정한 결과였다. 젊은 유카와는 그들이 전하는 최신의 지식을 자양분으로 흡수했다. 그럼으로써 일본 내에서도 세계 수준의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변방의 일본은 세계 과학계와의 교류를 통해 월드 클래스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 정부는 유학생들을 미국과 유럽으로 꾸준히 보냈다. 사무라이 출신 야마카와 겐지로도 그중 하나였다. 1871년 그는 “물리학이야말로 서양 학문의 왕”이라고 한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감명받아 예일대학으로 가서 물리를 전공했다. 그리고 4년 뒤 돌아와 일본의 첫 물리학 박사가 되었다. 도쿄제국대학 교수와 총장을 지낸 그가 가장 역점을 둔 일은 미국의 물리학을 일본에 이식하는 것이었다. 이에 수많은 제자를 키워내는 한편, 서양의 물리학 용어를 번역하고 전국 대학에 물리학과를 개설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제자 나가오카 한타로를 자신이 그랬듯 외국으로 보냈다. 통계역학의 창시자인 루트비히 볼츠만의 연구실이었다. 이 나가오카의 제자가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니시나 요시오다.

     

니시나 역시 두 스승의 대를 이어 해외로 나갔다. 바로 양자역학의 본고장 코펜하겐대학이었다. 니시나는 그곳에서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랙과 함께 연구했다. 특히 지도교수인 보어는 니시나를 위해 이곳저곳에 추천서를 써줄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양자역학의 선구자들이 차례로 일본을 방문한 배경에는 바로 이런 끈끈한 네트워크가 존재했다. 귀국 후 이화학연구소에 연구실을 꾸린 니시나는 코펜하겐의 동료들을 초청해 제자들에게 강의하도록 했다. 그 제자들이 바로 유카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다.

     

이때쯤 되자 일본의 물리학도들에게 더는 해외 유학이 필요 없어졌다. 유카와와 도모나가는 유럽의 양자역학을 재해석해 독창적인 분야 – 장의 양자론, 양자전기역학 – 를 개척했다. 그리고 조국에 첫 번째와 두 번째 노벨상을 안겼다. 두 선각자는 그대로 일본 과학도의 롤모델로 자리잡았다. 현재까지도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들은 대부분 국내파다.

후지산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한 닐스 보어(오른쪽 두 번째). 제자 니시나 요시오(오른쪽 끝)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해 젊은 물리학도들을 위해 강의했다.

     

회사원 노벨상 수상자들

     

노벨상 수상자라고 하면 나이 지긋한 교수님이 떠오른다. 평생 상아탑에 틀어박혀 학생들을 가르치고, 세기의 난제와 씨름하는 백발 성성한 노교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와인버그가 그런 이미지를 대표한다. 사실 통계로 봐도 수상자들 대부분은 대학교수이다. 그런데 유독 일본은 예외다. 일본에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이 꽤 있다.

     

그 기원이 되는 인물이 에사키 레오나다. 유카와와 도모나가에 이어 일본의 세 번째 노벨상을 받았다. 이론물리학자였던 두 선배와 달리 에사키는 엔지니어였고, 발견 당시에는 박사학위도 없었다. 1957년 도쿄통신공업(현재의 소니)에서 일하던 그는 불순물이 다량 포함된 다이오드에서 기묘한 현상을 발견했다. 전압을 높이면 전류가 늘어나야 하는데, 반대로 전류가 감소했던 것이다. 에사키는 이것이 그간 이론적으로만 예측되었던 터널링 현상임을 알아냈다. 그래서 이 성질을 활용한 '에사키 터널 다이오드'를 제작했고, 이 성과로 1973년 노벨상을 받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큰 반향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보다는 미국에서 관심을 표했고, 결국 1960년 에사키는 미국 IBM으로 이직하여 반도체 연구를 계속했다. 에사키는 1992년 일본으로 돌아와 교육행정가로 변신했다. 쓰쿠바대학 총장으로서 기업, 대학, 정부의 연계를 강화하는 개혁을 추진했고, 2000년에는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부탁으로 교육개혁국민회의 의장까지 맡았다.

     

2002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다나카 고이치는 가장 특이한 수상자일 것이다. 그는 노벨상 역사에서 유일하게 최종 학위가 학사다. 전공도 화학이 아닌 전기공학이었다. 1983년 시마즈 제작소라는 교토 지방기업에 입사하여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다.

작업복 차림의 일본 회사원 노벨상 수상자들. 왼쪽부터 다나카 고이치(2002년 화학상), 나카무라 슈지(2014년 물리학상), 요시노 아키라(2019년 화학상).


다나카가 노벨상을 받은 성과는 단백질 같은 고분자 물질의 질량을 순간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이다. 여러 종류의 단백질을 구별하는 유용한 방법은 그 질량을 측정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단백질을 이온화해야 한다. 다만 이온화를 하려고 높은 에너지를 가하면 단백질이 파괴되는 문제가 있었다. 당시 다나카는 레이저를 썼는데, 레이저를 쏘면 강한 빛과 열에 단백질 시료가 타 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몇 년간 200여 가지 시약을 완충재로 테스트해봤으나 죄다 실패했다. 그러던 1985년 대반전이 일어났다. 다나카는 늘 사용하던 아세톤 대신 글리세린을 시료에 섞는 실수를 범했는데, 버리기는 아까워 그대로 실험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레이저를 쏘아 글리세린을 증발시키자 이온화에 성공했다. 다나카는 우연한 세렌디피티의 결과를 놓치지 않고 실험을 거듭했다. 결국 1987년, 레이저를 이용하여 고분자 단백질의 종류와 양을 효과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기법을 완성했다. 이 기법을 통해 암과 같은 중병의 조기 발견과 신약 개발이 가능해졌다.

     

노벨상은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들이나 받을 것 같지만, 다나카의 사람됨은 그와는 달랐다. 그는 명문 도쿄대학이나 교토대학이 아닌 도호쿠대학 출신이었다. 그마저도 성적 미달로 1년을 유급했고, 소니 등 대기업 입사 시험에 번번이 떨어졌다. 눌변이라 면접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결혼도 20번이 넘는 맞선 끝에 겨우 할 수 있었다(…). 그러다 지도교수의 알선으로 들어간 시마즈 제작소에서 단백질 질량 분석에만 집요하게 매달렸고, 그렇게 한 우물을 판 몇 년 만에 세계적인 성과를 냈다. 노벨상 수상 과정도 재미있다. 노벨재단의 전화를 받고는 노벨이라는 이름의 다른 상이 있거나 동료들이 장난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다 정말 노벨상을 받게 되었음을 알고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는데, 회사에서 입던 작업복 차림 그대로였다. 일본의 과학정책을 총괄하는 문부과학성도 수상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다나카 고이치가 누군지 몰라 인터넷 검색으로 소속을 알아내야 했다. 그간 일본이 노벨상을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니지만, 다나카의 평범한 모습은 일본 기술자의 장인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많은 일본인의 공감을 샀다.

     

이 밖에도 나카무라 슈지(2014년 노벨물리학상), 요시노 아키라(2019년 노벨화학상)도 비슷한 사례로 꼽힌다. 두 사람은 아이디어는 일찍 알려졌으나 상용화의 발목을 잡던 기술적 문제를 해결했다. 그럼으로써 LED와 리튬이온전지라는, 인류 삶의 일대 혁신을 가져온 제품을 만들어냈다. 이들도 다나카처럼 회사의 에이스는 아니었다. 이론적 우수성보다는 될 때까지 실험하고 재도전하는 장인의 철학을 실천했다.

      

니치아화학공업의 개발과장이었던 나카무라는 세기의 난제라던 청색 LED 개발에 꼬박 3년을 바쳤다. 그 시간 동안 사적인 약속을 일절 잡지 않았고, 실험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죄다 써본 뒤에야 기존보다 100배 밝은 청색 LED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성과가 나오기 전까지 동료들로부터 “나카무라는 돈 안 되는 엉뚱한 일에만 몰두한다”라는 욕을 먹었음은 당연하다. 아사히카세이의 엔지니어였던 요시노는 원래 전도성 고분자를 개발했었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갔고, 소일거리로 논문을 읽다가 미국에서 개발 중이던 리튬이온전지를 알게 되어 연구방향을 바꿨다. 요시노도 5년간 리튬이온전지의 재료로 온갖 것을 다 써본 끝에 석유코크스라는 물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물질은 일본에서 쓰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이걸 구하러 다닌 요시노가 경찰의 조사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이렇듯 나카무라와 요시노 모두, 천재의 번뜩임보다는 긴 시간 도전과 재도전의 무한 반복으로 혁신적 돌파구를 만들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80년대 세계 반도체 업계를 석권한 일본 기업들. 이 기업들은 수익의 상당 부분을 R&D에 쏟아부었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혁신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인내심 있게 지원했다.


물론 이것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는 않았다. 회사원 노벨상 수상자는 고도성장기 일본의 독특한 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70~80년대 일본 기업들은 수출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고, 수익의 상당 부분을 R&D에 재투자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물질적으로 풍족하면 마음도 너그러워진다. 당시 일본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자제품, 자동차 등 기술 개발로 부를 쌓자 더욱 혁신적인 기술이 지상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기업들은 이공계 인재들을 경쟁적으로 채용하고 충분한 연구자금을 주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새로운 걸 만들어오라"는 요구였다. 설령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지원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다나카, 나카무라, 요시노가 몇 년 동안 한 우물만 팔 수 있었던 배경이다. 결국 세계를 주도한 일본의 혁신기술들은 우수한 인재, 충분한 지원, 장인의 문화가 결합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다나카의 노벨상 수상 소감에 그 비결이 집약되어 있다.

“나는 실험을 거듭하면서 많은 실패를 했다. 만약 연구비를 낭비한다고 질책하는 회사였다면 벌써 해고됐을 것이다. 회사 경영진은 미래에 활용할 만한 신기술이라면 아무것이나 연구해도 좋다며 연구예산을 쉽게 배정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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