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일본 과학의 약진은 눈부셨다. 총 25명의 노벨상 수상자 중 17명이 2000년 이후에 쏟아져나왔다. 1980년대 미국을 턱밑까지 추격한 일본에는 그야말로 돈이 넘쳐났고, 상당 부분을 R&D에 투자했다. 그것이 축적의 시간을 거쳐 엄청난 성과로 돌아오는 시점이 2000년대였다. 흔히 일본 거품경제 시대의 돈 잔치를 비판적으로 묘사하지만, 과학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도 컸던 셈이다.
그중 2008년의 노벨물리학상은 일본에도 기념비적이었다. 3명의 공동 수상자가 전부 일본인이었다. 이전에도 노벨상을 단독 또는 공동 수상한 일본인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들끼리만 수상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 주인공은 난부 요이치로, 고바야시 마코토, 마스카와 도시히데다. 이들은 원자 이하 세계에서 나타나는 대칭성 깨짐의 원리를 발견한 공로로 수상했다.
빅뱅 우주론의 관점에서 대칭성 깨짐은 현재의 우주와 인간이 존재하는 근거가 된다. 140억 년 전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했을 때, 모든 것은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즉 물질과 반물질, 입자와 반입자가 똑같이 존재했고, 이것들은 서로 충돌하면서 빛을 내며 소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대칭성이 깨지면서 반물질, 반입자가 빠르게 사라졌다. 그 결과가 바로 물질과 입자로 이루어진 현재의 우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세 일본인 학자는 이러한 ‘존재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해답을 내놓았다.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고바야시 마코토, 마스카와 도시히데, 난부 요이치로(왼쪽부터). 일본인들로만 노벨상을 받은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먼저 난부가 1960년 대칭성 깨짐의 한 종류인 자발적 대칭성 깨짐의 메커니즘을 수학으로 설명했다. 난부의 이론은 곧 우주를 기본 입자와 기본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표준모형과 합쳐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도입된 것이 저 유명한 힉스 입자다. 힉스 입자는 자발적 대칭성 깨짐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며, 그럼으로써 물질이 질량을 갖게 된다. 모든 물질에 질량을 부여하는 ‘신의 입자’라는 별명은 그래서 얻게 된 것이다. 요컨대 21세기 물리학의 최대 프로젝트였던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힉스 입자 발견에 이론적 출발점이 된 것이 난부였다.
그리고 1972년 고바야시와 마스카와가 표준모형에서 대칭성 깨짐이 일어날 수 있음을 규명했다. 이 고바야시-마스카와 이론의 핵심은 표준모형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인 쿼크가 6종 이상일 때 대칭성 깨짐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1964년 처음 제안된 쿼크는 한동안 3종류(u, d, s)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고바야시와 마스카와는 현재의 우주를 형성한 대칭성 깨짐이 일어나려면, 이론적으로 쿼크가 6종류 이상 있어야 한다고 가정했다.
1970년대 당시 6종의 쿼크라는 예측은 황당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래서 고바야시와 마스카와도 너무나 파격적인 이 가설을 논문에 넣어야 할지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발표 직후에도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물론 이 논문이 <Progress of Theoretical Physics>라는 일본 저널에 실렸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1974년 c-쿼크, 1976년 b-쿼크가 차례로 발견되자 고바야시와 마스카와는 세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94년 t-쿼크가 발견됨으로써 6종의 쿼크가 완성됐다. 다만 이것만으로 고바야시-마스카와 이론의 증명은 불충분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츠쿠바의 고에너지 가속기 연구기구를 b-쿼크의 생성 실험에 집중 동원했다. 노벨상 수상이 점점 현실화되니까 국가가 나선 것이었다. 어쨌든 그 결과로 노벨상을 받을만한 실험적 완성도를 갖출 수 있었다.
3명 중에서도 마스카와 도시히데는 특이했다. 그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 어찌나 못 했는지, 관련 일화들이 한둘이 아니다. 나고야대학을 졸업한 그가 대학원에 지원했을 때 영어 성적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정말 합격시켜야 할지 교수들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또 학자로서 명성을 쌓자 국제학회 초청도 많이 받았는데, 영어로 발표하기가 싫어서 대부분 거절했다. 어느 학회에선가는 영어로 쓴 발표 스크립트만 읽고, 질문은 받지 않고 그대로 내려온 적도 있었다. 연구하는 내내 영어 논문 작성은 동료인 고바야시 마코토가 전담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본인이 직접 써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단어의 스펠링부터 너무 많이 틀렸다고 한다.
마스카와가 처음 여권을 만든 것은 2008년이다. 스웨덴에 노벨상을 받으러 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고야 토박이로 나고야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쳤다. 이후에는 교토에서 평생 연구했다. 명문대 교수이면서도 영어가 싫어서 국제학회에는 가지 않았으니, 여권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노벨상 시상식도 사교모임에 불과하다며 가는 걸 내켜 하지 않았다.
압권은 시상식의 하이라이트인 수상 소감이었다. 마스카와의 첫 마디는 “미안합니다. 나는 영어를 할 줄 모릅니다(I’m sorry. I can’t speak English.).”였다. 그리고는 일본어로 소감을 말했다. 노벨상 시상식에서 일본어로 수상 소감을 말한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1968년 『설국』으로 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다. 그런데 가와바타는 도쿄제국대학 영문학과 출신으로 영어를 상당히 잘했다. 그럼에도 일본어로 말한 이유는 일본 문화의 아름다움을 강조(주제가 ‘아름다운 일본과 나’였다)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마스카와는 가와바타처럼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경우였다.
마스카와 도시히데는 2008년 노벨상 시상식에서 역사상 두 번째로 일본어로 소감을 말했다.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부러 영어로 안 한 것이었지만, 그는 못한 것이었다.
마스카와는 평화주의자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1940년생인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직접 겪었다. 그래서 늘 자신이 '전쟁을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고 강조하고는 했다. 여기에 은사인 사카타 쇼이치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다. 사카타는 쿼크 이론을 정립한 세계적 이론물리학자였다. 그의 평소 소신은 “과학자로서 학문을 사랑하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인류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촉구한 퍼그워시 회의에 참여했고, 대학의 권위적 문화를 민주화하는 데도 앞장섰다.
마스카와도 학자로서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그는 교수 재직 시절, 비정규직 연구자의 해고를 막고자 노조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심지어 이때는 그가 노벨상 수상의 근거가 된 논문을 쓰고 있던 중요한 시기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나중에 노벨상을 받는 스타 과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해 시간강사들과 연대투쟁한 사례쯤 될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대학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들어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9조 과학자 모임’을 주도한 것도 마스카와였다. 사실 사회 현안에 개입하는 게 과학자로서는 그다지 좋은 소리를 못 듣는 일이다. 십중팔구는 아마 “너 연구 안 하냐?”라는 비아냥을 들을 것이다. 하지만 마스카와는 노벨상 수상자라는, 과학자로서는 끝판왕이었으니 괜찮았다. 그래서 이 모임의 대변인으로 활동했고, 아베 신조 내각의 안보 법안을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칠순이 넘은 그가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었다.
마스카와 도시히데는 아베 신조 내각의 평화헌법 개정 시도에 반대하는 과학자 모임을 이끌었다. 과학자는 학문 이전에 인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2021년 7월 31일, 그의 부고가 전해졌다. 지병인 잇몸암으로 투병하다가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일본인이었지만 일본의 우경화에 비판적이었고 한국에도 애정을 표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죽음을 국내 언론들도 많이 보도했다. 과거 그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노벨상을 받을 만한 과학적 기반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결과 입증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기초과학보다 성과가 빨리 나오는 생리의학을 우선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도 남겼다. 그의 기대대로 조만간 한국에서 첫 번째 노벨상이 나올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쩌면 한국에 노벨상 수상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그처럼 인류애를 실천하는 과학자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