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노벨상 부심은 엄청나다. 단순히 개수만 많아서가 아니다. 수상자 대부분이 국내파라는 점이야말로 부심의 근본이다. 아시아 최초의 노벨과학상은 인도의 찬드라세카라 벵카타 라만(1930년 물리학상)이 받았다. 그런데 라만은 영국령 인도 제국 출신으로 영국의 교육을 받았던 학자다. 반면 아시아 두 번째로 수상한 일본의 유카와 히데키(1949년 물리학상)는 다르다. 그는 일본에서 학‧석‧박사학위를 받고 수상 근거인 중간자 이론을 발표했다. 이후의 수상자들도 이 경로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중에는 영어를 아예 못했던 마스카와 도시히데(2008년 물리학상) 같은 특이 사례도 있었다. 미국으로 귀화한 수상자도 3명 있지만, 그들도 모두 국내에서 학위과정을 마쳤다.
비결이 뭘까?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우수한 국내파 인재를 키우는 국립대학 시스템을 중요하게 꼽을 수 있다. 일본에서 학문과 연구에 뜻을 둔 인재들은 보통 국립대학에 진학해서 박사과정까지 그대로 쭉 마친다. 그 배경에는 사립대학 출신은 끼기도 힘든 국립대학만의 강력한 네트워크와 국가의 전폭적 지원이 존재한다. 실제로 25명의 노벨상 수상자 전원이 국립대학(옛 제국대학 포함) 출신이다.
유카와 히데키(1949년 노벨물리학상)는 일본 노벨상 수상자들의 롤모델과도 같다. 국립대학의 전신인 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순수 국내파로서 연구했다.
국립대학은 일본의 엘리트 교육과 연구체제의 정점에 위치한다. 특히 옛 제국대학의 후신인 7개 대학(도쿄대학, 교토대학, 도호쿠대학, 규슈대학, 홋카이도대학, 오사카대학, 나고야대학)이 그렇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립대의 영향력이 급감하는 추세인데, 일본은 반대인 셈이다. 보통 일본의 도쿄대학, 와세다대학, 게이오대학을 우리나라의 SKY 포지션으로 퉁치는 경우가 많으나, 그렇지 않다. 와세다와 게이오는 사립대학이다. 일본 명문대학 순위는 일단 7개 국립대학(구제국대학)이 최상위 기본값을 형성한다. 우리로 치면 서울대,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 같은 학교들이 가장 높은 입결을 기록하는 모양새다. 여기에 이공계 특화 대학인 도쿄공업대학도 7개 국립대학과 비슷한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카이스트 포지션으로, 2000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시라카와 히데키가 이곳 출신이다.
이공계로 오면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의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국립대학이 정부로부터 넘사벽의 지원을 더 받기 때문이다. ‘넘사벽’이라는 표현이 좀 과해 보이지만, 진짜다. 2022년 일본 사립대학 협회 통계를 보면, 학생 1명에 대한 정부 지출은 국립대학이 사립대학보다 13배 많다. 이 차이를 만드는 여러 요인 중 하나가 연구비다. 일본 국립대학의 중요한 특징은 태생부터 이학부, 공학부, 의학부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문과 계열 학과들은 비중이 작았거나, 나중에야 만들어졌다. 이런 전통으로 인해 7개 국립대학(+도쿄공업대학)의 이공계 연구중심대학 정체성은 아주 확고하다. 그래서 국립대학에는 정교수를 중심으로 부‧조교수, 박사후연구원, 대학원생 등이 연구실을 이루는 시스템이 정교하게 갖춰져 있다. 이는 일본 특유의 도제식 교육과 결합하며 이론과 지식을 집중 연마하는 연구문화를 만들어 낸다. 여기에 정부가 지원하는 거액의 연구비가 더해진다. 그러니 경쟁력이 좋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일본 국립대학의 우수성은 여러 지표에서 드러난다. 두 가지 순위를 보자. 먼저 영국에서 발표한 QS 2024년 세계대학 랭킹이다.
2024년 QS 세계대학 랭킹의 도쿄대학과 교토대학 비교
일본을 대표하는 국립대학인 도쿄대학은 28위, 교토대학은 46위다. 비슷한 순위의 대학들을 보면 이들의 위상이 짐작된다. 도쿄대학은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과 UCLA 사이에, 교토대학은 영국 런던정경대학과 네덜란드 델프트 공과대학 사이에 위치한다. 종합순위 못지않게 눈에 띄는 것은 세부지표다. 연구역량을 평가하는 지표인 학술적 명성(academic reputation)에서, 도쿄대학은 만점(100점)이고 교토대학은 98.7점이다.
다음으로 네이처 인덱스다.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가 발표하는 연구기관별 순위다. 간단히 말해서 과학계에서 저명한 학술지들에 얼마나 많은 논문을 내는지를 측정한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QS 랭킹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QS 랭킹에는 대학만 포함되지만, 네이처 인덱스에는 대학, 연구소, 기업, 병원 등이 죄다 들어간다. 또한 QS 랭킹은 교육환경도 평가하나, 네이처 인덱스는 오직 연구실적만 본다.
네이처 인덱스가 발표한 가장 최근 순위(2023.1. ~12.)
가장 최근의 네이처 인덱스 순위에 따르면 도쿄대학은 19위다. 미국 국립보건연구원(모더나와 코로나19 백신을 공동개발한 그 연구소 맞다)과 영국 옥스퍼드대학과 비슷하다. 교토대학은 47위다. 중국 텐진대학과 미국 시카고대학 사이에 위치한다. 두 국립대학 모두 과학 전공이 아닌 사람도 알만한, 유명한 연구기관들과 비슷한 순위권에 있다.
국립대학에는 일본의 근대과학사가 투영되어 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는 철저히 국가가 주도했고, 과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메이지정부는 유학생을 해외로 꾸준히 보내는 한편, 국내에는 과학 인재를 키울 수 있는 제도와 기관을 만들었다. 이러한 기조에 따라 “과학 연구는 국가가 책임지고 지원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국가의 전략과 투자는 오늘날 일본 과학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국립대학의 전신인 제국대학의 첫 개교는 1886년 도쿄제국대학(현 도쿄대학)이다. 메이지정부가 반포한 제국대학령 1조에는 “국가의 수요에 의한 학술기예를 가르치고 그 학문의 깊은 경지를 연구”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즉 제국대학은 처음부터 국가 엘리트 교육기관으로서 출범한 것이다. 그래서 전국에서 최고의 인재만 선발했고, 첨단 학문을 전공한 해외 유학파들이 교수진을 구성했다. 이 점에서 프랑스의 에콜 폴리테크니크와도 성격이 비슷하다. 제국대학은 원래 도쿄에만 둘 계획이었지만, 근대학문이 발달하면서 그 수요도 늘었다. 그래서 1897년 교토제국대학을 필두로 1939년 나고야제국대학까지 6개를 더 설치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제국대학을 본토 외에 식민지에도 두었다는 점이다. 조선과 대만에도 1924년 경성제국대학, 1928년 대북제국대학을 개교했다. 그리고 이 경성제국대학이 잘 알려진 것처럼 오늘날 서울대의 전신 중 하나다. 정확히 말하면 경성제국대학의 예과, 법문학부, 이학계열이 1946년 서울대 문리과대학으로 계승된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과거 한일 간 국제학회가 열리면, 제국대학 출신 노학자들이 일본 사립대학 교수는 무시해도 서울대는 조다이(城大, 경성제국대학의 약칭)라며 교수들을 우대했다고 한다(...). 물론 다 지나간 옛날이야기다.
서울 동숭동에 있는 옛 경성제국대학 건물(현 예술가의 집). 1946년 서울대 문리대가 이 건물을 이어서 썼으나,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했다.
구제국대학 중에서도 도쿄대학과 교토대학은 양강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인지 라이벌 의식도 강하다. 단순히 입결로 따지면 도쿄대학이 높다. 그런데 교토대학에는 궁극의 비기가 있다. 바로 노벨상이다. 전체 수상자 25명 중에 가장 많은 8명이 교토대학 학부 출신이다. 도쿄대학 출신은 6명뿐이다. 이는 일본 과학계에서도 유명한 질문이다. 왜 교토대학은 노벨상을 많이 받는데, 도쿄대학은 그렇지 못한가? 물론 그 이유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역사가 100년이 훌쩍 넘어가는 두 학교를 몇 가지 지표에 근거해서 단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두 학교의 학풍 차이를 고려해볼 수는 있다. 도쿄대학은 국가고시에 합격해서 관료와 정치가로 성공하는 엘리트 이미지가 강하다. 반면 교토대학은 기초학문의 궁극을 파고드는 괴짜 또는 너드 이미지가 있다. 실제로 교토대학의 학풍은 자유방임에 가까워서, 교수와 학생들이 뭘 하든 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 차원에서 특이하고 기괴한 연구를 하도록 장려한다. 천재와 괴짜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믿음인데, 이 특징이 잘 나타나는 것이 졸업식이다. 교토대학 졸업식에 참석하는 학생들은 온갖 코스프레를 한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정도는 평범하다. 2017년 졸업식에는 한국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패러디한 용자도 있었다(...). 비단 학생들뿐만이 아니다. 교수들도 똘끼 넘치는 캐릭터들이 많다. 2020년까지 총장을 지냈던 야마기와 주이치도 그랬다. 교수 시절 이 양반의 연구주제는 영장류였는데, 그래서 혼자 아프리카로 가서 고릴라 생태연구를 한 적도 있다. 무려 10개월 동안 고릴라 무리와 섞여서 생활했다고 한다. 본인 말로는 “난 그저 고릴라의 세계로 유학을 떠난 것뿐이다.”라고 한다(...).
교토대학 졸업식의 코스프레들. 2017년에는 한국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까지 패러디(오른쪽)했다.
교토대학의 이런 자유분방하고 너드스러운 학풍은 노벨상과도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보다는 특이하고 창의적인 발상을 하는 괴짜야말로 노벨상에 더 어울린다. 상의 제정 취지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노벨상은 인류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친 최초의 발견을 해낸 학자에게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