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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May 25. 2024

알아두면 피와 살이 되는 일본의 과학 문화 (5)

될 때까지 하는 장기 연구

     

학창 시절 원소 주기율표라는 것을 배웠다. 학력고사 세대든 수능 세대든, 아재든 급식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기율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소를 특성에 따라 번호를 매겨 나열한 표다. 1번 수소에서 시작해서 118번 오가네손으로 끝난다. 다만 원소의 이름들이 특이해서 외우기가 영 쉽지 않다. 그래서 주로 첫 글자만 따서 외웠다. 수(소), 헬(륨), 리(튬), 베(릴륨), 붕(소), 탄(소), 질(소), 산(소), 이런 식으로. 그 시절 국사에 태정태세문단세가 있다면, 화학에는 수헬리베붕탄질산이 있었다.

     

그런데 자연계에서 발견된 원소는 92번 우라늄까지다. 93번부터는 인공적으로 합성을 해서 만들어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원소가 94번 플루토늄일 것이다. 1940년 미국의 글렌 시보그가 사이클로트론으로 합성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즉시 맨해튼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본래 원자폭탄 제조에는 우라늄-235라는 방사성 동위원소가 쓰였는데, 이게 자연계에 꼴랑 0.7% 밖에 없어서 농축이 매우 매우 어려웠다. 그때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합성 원소 플루토늄이었다. 미국은 이걸로 원자폭탄 ‘팻맨’을 만들어 1945년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이렇게 인공 합성에 성공한 원소들에는 지명이나 인명을 붙여서 기념하기도 한다. 95번 아메리슘(아메리카), 109번 마이트너륨(리제 마이트너), 112번 코페르니슘(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15번 모스코븀(모스크바) 등이 그 예다. 주기율표에 올라 있는 118개 원소 중 117개는 죄다 서양에서 발견 또는 합성되었다.

     

단 하나의 예외가 113번 니호늄이다. 이름에서 짐작하듯 일본(니혼)에서 합성되었다. 2016년 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IUPAC)이 공인한, 가장 최근에 주기율표에 오른 4개 원소 중 하나다. 일본이 동양을 대표하는 과학 강국임은 주로 노벨상 수상자 수로 가늠된다. 하지만 새로운 원소의 발견자라는 점도 그에 못지않다. 원소의 발견은 화학과 물리학의 순수과학적인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걸 해냈다고 해서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될 일은 1도 없다.

모리타 고스케(오른쪽)는 9년이 넘는 실험 끝에 113번 원소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주기율표에 오른 118개 원소 중 유일하게 동양에서 명명했다.


새로운 원소의 합성은 원자핵과 원자핵 사이에 핵반응을 일으켜서 이루어진다. 이럴 때 필요한 시설이 입자가속기다. 입자가속기는 원자를 빛의 속도(비유가 아닌 진짜다)로 쏴서 서로 충돌시킨다. 니호늄은 일본의 이화학연구소(RIKEN)가 보유한 입자가속기 실험을 통해 합성되었다. 아연 원자핵을 비스무트 원자핵에 충돌시켰는데, 이때 니호늄 원자 1개가 생성되어 0.000344초 동안 존재했다가 사라졌다.

     

다만 첫 실험에서 원소명 등록까지는 무려 13년이 걸렸다. RIKEN의 모리타 고스케 연구팀이 원소 발견에 착수한 것은 2003년이다. 첫 2년간 합성에 두 번이나 성공해서 연구는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원소 명명권을 가진 IUPAC이 실험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원소는 합성에 성공해도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다시 붕괴한다. 따라서 붕괴 과정까지 정확히 확인되어야만 새 원소로 인정받는다. 113번 원소는 붕괴 과정이 이론적 예측과 어긋나 추가 검증이 필요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2년간 두 번이나 성공했던 원소 합성이 계속해서 실패했다. 세 번째 합성에 성공한 것은 첫 실험으로부터 9년 뒤인 2012년이다. 연구팀은 이 9년간 무려 400조 번의 합성 실험을 했다. 그만큼의 세월을 소요한 뒤에야 겨우 국제적인 검증을 받을만한 결과를 확보할 수 있었다. IUPAC은 그로부터 3년여간 정밀한 검증과 원소명의 타당성 검토를 거친 끝에, 2016년 6월 니호늄을 승인했다.

      

400조 번의 실험을 한 모리타 고스케도 대단하지만, 그걸 하도록 지원해준 RIKEN은 더 대단하다. 만약 당신이 연구소장이라면,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이런 연구에 과학자가 10년 가까이 매달려 있도록 허용하겠는가? 아마 나라면 그만두고 다른 프로젝트 하라고 했을 것이다(…). 이 연구성과로 RIKEN과 일본이 얻은 소득은 그저 자부심이었다. 원소 주기율표에 우리 이름으로 된 원소를 올렸다는 것, 딱 그뿐이다. 그것 하나만 보고 10년이 넘는 시간과 자원을 쏟아부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이 무슨 뻘짓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본래 과학은 그렇게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과학에서 일본이 이룬 업적이 적지 않지만, 이 원소 발견이야말로 덕후의 나라 일본다운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3번 원소를 발견하는 데 쓰인 RIKEN의 입자가속기 RIBF. 일본은 과학 덕후답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입자가속기를 보유한 나라다.

     

비슷한 사례가 또 있다. 중성미자를 관측하는 실험이다. 중성미자는 우주를 이루는 기본입자인 렙톤의 한 종류로, 이름의 미는 “미세하다”라고 할 때의 그 미(微)다. 영어로는 뉴트리노(neutrino)인데, 엔리코 페르미가 중성자(neutron)에 작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접미사(-ino)를 붙여서 만들었다. 대체 얼마나 작길래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관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작다. 원래는 질량이 없다고 여겨졌으나, 1998년 아주 미세하게나마 있음이 밝혀졌다. 그렇지만 너무 가벼워서 정확한 질량을 측정하지조차 못한다. 또한 전하를 거의 띠지 않아 일반적인 물질과도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중성미자가 유령입자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럼에도 이걸 관측하려는 이유가 있다. 우주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중성미자는 우주에서 지구로 날아오는 우주방사선(cosmic rays) 중 하나다. 그런데 전자기장 등의 영향으로 이동 경로가 휘지 않아서, 날아온 방향을 역추적하면 방출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면 대체 이 유령과 같은 입자를 어떻게 검출할 수 있는가? 그나마 유력한 방법은 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중성미자는 물 분자를 이루는 원자핵과 (아주 낮은 확률이지만) 상호 반응한다. 이때 발생하는 고에너지의 해당 렙톤이 물 안에서 이동할 때 푸른빛을 내는, 이른바 체렌코프 현상을 관측하는 것이다. 이 반응은 아주 작게 일어나므로 관측기가 매우 커야 한다. 그래서 중성미자 실험은 보통 거대과학 연구로 분류된다.

     

1983년 일본은 이 관측 실험을 위해 ‘카미오칸데’라는 시설을 만들었다. 도쿄대학 우주선연구소가 기후현 카미오카 광산 지하 1,000m에 3천 톤 규모의 물탱크들을 설치했다. 워낙 대규모의 시설이라 국가의 지원이 필요했다. 도쿄대학 총장 아리마 아키토는 “이 시설이 완성되면 노벨상 2개는 받을 것”이라며 아소 다로와 같은 유력 정치인들을 설득해 예산을 따냈다. 그런데 그 말이 정말 현실이 되었다.

     

고시바 마사토시가 이 시설로 마젤란 성운의 초신성 폭발로 날아온 중성미자와 태양 중성미자를 연이어 관측해, 200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것이다. 지구를 통과하는 중성미자 1조 개 중에 단 1개가 관측될 확률을 뚫은 성과였다. 천체물리학 분야에서는 일본이 처음으로 받은 노벨상이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1995년 카미오칸데의 물탱크 규모를 5만 톤으로 늘려서 ‘슈퍼카미오칸데’로 확장했다. 두 시설에는 1,000억 원이 넘는 정부 예산이 들어갔다. 그리고 고시바의 제자 가지타 다카아키가 중성미자 진동변환을 발견하여 201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일본의 슈퍼카미오칸데는 5만 톤의 물을 저장해서 중성미자 관측 실험에 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일본 정부는 2027년까지 6,500억 원을 더 투입해 슈퍼카미오칸데를 ‘하이퍼카미오칸데’로 업그레이드하려 한다. 이게 되면 기존 슈퍼카미오칸데로 100년간 얻는 데이터를 단 10년 만에 얻을 수 있다. 일본은 이걸로 천체물리학 분야의 세 번째 노벨상을 바라고 있다. 1980년대 시작한 연구가 학맥을 잇고 재투자를 거듭하여 5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얼마 전 우리 과학계에서도 축적의 시간이란 말이 유행했다. 과학이 발전하려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지식을 축적하고 숙성시킬 수 있는 사회제도와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덕분인지 한우물파기 기초연구라는 이름의 연구사업도 시작됐다. 과학, 특히 순수기초과학은 장기 연구가 필수이기에 이는 좋은 변화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장기 연구를 제대로 하려면, 적어도 일본처럼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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