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빅뱅이론>에 셸든 쿠퍼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연구하는 이론물리학자로, 박사학위를 무려 16살에 딴(그것도 2개나) 천재다. 동시에 사회 부적응자이기도 하다. 흔히 ‘너드’하면 떠오르는, 머리는 비상하지만 편집증적이고 타인의 감정에 배려가 없는 인간형이다. 셸든이 쏟아내는, 눈치나 공감 능력 따위 엿 바꿔 먹은 팩폭 대사는 <빅뱅이론>의 꿀잼 포인트다. 듣는 사람은 킹받겠지만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틀린 말은 거의 없다(그래서 더 킹받는다).
셸든은 전공인 이론물리학에 엄청난 부심이 있다. 이론물리학은 기초학문인 물리학에서도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분야다. 주로 수학적 방법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빅뱅이론>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과학자인데, 셸든은 이론물리학이 아닌 학문은 죄다 캐무시한다. 그에 따르면 “지질학은 과학이 아니고, 사회과학은 엉터리이며, 공학은 과학자를 섬기는 노예들이나 하는 것”이다. 여친 에이미는 신경과학자라고 낮춰 보고, 베프 레너드는 물리학자인데도 깔본다. 이유는 레너드의 전공이 이론물리가 아닌 실험물리라서(…).
사회과학을 극딜하는 셸든 쿠퍼 센세. <빅뱅이론>에서 가장 빵 터진 장면이다.
그런데 이런 물리학 우월주의(?)는 실제 과학자들도 공유하는 것 같다. 원자핵을 발견한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모든 과학은 물리학 아니면 우표수집”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근데 본인은 정작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또 파울리 배타 원리의 개척자인 볼프강 파울리는 전처가 화학자와 재혼하자 “차라리 투우사라면 이해하겠는데, 화학자라니…”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빅뱅이론>의 셸든은 결코 웃음을 위해 과잉 설정된 캐릭터가 아닌 셈이다.
물리학이야말로 궁극의 과학이라는 생각의 기원은 아이작 뉴턴으로 소급한다. 뉴턴의 직함은 케임브리지대학 루커스 수학 석좌교수였다. 그는 주저 『프린키피아』에서 세 가지 공리에 기초해서 자연의 운동을 설명해냈고, 중력을 중심으로 천상계와 지상계의 원리를 통합했다. 이로써 우주 삼라만상을 망라하는 보편의 법칙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 법칙은 미적분이라는 수학의 방법으로 기술되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부터 태양계를 가로지르는 혜성까지, 모든 물체는 이 수학 법칙의 적용을 받았다. 이때부터 물리학과 수학은 영혼의 샴쌍둥이가 되었고, 과학을 연구하려는 모든 이는 뉴턴을 모델로 삼았다. 이게 1687년의 일이다. 아직 생물학, 화학, 지질학 같은 말은 있지도 않은 때였다.
이러한 특징은 학문의 영어 표기에서도 드러난다. 수학(mathematics)과 물리학(physics)은 접미사 -ics로 끝난다. 한자로 번역하면 학(學)이다. 이것은 보편적 법칙과 지식의 체계를 정립하는 이론과학이다. 반면 생물학(biology), 지질학(geology), 사회학(sociology), 인류학(anthropology)은 접미사 -logy로 끝난다. 한자로는 론(論)에 해당한다. 즉 현상들을 단순히 기술하는 현상론이다. 러더퍼드의 우표수집 비유에 따르면,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료(우표)를 모으는 행위이다. 이렇게 대별해보면 물리학자들의 부심이 일견 이해되기도 한다.
심각한 표정으로 칠판 가득 수식을 적어 내려가는 모습은 물리학자를 대표하는 이미지다.
문과에서는 경제학자들이 물리학자들과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경제학(economics)도 -ics로 끝난다. 실제로 경제학은 문과에서 수학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학문으로, 미적분을 모르고서는 배울 수조차 없다.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움직이는 수학적 법칙을 도출하여 미래까지 예측하려 한다. 이런 방법은 자연과학의 뉴턴 물리학과 매우 비슷하다.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이야말로 문과 유일의 과학이라고 자부하는 이유다. 다만 그 내부에는 수학이 절대적 지위를 갖지 않는 비주류 분야들(마르크스주의, 포스트케인스주의, 제도주의 등)도 있다. 대표적 비주류경제학자인 장하준은 이렇게 말한다. "동료들은 나를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최악의 모욕인 사회학자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수학이라는 과학적 방법을 안 쓰면 경제학자가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학과 론, -ics와 -logy는 형식적 구분에 불과하다. 그걸로 굳이 학문의 우열을 가리려는 태도는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코로나19 백신을 만들어낸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의 성과가 힉스 보손을 예측하고 발견한 입자물리학(particle physics) 보다 과학적으로 뒤떨어진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모든 학문은 인간에게 유용한 지식을 주며 그 자체로 위대하다. 이것은 꼭 내가 사회학(sociology)을 전공하고 논문에 수학적 방법을 쓰지 않아서 하는 말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