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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n 15. 2024

막스 플랑크 협회로의 새 출발

독일 막스 플랑크 협회 (7)

제2차 세계대전은 결국 독일의 패배로 끝났다. 그리고 온 국토는 물론 과학도 폐허가 되었다. 뛰어난 과학자들은 이미 해외로 이주했거나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KWG의 4대 회장 알베르트 푀글러는 체포 직전에 자살했다. 베를린을 비롯한 각 지역의 연구소들이 파괴되었다. 20세기 초반 독일 과학의 전성기를 이끈 KWG는 그렇게 파탄을 맞았다. KWG의 최종 운명은 독일을 분할 점령한 연합국의 손에 쥐어졌다. 다만 연합국 사이에서도 KWG의 처리에 대한 의견은 갈렸다. 미국은 핵폭탄까지 만들려 한 이 연구소를 그냥 둘 수 없다며 폐쇄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은 KWG의 폐지보다는 재건이 바람직하며, 이것이 독일은 물론 인류를 위한 과학에 기여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 작업을 화학자 버티 블라운트에게 맡겼다.

     

결국 1945년 막스 플랑크가 KWG의 임시 회장직을 맡았다. 사실 플랑크 외에는 이 일을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전임 회장 중 유일한 생존자였고, 원로 과학자로서 여전히 널리 존경받았기 때문이다. 87세의 플랑크도 이것이 과학자로서 해야 할 마지막 임무임을 알았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편지를 써서 KWG의 보존과 재건에 동참하자고 호소했다. 이미 많은 과학자가 해외로 이주했지만, 그래도 플랑크의 호소에 응답한 이들도 있었다. 오토 한, 막스 폰 라우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아돌프 부테난트 등이 그렇게 다시 모였다. 이들은 모두 노벨상 수상자였지만 나치 집권기에 엇갈린 행보를 보였다. 한과 하이젠베르크는 우란프로옉트에 참여했고, 부테난트는 나치당원이었지만 전쟁 부역의 이력은 모호했다. 반면 폰 라우에는 끝까지 나치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KWG 재건에 대한 뜻은 같았다. 플랑크는 1946년까지 회장직을 수행하다가 오토 한에게 임무를 넘겼다. 이미 관절질환이 심해진 그로서는 침대에서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리고 1947년, 비로소 임무를 다했다는 듯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새로운 이름

     

1946년 신임 회장 한은 협회의 새 이름부터 정해야 했다. 연합국은 KWG를 유지하는 대신 그 역할을 기초연구로 제한하고 명칭 변경을 요구했다. 이제 협회는 ‘카이저 빌헬름’으로 상징되는 제국주의 역사를 청산하고, 인류의 평화와 복지를 위한 기초연구를 지향해야 할 터였다. 그러려면 우선 그에 맞는 이름을 갖춰야 했다. 한을 비롯한 KWG의 과학자들은 거기에 ‘막스 플랑크’만큼 적절한 이름도 없다고 생각했다. 플랑크는 파시즘의 광풍에 맞서 KWG의 원칙과 과학자들을 지키고자 했다. 덕분에 KWG는 분열과 해체를 모면하고 나치 이후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었다. 많은 후배가 노학자의 이러한 노력에 경의를 표했고, 막스 플랑크는 위대한 이론물리학자이자 과학행정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새로운 막스 플랑크 협회는 바로 그 정신을 이어받고자 한 것이다. 

    

1948년 막스 플랑크 협회(MPG)가 괴팅겐에서 출범했다. KWG의 마지막 회장이었던 오토 한이 그대로 MPG의 첫 회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영국군 점령 지역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지만, 그 제한은 곧 폐지되었다. 남아있던 KWG 연구소들은 1953년까지 MPG로 줄줄이 편입되었다. 이와 함께 전쟁 포로로 붙잡혔던 직원들이 복귀하고, 서독의 경제 기적도 일어나면서 지원 예산도 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자들의 리더십이 재건을 견인했다.

1948년 막스 플랑크 협회 창립 행사. 오토 한 초대 회장(오른쪽 가운데)과 아돌프 그림 니더작센주 교육부 장관(왼쪽 가운데).

    

막스 폰 라우에는 플랑크의 제자이자 KWG 물리학연구소의 부소장이었다. 그런 그가 전쟁 후 KWG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장을 맡았다. 바로 프리츠 하버가 소장이었던, 독가스 개발에 앞장선 그 연구소다. 폰 라우에는 물리화학에 국한되었던 연구소에 여러 인재를 끌어들였고, X선, 표면과학, 전자현미경 등으로 주력 분야를 넓혀 나갔다. 1953년에는 MPG에 가입하면서 이름을 ‘프리츠 하버 연구소’로 바꿨다. 이 연구소 이름은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80개가 넘는 MPI 중에 유일하게 연구분야가 아닌 과학자의 이름을 쓰고 있는 연구소다. 폰 라우에는 비록 실수(독가스 개발)도 저질렀지만, 조국의 영광과 인류의 복지에 공헌했던 하버를 그렇게라도 기리고자 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복귀도 극적이었다. 우란프로옉트를 총괄한 그는 전범으로 의심받았지만, 핵 개발을 막으려고 태업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초대 소장이었던 막스 플랑크 물리학연구소를 이끌게 되었다. 이 연구소도 본래 이론물리학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가 소장을 맡으면서 핵융합, 천문학으로도 연구를 확장했다. 특히 천체물리학자 루트비히 비어만의 합류가 큰 힘이 되었다. 비어만은 태양의 강력한 자기장에 의해 대기층에서 이온 입자들이 플라즈마 형태로 고속 방출되는, 태양풍 현상을 예측했다. 비어만이 주축이 된 천체물리학 부서는 막스 플랑크 천체물리학연구소로 독립하게 된다. 막스 플랑크 외계물리학연구소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물리학연구소로부터 스핀오프하였다. 1970년 하이젠베르크의 은퇴 이후 막스 플랑크 물리학연구소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연구소’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노년의 하이젠베르크(위)와 1958년의 막스 플랑크 물리학연구소(아래). 아인슈타인이 소장으로 있었던 이 유서 깊은 연구소는 후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연구소로 불리게 된다.



     

재건과 부흥

     

1954년 발터 보테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은 상징적이었다. 카이저 빌헬름 의학연구소에서 방사선을 연구하던 물리학자 보테는 동시계수기를 발명하여, 1905년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광양자 가설의 입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핵물리와 방사능은 이미 현대물리학의 핵심 분야로 부상하고 있었다. 보테는 여기에 중요한 측정 방법을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를 계기로 보테를 소장으로 하는 막스 플랑크 핵물리학연구소가 만들어졌다. MPG로서는 처음이자, KWG 시절부터 따져도 1932년 하이젠베르크 이후 22년 만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이었다. 한때 세계 물리학의 중심지였던 독일은 과학자들의 이탈과 정치적 동원으로 침체를 겪어야만 했다. 보테의 수상은 그 암흑기가 끝나고 새로운 전성기가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플랑크, 아인슈타인, 폰 라우에, 하이젠베르크로 이어져 온 KWG의 이론물리학적 전통은 MPG의 시대를 맞아 핵융합, 천체물리, 입자물리 등의 분야에서 꽃 피우게 되었다.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은 물리학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의 중요한 특징은 인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눈부신 진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쟁 후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류의 관심은 건강과 복지 등의 의제로 옮겨갔고, 과학에서도 이를 반영하는 발견이 쏟아져 나왔다. 페니실린으로 상징되는 항생제의 개발과 DNA 구조 규명을 통한 생명의 비밀에 대한 이해가 대표적이다. 20세기 초반의 과학을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핵물리 등 물리학이 이끌어왔다면, 이제 생명과학과 화학이 이니셔티브를 이어받게 된 것이다.

막스 플랑크 협회의 로고는 로마 신화 속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를 형상화했다.


MPG에도 실용적 경향의 연구소들이 생겨났다. 막스 플랑크 생화학연구소가 대표적이다. 1939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아돌프 부테난트가 소장을 맡았다. 부테난트는 성호르몬의 권위자로, 남성 호르몬인 안드로스테론과 여성의 생식주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프로게스테론을 최초로 분리해냈다. 부테난트의 발견은 후일 피임약 개발로 이어진다. 이렇듯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여권 신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피임약도 기초연구의 산물이었다. 1964년에는 같은 연구소에서 MPG의 첫 노벨생리의학상이 배출되었다. 페오도르 린은 콜레스테롤 및 지방산 대사의 메커니즘과 조절을 규명하여 당뇨병을 치료할 임상연구의 기초를 확립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 밖에도 뇌과학, 분자생물학, 의약학 등도 활발히 연구되었는데, 이는 20세기 생명과학의 일대 약진과 공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MPG는 과학만을 위한 연구소가 아니었다. 기초연구, 기초학문의 영역에서 인문학과 사회과학도 자연과학과 함께 연구해왔다. 유럽의 1960~70년대는 68운동으로 상징되는 반체제 학생운동이 휩쓴 시대였다. 이것은 베트남전쟁 반대, 페미니즘, 환경운동의 구호와 결합하며 급진적 양상을 띠었다. 철학적으로도 인간 이성의 도구화를 비판하고, 과학기술의 효율화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는 것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이론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바로 위르겐 하버마스다. 프랑크푸르트대학 교수였던 그는 1971년 막스 플랑크 과학기술세계와 생활조건 연구소의 소장직을 맡았다. 여기서는 과학의 사회적 책임, 과학기술의 폭력적 활용에 대한 성찰과 비판이 이루어졌다. 하버마스를 대표하는 의사소통 합리성 이론, 즉 사회구성원 간의 소통을 통한 해방의 가능성이라는 담론도 이 맥락에서 주조되었다. 1974년 베를린의 새 건물에 들어선 막스 플랑크 인간개발연구소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향했다. 복잡한 별 모양의 현대적인 건축물은 과학자의 요구와 구성원의 토론이 활성화될 수 있는 구조로 지어졌다. 연구소의 주제인 ‘사회에 유용한 지식 습득의 조건’은 이러한 개방적 인프라를 바탕으로 탐구되었다. 그것은 급진적 민주화를 요구한 68운동의 정신을 담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1974년 베를린에 지어진 막스 플랑크 인간개발연구소 건물. 과학자들의 자유로운 소통과 협력을 촉진하도록 별 모양의 구조를 취했다.



     

두 명의 리더


모든 조직이 그러하듯 MPG의 부흥도 뛰어난 리더들이 주도했다. MPG 전환 후 1, 2대 회장을 맡은 오토 한과 아돌프 부테난트가 그 주역들이었다. 두 사람은 MPG 역사에서 가장 긴 12년의 회장 임기를 각각 이행했다. 이 시대는 전후 복구, 경제성장, 사회운동 등 굵직한 사건들로 점철되었다. 한과 부테난트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들의 리더로서 시대에 부응하는 연구소의 역할을 찾고 개혁을 단행했다.

     

한의 재임기(1948~1960년)는 재건과 성장의 에너지가 넘친 시기였다.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린 서독의 경제성장이 이 시대를 관통했다. 제조업의 혁신과 미국의 지원이 결합하여 폭발한 경제호황은 서독을 단숨에 강대국으로 올려놓았다. 경제상황이 나아지자 MPG에 대한 지원 역시 확대되었다. 한은 이를 잘 활용하여 새롭게 떠오른 과학의 분야들로 연구소를 확장했다. 이로써 MPG는 천문학, 핵물리, 생화학, 뇌과학, 분자생물학 등을 포괄하면서 명실상부한 ‘기초연구 빅텐트’의 위상을 확립했다. 한의 재임 기간 MPG의 예산은 4배로 늘었고, 연구소의 숫자도 21개에서 40개로 급증했다. 그리고 MPG 본부가 뮌헨으로 이전했을 때 연구소 직원은 약 3,000명에 이르렀고, 그중 840명이 과학자였다. 전쟁 직후 한은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우란프로옉트에 참여한 이력 때문에 연합국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MPG 복귀 후에는 과학행정가로 변신했고, 1960년 81세의 나이로 임기를 마치면서는 명예 회장으로 추대되어 영예롭게 은퇴했다.

     

부테난트는 재임(1961~1972년)하는 동안 68운동이 이끈 진보적 사회 분위기에 호응했다. 그래서 인문사회과학에 적극적으로 투자했고, 과학과 사회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고자 했다. 이 시기를 거치며 MPG 조직도 더욱 수평화, 민주화될 수 있었다. 1969년 튀빙겐에 세워진 프리드리히 미셔 연구소는 젊은 과학자들에게 실험 공간을 제공했다. 오늘날 MPG의 자랑인 연구그룹 프로그램은 이때부터 보편화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갓 박사과정을 마친 젊은이들이 독립적인 연구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또 1964년 부테난트는 정관을 개정하여 연구소의 부서장들에게 디렉터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했다. 이 조치로 모든 디렉터가 평등한 권한을 갖게 되었고, 협회의 운영이 회장이나 몇몇 관료가 아닌 과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게 됐다. 이러한 구조 개혁의 방향은 1964년부터 모색되어 1973년에야 완료될 수 있었다. 아돌프 하르낙이 KWG를 만들면서 세웠던 연구자 자율의 원칙은 이로써 더욱 굳건한 토대를 얻게 되었다.

현대철학을 대표하는 위르겐 하버마스(왼쪽)도 1971년부터 막스 플랑크 과학기술세계와 생활조건 연구소에서 10년 동안 연구했다. 


흔히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MPG도 그러했다. 그들은 긴 세월 현실과 끊임없이 부딪히며, 리더의 비전과 구성원의 실행력에 힘입어, 연구소 운영에 철학적 깊이를 더했다. 오늘날 세계의 과학자들이 부러워하는 이 연구소는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견뎌냈고, 느리지만 분명하게 정체성을 갖춰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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