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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n 30. 2024

명실상부한 국가 연구소의 완성

독일 막스 플랑크 협회 (8)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것은 물리적 현상인 동시에 역사적 사건이었다. 20세기를 온통 얼어붙게 했던 냉전이 녹아내린 여파는 걷잡을 수 없었다. 세계의 절반이었던 공산주의 진영은 도미노처럼 연쇄 붕괴했다. 반면 소련을 이긴 미국, 동독을 흡수한 서독이 역사의 최전방으로 나섰다. 자유주의 진영이 올린 승리의 개가는 화려했다. 록밴드 핑크 플로이드는 베를린 공연에서 장벽의 잔해를 무너뜨리는 퍼포먼스를 했고,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유주의의 승리로 역사의 발전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1~2년 사이에 일어난 세계사적 변화였다.

     

MPG 역시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독일의 통일은 단순히 정치체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경제, 사회, 문화, 학문 등에서 벌어진 두 나라의 차이를 좁혀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주어졌다. 당연히 과학도 예외일 수 없었다. MPG를 필두로 한 서독의 과학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 있었다. 반면 동독은 자체 개발은커녕 완제품을 분해해서 기능을 역추적하여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이렇게 심각한 차이를 메우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반년 뒤 그 자리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 공연이 열렸다. 세계사와 궤를 같이 한 역사적인 록 공연으로 꼽힌다.



     

통일에 수반되는 문제들

     

MPG가 문제의 해결에 가장 먼저 나섰다. 1990년 6월 열린 MPG 총회는 동‧서독 통합의 원칙을 확인했다. “동독의 과학은 정치와 구분되지 않으므로, 통일 독일의 연구체제는 연구의 자유와 과학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서독 모델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 제안은 다음 달 서독과 동독의 과학기술 장관 회의에서 논의되었고, 같은 해 10월 독일 통일 조약에도 반영되었다. 이로써 통일 독일의 연구체제는 서독의 원칙 – 연구의 자유, 연구조직의 자율, 학문‧기술의 연방주의 – 을 그대로 지향하게 되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서독의 연구시스템을 동독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1990년 취임한 한스 자허 회장은 변호사이자 법학자였다. 현재까지 재임한 MPG 회장 중 유일한 자연과학 비전공자이기도 하다. 1971년 뮌헨대학의 공법학 교수였던 그는 막스 플랑크 외국 및 국제사회법 연구소의 설립 과정에서 소장으로 합류했다. MPG가 인문학 분야로 연구소를 확장하던 때였다. 마침 자허의 연구주제는 사회법의 국가 간 비교이기도 했다. 이런 학문적 배경은 우연찮게도 통일 시대의 MPG를 이끌기에 적합한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자허가 임기를 시작했을 때 독일의 통합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당연하지만 동독 지역에 서독의 연구시스템, 특히 MPI들을 이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동독의 대학은 서독과 달리 연구 기능이 없었다는 데 있다. MPI는 대학과 인적 자원 – 교수, 박사후연구원, 학생 등 - 을 공유하면서 작동한다. 그런데 동독의 연구 기능은 과학원에 집중되었고, 대학은 학생 교육만 했다. 따라서 MPG는 연구소 설립의 이전 단계로서 연구그룹을 우선 두기로 했다. 동독 대학의 뛰어난 과학자들에게 우선 소규모 그룹을 꾸려서 원하는 연구를 시작하도록 한 것이다. 이 연구그룹들은 서독의 MPG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장기적으로 MPG 체제로 흡수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1992년부터 29개의 연구그룹이 동독 지역에 개설되었다.

     

연구소 설립도 본격화되었다. 1992년 1월, 두 개의 MPI가 동독 지역에서 출범하였다. 할레의 미세구조 물리학 연구소와 포츠담의 콜로이드 및 계면 연구소다. 인문학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조직도 만들어졌다. 이렇게 동독 지역에 새로 연구소를 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독일 통일 조약은 1991년 말까지 동독 과학원의 과학자와 연구소를 서독으로 통합할 것을 명시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벌어진 양국의 차이를 단 2년 사이에 하나로 만드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자허는 시효에 맞춰 통합을 서두르다가는 동독은 물론 서독도 큰 손해를 입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행 기간을 본래 계획보다 훨씬 더 연장했다. 동독의 잠재력 있는 연구자를 발굴하고 연구환경을 갖추는 데 충분한 시간과 비용을 쏟았다. 다만 그러다 보니 비용이 몇 배는 더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MPG는 늘어난 모든 예산을 정부로부터 확보할 수 없었고, 부족분은 자체 조달하기로 했다. 이 결정은 MPG에 상당한 재정적 부담을 지웠다. 폐지되는 연구부서들이 속출했고, 그것도 모자라 총예산의 11%에 해당하는 740개 직위를 감축하는 계획까지 입안해야 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MPG 회장직에 오른 자허는 동독 지역에 MPI들을 설립하는 작업을 완료하지 못하고 1996년 퇴임했다.



      

사회 통합을 견인하는 과학

     

그런데 의외의 인물이 신임 회장이 되었다. 후베르트 마르클이라는 진화생물학자다. 그가 의외인 첫 번째 이유는 출신 배경이다. 마르클은 MPG 재직 경험이 없는, 외부에서 영입된 첫 회장이었다. 다름슈타트공과대학의 교수였던 그는 1980년대에 과학행정가로 변신하여 독일 연구재단의 최연소 이사장을 지냈다. 그러면서 세 가지 개혁을 주도했다. 박사과정생을 위한 연수 프로그램, 통일 이전 동독 연구자에 대한 자금 지원, 대학의 교육과 연구 기능 통합. 이러한 리더십을 인정받아 MPG에 회장으로 영입된 것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캐릭터다. 마르클은 한 마디로 ‘터프가이’였다. 전임 회장들과 달리 격한 논쟁을 피하지 않았고, 필요하면 회장의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본인의 뜻을 관철했다. 소위 ‘굴러들어 온 돌’이 분란도 마다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 것이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마르클은 조직을 위한 올바른 선택이라면, 내부의 불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1996~2002년 MPG 회장 후베르트 마르클. 최초의 외부 영입 회장이자 터프가이로 불렸던 그는 MPG를 통일 독일에 걸맞는 국가 연구소로 만들기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런 마르클도 부족한 돈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정부에서 통일 비용을 과소평가한 탓에, MPG는 동독에 투자할 예산을 충분히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마르클은 리더로서 매우 어려운 결정을 했다. 기존 연구소들을 구조조정해서 동독 지역의 연구소 설립에 보탠다는 것이다. 한번 결심이 서자 마르클은 지체 없이 조치를 단행했다. 여기에는 실적이 부족한 곳들은 물론, 괴팅겐의 역사학 연구소, 라덴부르크의 세포생물학 연구소 등 전통이 있는 연구소들도 포함되었다. 그의 임기 동안 266명의 디렉터 중에 153명이 새로 임명되었다. 문자 그대로 ‘물갈이’였다. 많은 연구자와 원로들까지 나서서 반발했지만, “통일 독일의 위상에 맞는 국가 연구소를 건설한다.”라는 명분을 이길 수는 없었다.

     

마침내 1998년까지 동독 지역에 18개의 MPI가 완성되었다. 동‧서독을 망라하는 80여 개의 기초과학 연구소는 EU의 새로운 리더로 떠오른 통일 독일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MPG가 그토록 지난한 과정을 거쳐 전국적인 연구시스템을 구축한 효과는 과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축적된 동‧서 지역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독일 사회를 통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구 동독의 두 도시,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가 대표적 사례다. 드레스덴은 한때 ‘독일의 피렌체’로 불린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특히 18세기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 건축물들이 도시의 아름다운 경관을 돋보이게 했다. 그런데 이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의 폭격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종전 후 동독 정부는 일부 복구를 시도했으나 그 속도는 매우 지지부진했다. 대부분의 구 시가지는 사실상 폐허로 방치되거나, 사회주의 양식으로 리모델링되어 고풍스럽던 멋을 잃었다. 통일 독일 정부는 드레스덴의 구 시가지 건축물들을 재건하는 한편, 연구소, 대학, 기업들을 입주시켜서 혁신 클러스터로 육성했다. 이 정책에 따라 MPG도 3개의 연구소를 신설했다. 그 결과 드레스덴은 전통과 현대, 문화‧예술과 과학기술이 조화를 이룬 지식 도시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라이프치히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다. 신성로마제국의 무역 거점이었던 이 도시는 바흐, 멘델스존, 슈만 등 천재 음악가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본래의 도시 인프라를 활용하지 못하면서 명성이 추락했다. 그러나 통일 후 3개의 MPI를 위시한 연구조직들이 들어섰고, 전통의 명문대였던 라이프치히대학과 협업하면서 경쟁력이 되살아났다. 2022년에는 이 지역의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1997년 신설)에서 구 동독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드레스덴의 과거와 현재. 오늘날 드레스덴은 유서 깊은 건축물들과 뛰어난 연구조직들이 공존하는 혁신 도시이다.


마르클 시대의 혁신은 동‧서독 통합에만 그치지 않는다. 2000년에는 국제대학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세계의 뛰어난 학생들을 모아 MPG 시스템을 거쳐 우수한 과학자로 키운다는 계획에서였다. 덕분에 MPG는 연구소 운영에 필수인 학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한편, 이들이 졸업 후 귀국하면 국제공동연구로 이어갈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들었다. 이 무렵 MPG도 독일을 벗어나 세계적 규모의 공동연구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미국, 인도, 체코 등에 설치한 막스 플랑크 센터가 이러한 국제화 전략의 핵심이 되었다. 여기에는 현지의 뛰어난 연구자들과 MPG 시스템을 결합해 윈윈 효과를 거둔다는 목적이 있었다.

     

2001년 6월에는 뜻밖의 발표가 있었다. MPG의 전신인 KWG 시절 나치 부역과 전쟁범죄에 대한 것이다. 마르클의 지시로 꾸려진 과거사 위원회는 4년여의 조사 끝에 KWG가 나치에 동조하여 생체 실험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인정했다. 마르클은 베를린에서 열린 심포지움에서 이 같은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생체 실험의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이것은 독일 학계에서는 처음으로 나치 부역의 과거사를 인정한 것이기도 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도 나치당원으로서 히틀러를 열성적으로 찬양했다. 그래서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을 지내면서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후예들은 선배들의 과거사에 대한 어떠한 인정이나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가장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은 죄를 폭로하는 것”이라는 마르클의 솔직한 사과는 더욱 빛날 수밖에 없었다.



     

100년이 걸려 완성된 국가 연구소

    

MPG의 성장사는 연구소의 성공에는 연구를 잘하는 것 이상의 책임과 의무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헌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90년대 MPG의 동독 지역 육성 정책은 과학연구만 생각하면 도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오히려 비효율적인 측면도 상당했다. 그럼에도 MPG를 이끈 리더들은 희생을 감수하고 어려운 과업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통일이라는 시대정신, 국가 발전에 대한 확신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독일은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국가다. 풍부한 인적 자원이 강대국의 기본 조건 중 하나라 할 때, 독일의 통일은 국가의 발전 수준이 한 단계 더 올라서는 계기였음이 분명하다. 독일이 EU를 이끄는 리더가 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는 MPG를 비롯한 과학자들의 공로도 결코 작지 않았다.

'막스 플랑크 협회'로의 명칭 변경에 동의하는 막스 플랑크의 전보(왼쪽)와 2023년 MPG 75주년 기념행사(오른쪽). 그들의 100년 역사에서 여전히 배울 것이 많다.

     

2011년 MPG는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우연히도 그해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는 MPG를 벤치마킹한 연구소가 출범했다. 바로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연구원(IBS)이다. 한국에서 기초과학의 본격 육성을 선언하며 설립한 이곳은 MPG의 철학과 시스템을 대부분 그대로 이식했다. 과학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하르낙 원칙, 대학과의 전국적 협력 시스템, 10년 이상을 보장하는 장기연구 등이 한국에서는 처음 도입되었다. 머나먼 극동에서 자신을 모델로 한 연구소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에 MPG의 과학자들도 자문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과학연구의 문화와 환경이 많이 다른 한국에서 독일의 MPG 시스템을 구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때 MPG의 원로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사실이 있다. “당장 성과를 내려고 하지 마라. 우리도 100년이 걸렸다.” 흔히 과학에는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희대의 천재도 상대성이론을 완성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양자역학이 현대물리학의 핵심 분야로 자리 잡는 데는 그 몇 배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러한 축적의 시간은 꼭 연구에만 해당하는 진리는 아닐 것이다. 연구소를 움직이는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고, 그것을 사회에 안착시키는 데도 그만큼의 지난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MPG의 100년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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