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만 해도 피아노는 부의 상징이었다. 공무원 월급이 1만 원이던 당시에 무려 9만 원이 넘었다. 그래서인지 피아노는 있는 자들의 허영으로도 여겨졌던 모양이다. 한국 스릴러 영화의 효시인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부유한 음악교사인 주인공은 하녀가 피아노만큼은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 그 집의 모두가 피아노를 쳤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주인공과 하룻밤을 보낸 하녀는 서슴없이 피아노를 친다. 피아노가 일종의 계급적 경계였던 셈이다.
이런 사회상은 언론에서도 드러난다. 1960년 10월 26일 <경향신문> 사설이다. “어린아이들에게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가르치고…(중략)… 자녀들에게도 쓸데없는 허영과 오만을 길러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피아노는 구매만큼이나 교습도 문제였다. 워낙 고가였으니 동네에 피아노 학원이 있을 리 없었다. 따로 전공자를 불러서 개인 레슨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평범한 집에서 “엄마 나 피아노 배우고 싶어.”라고 하면 어땠겠나. 당장 등짝 스매싱이 날아오며 “이 자식이 먹고살기도 힘든데… 피아노는 무슨 피아노야! 들어가서 공부나 해!” 이런 타박을 듣지 않았을까. 그렇게 수많은 미래의 피아니스트들이 뜻을 꺾고, 국영수만 죽어라 팠을 것이다. 물론 명문대에 진학해서 현대건설이나 포항제철 같은 좋은 직장에 취업했을 테다. 다만 어린 마음에 고이 품었던 음악의 꿈도 스러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과학연구도 이와 비슷했다. 1966년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133달러였다. 1달러로 3일을 살아야 하는 고된 시절이었다. 그런 나라에서 처음으로 과학연구소를 만들 기회가 왔다. 1965년 베트남 전쟁에 파병해준 대가로 미국이 설립을 약속한 것이다. 최형섭 원자력연구소장이 그 작업을 맡았다. 그 전해 최형섭은 스웨터를 2천만 달러어치나 수출했다고 자랑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렇게 일갈했다. “기특한 일이지만 언제까지 그러겠습니까? 일본은 10억 달러어치 전자제품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에 있어 기술의 중요성을 일깨운 팩폭이었다.
미국은 벨연구소(Bell Labs)를 벤치마킹 모델로 제의했다. 전화‧전신 회사인 AT&T가 설립한 벨연구소는 자유로운 학풍으로 유명했다. 과학자들이 뭘 하든 그저 내버려 두었다. 덕분에 주력 분야인 통신 외에 기초연구도 발달했다. 전파망원경의 원리를 발견하고,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성과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최형섭은 이를 고사하고 바텔기념연구소(Battelle Memorial Institute)를 역제안했다. 바텔기념연구소는 기초연구보다는 산업기술에 강점이 있었다. 주로 기업들과 계약을 맺고 의뢰받은 연구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당장 산업을 일으켜야 하는 우리나라 상황에 더 맞는 모델이었다.
이로써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만들어졌다. 연구소 이름에 과학을 내세웠으나 KIST의 임무는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과학연구는 자연과 우주에 숨겨진 지식을 발견하는 일이다. 진리를 향한 무한한 호기심이 그 동기가 된다. 하지만 KIST는 그보다는 기업을 위한 기술개발이라는 목적에만 집중했다. 사실 말이 좋아 기술개발이지, 선진국의 지식을 들여와 우리 실정에 맞게 적용‧가공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KIST 초대 소장을 맡은 최형섭은 해외 과학자를 대상으로 한 설명회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과학자들이 좋아하는 사치스러운 기초연구는 못 한다. 노벨상을 받고 싶은 사람은 여기 오지 마라.”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고 한 부모들과 다를 바 없었다.
1960년대 과학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우주개발에서는 최초의 달착륙(아폴로 계획)을 눈앞에 두었다. 물리학에서는 가장 근본적인 이론인 표준모형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그 공로로 일본의 두 번째 노벨물리학상을 받았고, 한국인 이휘소도 노벨상을 아깝게 놓쳤다고 할 정도로 명성을 날렸다. 생명과학에서는 DNA 구조 규명 이후 유전자 재조합의 혁명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아마 많은 한국인 과학자들도 이러한 과학의 진보에 동참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위대한 발견이 쏟아지던 시절이니, 잘만 하면 정말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KIST로 갔다. 피아노보다는 국영수를 택한 셈이다. 물론 정부는 이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연봉이 국립대 교수의 3배가 넘었고, 대통령보다 돈을 많이 받는 사람도 숱했다. 그런데도 미국에서 받던 연봉에 비하면 30% 수준이었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빈국 수준으로 못 살았던 탓이다. 1969년 김포공항에 내린 KIST의 첫 연구진은 판잣집으로 가득한 서울의 풍경에 눈물이 났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고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두뇌가 역수출된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KIST가 개발한 수상기 기술로 국내에 컬러 TV가 보급될 수 있었다. 프레온가스는 에어컨 냉매와 반도체 절연 물질로 응용되었다. ‘산업의 쌀’ 철을 대량 생산하기 위한 포항제철의 설립 기획도 KIST가 맡았다. 광섬유 연구는 1980년대 정보통신산업의 기반이 되었다. KIST의 이러한 연구 방식은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다. 학술 용어로는 추격형 R&D, 또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라고 했다. 선진국을 흉내 내서 빠르게 따라잡는 전략이다. 이 패러다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KIST에서 여러 연구소가 스핀오프해서 각 분야로 전문화되었다. 오늘날 정부출연연구소, 대덕특구의 기원이다. 이들이 주도한 중화학공업 기반의 수출 주도 전략 덕분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선진국에 진입했다.
물론 토머스 쿤이 갈파했듯 패러다임은 영원하지 않다. 지속되다 보면 모순과 균열이 일어나고, 결국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곧 지식이 진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형 발전 패러다임의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남의 흉내로 발전할 수는 없었다. 기술은 사오면서 노동과 자본만 자체 투입하는 전략은 한계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만의 지적 자산, 원천 기술을 갖춰야 했다. 이러한 반성이 국가의 전략을 기초연구,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돌리게 했다. 과학자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촉발하는 연구비 지원사업을 도입했고, 기초연구의 집단적 수행을 위한 기초과학연구원(IBS)도 설립했다. 그 옛날 최형섭이 못한다고 했던 사치스러운 기초연구, 노벨상을 받을 연구를 비로소 시작한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없었다. 한국인들의 음악적 감수성이 유달리 부족해서가 아니다. 피아노를 배우고 문화예술을 향유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가정마다 피아노를 한 대씩 두고 동네 학원도 흔해진 것은 1980년대부터다. 먹고살 만해진 다음에야 음악을 즐기고 전공으로 삼을 사회적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될성부른 떡잎들도 나타났다. 조성진, 임윤찬, 선우예권이 1990년대 이후 출생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의 발전, 축적의 시간을 정직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과학연구도 비슷한 흐름을 따라왔다. 1990년대 이후 이루어진 기초연구 투자 덕분에 과학에도 조성진, 임윤찬, 선우예권 같은 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여유롭게 자란 이 젊은 과학자들은 전인미답의 영역으로 돌진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KIST를 만든 시대정신이 “하면 된다!”였다면, 이들의 스피릿은 “안 되면 말고”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애티튜드야말로 기초연구에 더 어울리는 것이다. 이들의 연구가 꾸준히 축적되면 노벨상을 받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중국 고전 『대학』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명한 문구가 있다. 이 말은 그저 개인의 수양론이나 경세치국론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고, 큰일을 이루려면 작은 일부터 완벽히 해야 한다는 역사의 진리를 함의한다. 과학 역시 예외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