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대웅 Sep 02. 2024

우리도 노벨상을 받으려면

* 이 글은 회사 업무(feat. 고스트라이터)로 쓰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노벨상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브런치에도 올려본다. 다만 고스트라이터로서 쓴 것이라, 출판될 때는 저자명과 내용 일부가 바뀌어 있을 것이다.


2020년 9월, 과학 뉴스가 주요 언론을 장식하는 이례적인 일이 있었다. 한국인 과학자가 그해 노벨화학상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보도였다. 주인공은 현택환 기초과학연구원 나노입자 연구단장(서울대 석좌교수).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라는 학술정보기업이 전 세계 과학자의 논문 피인용도를 근거로 예측한 결과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온 국민의 관심이 현택환 단장에게 쏠렸다. 노벨상, 특히 과학상은 국격의 영예로운 증명이다. 미국과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만 해도 25명이 받았다. 중국, 인도, 대만, 파키스탄에서도 수상자가 나왔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수상자는 여전히 0이다. G20를 이끄는 선진국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수상이 예측된 현택환 단장은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하는 화학자다. 나노입자의 대량 합성법을 개발했는데, 삼성전자의 QLED TV가 이 기술을 응용한 것이다. 2020년에만 <네이처>, <사이언스> 등에 4편의 논문을 내며 과학자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런 만큼 노벨상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2020년 9월 한국의 첫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주요 언론 헤드라인으로 대서특필되었다.

     

안타깝게도 예상은 빗나갔다. 수상의 영광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발명한 에마뉘엘 샤르팡티에와 제니퍼 다우드나에게 돌아갔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DNA를 잘라 염기서열을 교정하는 도구다. 인간의 난치병 치료는 물론, 동식물 개량에도 혁신이 기대되는 꿈의 기술이다. 그러니 언젠가 노벨상을 받을 성과이기는 했다. 다만 하필 현택환 단장이 유력하던 해에 받아서 우리로서는 아쉬웠다.

      

샤르팡티에와 다우드나도 현택환 단장처럼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샤르팡티에는 독일 막스 플랑크 협회, 다우드나는 미국 로런스 버클리 국립연구소 소속이다. 이곳들은 1911년과 1931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국가 연구소다. 반면 현택환 단장의 기초과학연구원은 2011년 출범했다. 두 연구소와는 100년에 가까운 차이가 난다. 그 차이를 극복하고 노벨상 유력 후보로 떠올랐으니, 이것도 대단한 일이다.

     

실제로 노벨상 수상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내(장기지원)다. 노벨상은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지식의 발견자에게 수여한다. 그러려면 과학의 탐구가 닿지 않은 미개척 영역에서, 누구도 해결 못한 난제를 파고들어야 한다. 당연히 시간과 인력과 자원이 필요하다. 노벨상을 휩쓰는 선진국 연구소들이 긴 역사를 가진 이유이기도 하다.

      

전술한 막스 플랑크 협회는 올해가 설립 113주년이다. 이 연구소는 안정적인 장기 연구를 보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수한 과학자를 일단 선발하면, 충분한 예산을 주고 모든 권한을 맡긴다. 초대 회장인 아돌프 폰 하르낙이 세운 ‘하르낙 원칙’이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국가가 세금으로 연구소를 운영한다는 발상은 낯설었다. 그러나 하르낙은 과학자들이 강의 부담 없이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기초과학에 장기간 몰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야 국방력 강화와 산업 발전을 이끌 기반지식과 원천기술이 쌓인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당시 과학에서 막 발견한 전자기 현상, X선, 암모니아 합성법 등이 신산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하르낙의 거대한 구상을 실현할 주체는 국가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제의 칙령으로 1911년 카이저 빌헬름 협회를 창립했고, 그것이 1948년 막스 플랑크 협회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막스 플랑크 협회는 두 번의 세계대전, 대공황, 라인강의 기적, 통일 등 격동의 시대를 관통해왔다. 하지만 장기‧안정 기초연구라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누가 집권하고 무슨 정책을 세우든, 과학자들에게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한 덕분이다. 역대 회장들의 임기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113년 동안 재임한 회장들은 13명으로, 평균 임기가 8.6년이다. 협회를 세운 초대 하르낙은 19년, 전후 성장기를 이끈 6대 오토 한은 14년을 재직했다. 임기 3년에 그마저도 정권 교체의 영향을 받는 우리나라 연구원장들과는 대조적이다. 이러한 장기‧안정 기초연구의 결과로 31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수상의 평균 주기가 3.6년이니, 월드컵이나 올림픽이 열리는 것보다 자주 노벨상을 받는 셈이다.

     

노벨상 수상에 필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협력(공동연구)이다. 이제 과학은 아이작 뉴턴이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처럼 천재 한 명에 의존하는 연구는 불가능하다. 연구의 범위가 넓어지고 분야가 전문화한 까닭이다. 현대물리학의 기수인 양자역학은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위시한, 코펜하겐 학파의 집단 작업으로 성립했다. 영화 <오펜하이머>로 유명해진 맨해튼 계획도 마찬가지다. 로런스 버클리 국립연구소가 개발한 대형 입자가속기를 중심으로, 많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협력해서 원자력을 상용화할 수 있었다.

     

극동의 변방 일본도 서양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과학 강국이 되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직후 서양으로 보낸 유학생들이 석학들의 연구실에 들어가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이를 계기로 1920년대 아인슈타인,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이 연달아 일본을 방문했다. 수많은 과학도가 이 대가들의 지도를 받아서 연구자로 성장했다. 이것은 두 가지 효과를 냈다. 국내 연구 수준을 끌어올리는 한편, 거기서 나온 성과를 서양에 알린 것이다. 1949년 유카와 히데키의 첫 노벨물리학상도 그렇게 가능했다. 그는 중학생 때 이미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들었고, 대학원생 시절 보어, 하이젠베르크와 연구했다. 이러한 끈끈한 연계 덕분에, 노벨상 수상 성과인 중간자 이론의 가치를 서양에서 곧바로 알아보았다.

1937년 일본에서 강의하는 양자역학의 대부 닐스 보어. 일본은 일찍부터 서양의 공동연구 파트너로 인정받았다.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기초과학의 장기지원과 공동연구가 모두 부족했다. 오랜 식민통치와 내전으로 온전한 근대국가를 만들 수 없었던 탓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연구소는 1966년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다.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만들 수 있었다. 핵심 임무는 과학연구보다는 선진기술 도입이었다. 초대 최형섭 소장이 “산업계에 도움이 될 연구를 해야 한다. 과학자들이 좋아하는 사치스러운 기초연구는 못 한다. 노벨상을 받고 싶은 사람은 여기 오지 마라”라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농업국가에서 산업을 일으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자동차, 조선, 철강, 전자 등의 R&D를 주도하며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덕분에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세계 과학계에서의 존재감은 여전히 미미했다. 대부분 연구가 새로운 발견보다는 기존 지식을 응용‧가공하는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은 선진국의 지식을 이용만 하는 무임승차자”라며 냉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들어서야 기초과학에 제대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뛰어난 과학자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창의적 연구사업, 국가과학자 지원사업 등이 그 예다. 그 결과 대학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세계와 경쟁할만한 역량을 갖출 수 있었다. 서두에 소개한 현택환 단장도 이 무렵 창의적 연구사업 단장에 선정되어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다만 대학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교수 1인 연구로는 패러다임을 바꿀 대형 성과를 내기 어려웠고, 해외 커뮤니티와의 집단 교류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기‧대형 연구에 적합한 조직이 필요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2011년 기초과학연구원이 출범했다. 국내에 이미 20개가 넘는 과학 분야 출연(연)이 있었지만, 기초과학연구원은 다음의 두 가지에서 특별했다.

     

첫째로 기초과학의 장기‧대형 연구에 집중했다. 이전까지 기초과학은 주로 대학의 몫이었고, 그것은 3~5년 단위의 연구비 지원에 의존했다. 이런 구조에서 연구는 각 대학의 연구실로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기초과학연구원은 우수한 과학자를 중심으로 수십 명의 연구원, 엔지니어, 학생들이 결집하는 ‘연구단’을 기본체제로 삼는다. 연구단에는 약 50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며, 10년의 연구를 보장한다. 물론 성과가 좋으면 연구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다. 물리‧화학‧수학‧지구과학‧융합 등 분야에 50개 연구단 구성이 목표이며, 현재 30개 연구단이 운영 중이다. 이러한 조직 형태는 대학이 하기 어려운 대형실험장비 활용 연구, 다학제 집단연구에서 강점을 발휘한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가속기 실험을 하는 연구진. 현대과학의 키는 국제공동연구, 집단실험에 있다.

     

둘째로 해외 연구소의 선진 시스템을 이식했다. 기초과학연구원은 우수한 과학자를 선발해 자율성을 보장하는 막스 플랑크 협회의 철학을 벤치마킹했다. 또한 국내 어느 연구소보다도 개방적이어서 인력 유입이 자유롭다. 글로벌 스탠더드 기반의 다양한 제도가 이를 구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해외 석학들이 주도해서 연구단장을 선발‧평가하는 시스템은 독보적이다. 과학적 우수성에만 천착하는 이러한 평가체계 덕분에, 분야와 국적을 막론한 대가들이 이주해서 연구하고 있다. 기초과학연구원에 외국인 연구자 비율이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명성이 높은 외국인 석학들은 우수한 인력을 유치하고 국제공동연구를 확대하는 데 특히 유리하다.

    

덕분에 출범 10여 년 만에 고무적인 성과들이 나오고 있다.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는 기초과학연구원을 한국 과학의 새로운 시도로 여러 차례 조명했다. 매년 발표하는 논문 피인용 평가에서도 다수의 연구자가 세계 1%에 오른다. 2020년 현택환 단장의 노벨상 예측은 그것의 극적인 사례였다. 전체 논문에서 피인용 상위 1% 논문이 차지하는 비중도 해외 유명 연구소와 비슷하거나 앞서나간다. 이제는 우리나라에도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자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노벨상 수상의 전조 현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이들이 최고의 실적을 내도록 꾸준히 지원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몇천 원으로 다이아몬드를 만들 수 있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